# 216
<공략자들 216화>
50층 공략 성공에 대한 기사는 전 세계에서 다뤄졌다.
기사가 뜨자마자, 공략 관련 정보가 인한의 스트리밍 채널인 ‘해태 채널’에 올라왔다.
그렇게 잠시 휴식 기간을 가질 동안, 이정환이 인한을 종로로 불러냈다.
그런데 이정환의 옆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한 씨. 푹 쉬셨어요?”
“아, 소영 씨도 계셨군요.”
“당연하죠!”
인한이 어떻게 된 거냐는 눈빛으로 이정환을 바라봤다.
대답은 않고 그저 멋쩍게 한 번 웃어 보인 이정환은 두 사람을 안내했다.
“중간보고는 몇 번 한 거 기억나지?”
“그거야…… 그럼 이게?”
인한이 눈을 빛냈다.
이정환이 안내한 곳에는 빌딩 하나가 우뚝 서 있었다.
최신 건물과는 조금 거리가 먼 건축 형태를 띠고 있는 빌딩이었다.
표면은 붉은색으로 되어 있는 데다 특색 없는 외견이었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고풍스럽게 보일 것 같기도 했다.
그 건물을 바라보며, 이정환이 설명했다.
“사연이 많은 건물이야. 완공되자마자 국내의 중견 무역 상사에서 임대할 예정이었는데, 바로 몬스터 웨이브가 터져 버렸지. 주요 경영진은 물론이거니와 주주들도 깡그리 행방불명 상태라, 성가신 소송이 몇 개 남은 상태였어. 그러다 올해 말에 신용 은행이 사들인 거야.”
“이걸 입찰하겠다고?”
종로 한복판의 커다란 빌딩 하나를 사들이는 것.
아무리 금전 감각이 부족한 인한이라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은 알고 있었다.
“그냥 사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직원들도 그대로 둘 건데? 너, 내가 자료 준 거 안 봤지?”
“알아서 할 줄 알았지.”
“에휴…… 소영 씨한테 소개받아서 돈을 좀 불려 봤어. 해태 길드가 가진 재산이 네 상상보다 훨씬 많다고 장담할 수 있다. 진짜 대한민국은 돈 넣고 돈 먹기야. 돈이 많은 만큼 불리기도 쉽더라.”
인한이 힐끗 이소영을 바라보았다.
“후후, 제가 이래 봬도 재벌 2세거든요.”
이소영이 싱긋 웃으며 가슴을 쭉 폈다.
그 모습이 나름 귀여웠던지라 인한도 픽 웃어 넘겼다.
“일단 사장은 너, 부사장은 나, 이사진들은 간부나 몇몇 랭커들. 물론 제작 팀이나 2, 3팀에서도 적당히 실적 있는 사람들은 이사진에 넣었고…….”
“그런 건 알아서 했겠지. 이건 뭐야? 대흥 공업 인수?”
“아아, 생산 공장 몇 개를 인수할 생각이었거든. 부도났던 회산데, 라인 몇 개가 노화된 기계인 것만 빼면 상당히 괜찮아. 그래서 제작 팀 규모를 키웠어. 벌써 라인 돌아가기 시작했고, 주력 상품이었던…….”
이정환의 입에서 줄줄이 사업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소영은 옆에서 맞장구를 치거나 부족한 부분을 설명했다.
‘저게 다 무슨 소리야?’
하지만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인한으로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적당한 부지 하나를 구입해서 연구소를 설립했다. 리 쉔펑 씨와 교수님들 다 이쪽으로 모실 생각인데. 물론, 딱히 한국에 짓는다는 건 아니야. 미국에서 하시길 원하면 미국에 설치해 드릴 예정이야.”
“오, 그래?”
“벌써 하나 연구 진행 중인 게 있어. 듣기로는…… 에이즈 치료에 탁월한 효과가 있는 신약이라던데?”
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한이 대충 슥슥 스케치만 해 뒀던 것을 이정환이 완성해 나갔다.
아니, 사실 이정환이 거의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아직까지 인한을 배신하지 않은 게 용할 정도였다.
‘일해라, 핫산.’
오래전 농담을 떠올린 인한이 낮게 웃었다.
이정환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하며 귀를 긁적였다.
* * *
검은탑 51층, 독의 숲.
극한의 난이도였던 50층 공략이 있었던 탓일까.
공기 중에 극독이 섞여 있는 51층이었지만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공략조의 일반 길드원들은 조금 힘들어했지만, 랭커들이나 간부들은 중독 면역 스킬이 올라간다고 그저 즐거워할 뿐이었다.
일반 길드원들도 면역 스킬 작업을 반복하면서 어느 정도 수준이 올라간 상태였다.
“그럼 갑니다!”
51층 필드.
겐지가 인한에게 달려들며 외쳤다.
콰앙! 콰아앙!
폭음이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파괴의 현장이 펼쳐졌다.
마나 스킬 5단계에 오른 겐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성장 중이었다.
“익스트림 스팅거!”
그러나 검 끝에만 예리하게 집중시킨 오러가 인한의 공격을 모조리 꿰뚫고 접근해 왔다.
겐지의 작명 센스는 그야말로 최악이었지만.
콰가가가!
기술의 위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단순 찌르기에 불과하지만, 검 끝에 한정해서 오러를 사용하니 오러의 소모가 극단적으로 적었다.
거기다 워낙 예리하게 집약시킨 덕분에 위력도 만만치 않았다.
그 누구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기술.
그러나 인한은 태연한 표정으로 트리아스 액셀을 전개했다.
콰아앙!
그 순간, 겐지의 오러가 통제를 잃고 순식간에 사방팔방으로 튕겨져 나갔다.
“헉!”
퍼엉!
그 뒤로 중거리에서 펼쳐지는 파공탄.
집채만 한 오러의 폭탄이 날아와 폭발했다.
“크악! 뜨거워!”
아니, 오러의 폭탄이 아니었다.
오러가 터지는 순간, 새빨간 화염이 겐지를 향해 쏟아졌다.
정령술의 힘.
거기다 폭발의 방향을 용언으로 제어해 겐지에게 집중시킨 것이다.
“크으! 나의 몸은 검으로 되어 있다!”
온몸에 오러를 집중해 그마저도 버틴 겐지가 버럭 외쳤다.
쓰러지지 않고 당당히 우뚝 선 겐지였으나.
“제로 어택.”
콰앙!
오러의 방패를 무효화하며 파고드는 공격에 기어코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크으, 역시 인한 님은 강하십니다!”
겐지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그게 대체 뭡니까? 오러의 제어가 순식간에 풀렸어요! 뭐랄까…… 이물질이 들어와서 제어를 풀어 낸 기분이었습니다! 후우, 전 아직이군요.”
“그렇게 침울해하지 않아도 된다. 명색에 길드장인데 한 수 재간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
“원래 이런 거 못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으으! 세상은 불공평하구나!”
10년도 안 돼서 마나 스킬 5단계에 도달한 천재가 할 말은 아니었다.
순간 울컥한 인한이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트리아스 액셀이 6단계로 상승되며 변한 것들이 몇 가지 있었다.
그중 첫 번째가 겐지가 말한 것이었다.
‘침식이라고 해야 하나?’
인한이 자신의 손바닥을 보며 피식 웃었다.
트리아스 액셀은 상대의 힘과 부딪힌 순간, 상대의 힘에 파고들어 힘을 유지하는 제어력을 무너뜨린다.
단순히 오러에만 적용되는 건 아니고, 마법이나 정령술에도 사용할 수 있었다.
찾아온 두 번째 변화는 바로 극체술과 기공술의 소멸이었다.
[스킬]
<액티브 스킬>
1. [트리아스 액셀 <6단계> (EX) Lv.2]
……
<마나 스킬>
1. [위그드라실류 마력 연공(S)]
앞뒤를 생각해 보면 트리아스 액셀에 합쳐진 게 분명했다.
“야, 나와! 나랑 한판 해 보자!”
“오! 좋습니다!”
임태호가 대검을 어깨에 걸치며 인한의 앞에 있던 겐지를 불러냈다.
콰앙!
또 한 번 폭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인한은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 슬며시 기운을 끌어 올렸다.
위이이이이잉!
극멸기가 펼쳐질 때 흘러나오는 특유의 소음.
마지막으로 세 번째 변화, 극멸기의 제어였다.
화아아아!
극멸기는 마나마저 소멸시키는 힘이었다.
그 때문에 극멸기를 펼치면 인한 자신에게도 피해가 왔다.
위그라노아의 경고 이후 펼치지 않았던 힘이었는데, 원형 구현을 완성한 이후에 갑작스레 제어가 가능하게 됐다.
우웅!
마나를 소멸시키지 않고, 그저 발동된 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극멸기.
단순히 인한의 감상에 불과하지만, 어째서인지 세계의 근원에 닿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잘만 하면 마나를 생성시킬 수도 있는 것 아닐까?’
극멸기를 펼치면 펼칠수록 극멸기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느낌이었다.
극멸기는, 그 이름과는 달리 그저 소멸시키는 힘이 아니다.
아니, 애초에 트리아스 액셀처럼 어떠한 ‘기운’이나 ‘힘’으로 보기 힘든 경향이 있다.
콰아-!
한순간 제어가 풀린 탓일까.
극멸기가 소름 돋는 소음을 토해 냈다.
인한은 다급히 극멸기를 해제했다.
여전히 인한에게 극멸기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힘이었다.
“…….”
인한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
그곳에서, 이정환이 우두커니 선 채 인한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 *
한 여인이 아름다운 나신을 드러낸 채 춤을 추듯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목에서부터 가슴과 복부, 골반을 타고 하체로 내려오는 유려한 선은 남녀를 불문하고 눈이 빼앗길 만했다.
또한, 완전한 비율을 이루고 있는 이목구비는 도저히 사람의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전신에는 새빨간 선혈이 가득 묻어 있었다.
길게 내려온 머리카락과 양손의 손끝, 발과 온몸의 구석구석까지.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걷어 냈다.
여인은 의미 모를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냈다.
“끝. 완성됐다.”
그녀의 이름은 아테리너스.
아발론의 일곱 왕좌 중 하나, 전쟁의 왕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역시 드워프들의 제작 능력은 인정해 줘야겠지. 꽤 괜찮은 걸 만들었어, 후후!”
그녀의 정면, 넓은 공터에 섬뜩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새빨간 피로 그려진 정체 모를 마법진.
도저히 한 두 사람의 혈액으로는 그릴 수 없을 정도의 양이었다.
“대, 대체…… 어째서…….”
그녀의 뒤편, 넋이 나간 듯 공허한 눈빛으로 공터를 바라보는 늙은 드워프가 중얼거렸다.
“뭐가?”
“아, 우…… 우, 우린 분명 당신을 위해…….”
“아아, 그건 고마워. 아무리 나라도 양이 워낙 많다 보니 너네들 도움을 받아야 했거든. 꽤 잘 만든 것 같던데?”
“그런데 어째서…….”
“그야…… 나는 난쟁이들이 싫은걸? 못생겼잖아?”
“으, 으, 으아아아악!”
늙은 드워프가 아테리너스에게 달려들었다.
퍼걱!
하지만 채 접근하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풍선 터지듯 터지며 내장을 흩뿌렸다.
아테리너스가 손을 휙휙 젓자 그 잔해들이 훨훨 날아 어딘가에 처박혔다.
그곳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깃덩이가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흠, 뭐 시작해 볼까? 난 분명 말했어. 원하는 건 얻고 만다고. 꼭 얻고 말거야, 후후!”
우우우웅!
마법진이 진동을 시작했다.
그녀는 손에 묻은 피를 새빨간 혓바닥으로 한 번 핥으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 * *
검은 탑 56층이 공략되었을 무렵.
“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리셴이라고 합니다.”
해태 길드 공략조에 인력이 충원됐다.
2팀에 있던 몇 명이 공략조에 합류한 것이다.
리셴을 포함한 12명의 길드원.
전원 원거리 공격형 헌터였으나, 유일하게 겐지만 검을 사용하는 무투파였다.
“흠, 흠…….”
아무래도 어색한 그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리셴은 원체 사람이 진중한 편인지라 입을 꾹 다문 채 은은한 눈빛을 빛냈다.
‘참, 저 양반도 대단하네.’
명색에 과거 랭킹 3위였던 사람다웠다.
인한과 계약한 게 엊그제 같은데 팀의 주역이 되고, 거침없이 탑을 올라 기어코 공략조에 합류하게 됐다.
물론 지금 간부들이 공략하고 있는 56층까지 도달한 건 아니었다.
그들은 아직 45층밖에 오르지 못했다.
지금부터 12명의 신입은 공략조와 손발을 맞추며 다시 56층까지 오르게 될 예정이다.
“존경, 또 존경합니다! 아아! 이분이 바로 그 라스트 사무라이 겐지 님!”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가 가득할 무렵, 한 사내가 겐지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흠흠, 소인 니시야마 겐지라 하오.”
안 그래도 이상한 말투가 더더욱 이상해진 겐지가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고 있네. 좋아하고 있어.’
“오오! 설마 이분은 몬스터 마스터?”
“모, 몬스터 마스터?”
“몬스터 마스터 이창훈 님! 아니십니까!”
“오, 오오! 마, 맞아! 크하하! 내가 몬스터 마스터다! 짜식! 넌 이제부터 날 형님으로 불러라!”
“네! 형님!”
거리가 꽤 떨어진 곳에서 구경하고 있는데도 단번에 이창훈과 닮은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조나단 최.
재미 교포 3세에, 사실상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저래 보여도 그는 엄청난 실력자였다.
히든 클래스 보유자이며, 네크로맨스 계열의 마법을 사용하는 그는, 아직 공략 층은 45층에 불과했음에도 93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몬스터 테이머랑 네크로맨서라. 그것들은 원래 악당들 전용 클래슨데…….’
인사를 나누는 그들을 보고 있을 때, 리셴이 옆에 다가왔다.
“스승님.”
“아, 오셨어요?”
“그동안 격조했습니다. 잘 지내셨는지요.”
“물론이죠. 그건 그렇고…….”
인한의 눈이 리셴을 훑어보다 눈을 빛냈다.
“많이 강해지셨군요.”
풍기는 기세가 갈무리되어 있다.
품은 마력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건만, 강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야말로.”
인한이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상견례를 하고 있는 길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