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공략자들 215화>
수룡의 궁전.
그곳의 몬스터는 단 한 마리였다.
-이게 무슨…….
언제나 차분하던 이정환이 눈가를 찌푸렸다.
수룡의 궁전은 거대한 유적지였으나, 유적지 전역에 몬스터는 보스존에 있는 존재를 빼고는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인한이 말했다.
-내가 그랬잖아. 말이 던전이지, 그냥 단순한 미로야. 중앙에 있는 보스존이야말로 50층 메인 던전의 전부지.
-그냥 들었을 때랑 직접 경험할 때랑 또 다르네.
바로 수룡의 궁전에 진입하지 않고 근처 안전지대에 자리를 잡은 인한이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설명할게.”
안전지대의 중앙에는 거대한 아이템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템이 수압과 물의 침입을 막아 주었다.
거대한 물방울 속에 있는 기분.
이소영이 꼭 아쿠아리움 같다며 신기해했다.
인한이 길드원에게 설명을 하는 동안, 간부들은 이처럼 근처를 둘러보고 있었다.
“50층의 던전의 힘든 점은 호흡, 수압, 시야, 마지막으로 메인 던전의 보스인 베히모스 그 자체야.”
아직 길드원들은 인한이 회귀했단 사실에 대해 모른다.
그래서 언제나처럼 혼자 던전에 도전해서 대략적인 패턴을 알아 왔다고 둘러댄 상태였다.
“베히모스의 생김새는 간단해. 몸길이 50미터에 높이 10미터, 네 발 달린 흰수염고래라고 보면 될 거야. 하지만…….”
“분열한다고 하셨죠.”
“그래, 맞아. 베히모스는 원래…….”
인한이 말을 잇다가 멈칫했다.
-이 아이 이름? 베히모스다. ……이름이 복수형인 이유? 이유는 별거 없어. 이 아이는 저절로 분열하거든. 한 마리가 수백 수천 마리가 되는 거다. 그래서 복수형으로 베히모스라 이름 붙인 것뿐이다.
문득, 그런 말이 기억났다.
6단계에 들어선 후로 때때로 떠오르는 기억의 단편.
옛 일곱 왕 중 하나, 생명의 왕 엘프 갈라두니엘 타리나의 말이었다.
“형님? 왜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어디까지 말했지?”
“베히모스는 원래……까지요.”
고개를 갸웃하는 이창훈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인한이 말을 이었다.
“베히모스 공략은 크게 4단계로 나뉜다. 1단계는 단순 물리 공격만 행하는 단계. 말이 물리 공격이지 놈은 수압에 영향을 받지 않아. 그 정도 질량에 부딪치면 몸이 가루가 될 거다.”
“몸길이 50미터에, 키가 10미터면…….”
상상도 가지 않을 사이즈에 이창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2단계는 마력과 정령술을 사용한다. 사실 단계를 나누긴 했지만, 크게 차이는 없어. 어느 정도 상처를 입었다 싶으면 바로 진행된다. 사용 마법은 전부 물 속성, 사용 정령술도 물속성이다.”
“실드나 마나 미사일 등 기본적인 마법은 사용합니까?”
해태 길드의 공략조, 마법사 랭커 중 하나인 드웨인이 물어 왔다.
“마력량이 거의 1만에 육박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굳이 그런 방식을 쓰지 않고 방출만 해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어.”
“1만!”
“다음으로 3단계. 이때부터 분열이 시작된다. 어느 정도 데미지를 입으면 분열하기 시작하고, 수가 늘어난 만큼 성가셔지지. 그리고 이 분열체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면 4단계로 진행된다.”
“4단계는 분명…….”
“마력 무효화입니다. 아니, 정확히는 마력 흡수입니다.”
“끄응…….”
여기저기서 침울한 목소리를 흘렸다.
베히모스는 4단계에 도달하면 공격받은 마력의 일부를 흡수한다.
타격도 입긴 하지만, 마력 흡수량이 타격을 상회했다.
“지금부터 공략법이다. 상당히 어려울 거야. 일단 패턴을 파악하자. 누구라도 다치면 바로 나오는 거고, 익숙해질 때까지 며칠 동안 계속 반복한다.”
그렇게 공략법에 대한 재확인이 끝난 후, 해태 길드는 50층 메인 던전 공략에 착수했다.
50층 던전의 입구는 해구(海溝)의 깊숙한 곳에 위치했다.
풍화되어 굴곡이 잘 보이지 않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보스존 입장을 알리는 천문과 함께.
-쿠우우우우…….
짙은 어둠 건너편에서 무거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 말도 안 돼. 저렇게 크다고?
-작은 아파트 정돈데?
마력 채널로부터 길드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스존에 도착하자, 베히모스의 전신이 드러났다.
경악스러운 크기의 몬스터였다.
지금껏 나온 몬스터들 중, 가장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흰수염 고래를 닮은 둥그스름하고 널찍한 외견.
그러나 기둥과 같은 두터운 네 개의 다리가 지면을 딛고 있다.
머리 위에는 다수의 뿔이 우뚝 솟아 있고, 파충류의 그것을 닮은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선연한 빛을 발했다.
‘다행히 변종은 아니다!’
인한이 눈을 빛냈다.
격변의 날 이후 변종 몬스터가 나오는 횟수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다행히 베히모스는 변종이 아니었다.
-다들 집중해! 얘기했던 대로 간다!
분명 악몽과 같은 난이도이기는 하지만, 이곳에 모인 공략조는 전부 역전의 용사다.
거기다 이미 이론적으로는 공격 패턴, 진행 방식, 공략 방법까지 파악한 상황.
모든 층의 모든 보스 몬스터들은 처음 진입한 순간 잠시 동안 공격도 방어도 안 한 채 가만히 있었다.
퍼엉! 퍼어어엉!
공략 첫 번째 단계는 바로 어둠을 밀어내는 것.
심해, 거기다 해구 특유의 어둠 탓에 시야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마법사 클래스의 길드원들이 조명탄 역할을 하는 플래시를 터뜨렸다.
-다음! 2단계 거치지 않고 바로 3단계로 진입한다!
두 번째 공략은 바로 이것이다.
시간을 끌며 단계를 천천히 밟아 나가면 손해를 보는 건 해태 길드 쪽이다.
일단 최대한 많은 피해를 입힌 후에 분열하게 만들 생각인 것이다.
공략조 전원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원거리 공격을 준비했다.
콰가가가가강!
공격 위치는 베히모스의 오른쪽 앞다리.
거대한 몸이니, 그걸 지탱하는 다리에 타격을 주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
-쿠우우우…….
그러나 역시 모든 공략이 마음대로 진행되지는 않는 것인지, 베히모스는 살짝 비틀거렸지만 넘어지지는 않았다.
인한이 땅을 박찼다.
‘풍제.’
아무리 건재해도 타격은 있다.
가죽과 근육이 찢어져 파란색 피가 배어 나오고 있다.
인한이 그곳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쿠오오오오-!
콰아아아아아!
트리아스 액셀의 힘이 폭발하며 엄청난 양의 기포가 터져 나왔다.
그 기포 사이로 베히모스의 파란색 피가 뿜어져 나왔다.
-쏟아부어!
인한이 외쳤다.
큰 덩치, 거기다 움직임을 멈춘 상대.
이만큼 좋은 표적은 없다.
콰가강! 콰가가가강!
오러, 마법, 정령술. 구분 없이 수많은 공격이 이어졌다.
지면이 뒤집어지며 엄청난 양의 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우우우웅!
진동과 함께 자욱하게 피어오른 먼지와 기포 너머로.
-크륵!
-크우우우우!
-쿠오오!
수백 개의 분열체로 분화된 베히모스가 해태 길드를 기다렸다.
베히모스 공략 6일 차.
“크으! 힘들다, 힘들어!”
임태호가 등을 툭툭 두드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필드를 진행하는 것에는 7일이면 충분했건만, 정작 보스존에서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다.
“공략은커녕 스테이터스 상승이나 하고 있군.”
“저 힘 스테이터스 30 포인트나 올랐습니다.”
“너도냐? 난 한 20포인트 정도?”
겐지가 임태호와 대화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리 마력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나, 바닷속에서 무기를 휘두르다 보니 근육이 쉽게 지쳤다.
덕분에 때아닌 기본 스테이터스의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편 인한은 이정환이 농담하듯 던진 말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째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공략을 하는 것 같지?”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동안은 너의 원맨쇼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금은 제대로 된 팀워크가 이루어지고 있잖아.”
“하긴.”
이정환의 말에 인한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곳에서 하는 공략은 확실히 이정환의 말대로였다.
인한이 원형 구현이나 무극인을 통해 베히모스의 공격을 막아 내면, 공격은 백 명이 넘는 길드원들이 화력을 쏟아붓는다.
때때로 그 반대가 되기도 하며, 너무 위력적인 공격이 오면 서로 돕기도 한다.
이정환이 만들었던 진형이 제대로 움직이고 있다.
손발이 착착 맞는 모습을 보면, 인한도 때때로 놀랄 정도다.
‘예상보다 더 괜찮아. 물론, 아직 부족하지만.’
아직 인한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현재 공략조는 중, 단거리에서의 화력은 어떤 길드보다 뛰어나지만, 장거리에서의 화력이 떨어진다.
거기다 급박한 상황에서 명령이 중간에 끊기는 경우도 있다.
아무래도 간부진들 중 용병술에 능통한 사람이 이정환을 제외하면 기껏해야 이소영뿐이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기다려야 할 때다. 하영이라면 한 축을 담당할 수 있을 거야. 하영의 스킬 자체도 단체전에 유리하고, 상황 판단 능력이 뛰어났으니까. 리셴이 차분히 성장하면 전력 보강에도 충분할 거고. 나머지는 장거리 공격의 부족인데…….’
아무래도 마법사 카테고리에 속한 헌터는 희귀하다.
상당히 머리를 써야 하는 클래스인 데다, 클래스를 획득하는 5층까지 병장기를 쓰다가 갑자기 마법으로 갈아타는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오래 해?”
이정환이 문득 말해 왔다.
그에 인한이 손사래를 쳤다.
“그냥, 진형에 대해 생각 중이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장거리 공격이 취약하니까.”
“흠, 하긴 마법사 카테고리가 조금 떨어지는 편이지. 그래서 2팀 양성한 거 아니었어? 벌써 40층에 도착했다던데? 이번 중층을 돌파하면 적당히 사람 추려서 키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그래야지.”
“그럼 다시 들어가 보자고. 슬슬 재도전 시간이 왔을 테니까.”
이정환의 말에 인한이 눈을 빛냈다.
중층의 악몽이라 불리던 베히모스.
그러나 공략까지 멀지 않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할 수 있어.”
방금 전 도전에서 4단계까지 도달했다.
중간에 베히모스의 마법 몇 개를 놓치지 않았다면 벌써 끝났을 게 분명했다.
“자! 휴식 끝! 재진입한다!”
인한의 외침에 길드원들이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베히모스 공략 10일 차.
이제 진주도 거의 다 떨어진 상태였다.
중간에 한 번 휴식을 위해 탑 밖에 나갔다 들어온 공략조는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과 함께 보스존에 진입했다.
콰앙! 콰아앙!
3단계까지 진행된 상황.
마치 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음과 함께 베히모스의 육중한 몸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며 분화했다.
-일점사하지 마! 데미지를 최대한 분산해서 준다! 카운트 다운하면 시작! 삼, 이, 일, 지금!
콰아아아앙!
오러의 폭풍이 정면에 몰아쳤다.
-키이이이!
베히모스의 무리가 기이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우웅!
다음 순간, 베히모스 무리에서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온다!
물 속성 폭발 마법.
압축시킨 물을 한순간 개방하는 것으로 사방에 엄청난 위력의 와류를 생성시키는 마법이었다.
콰우우우우우!
물에서는 소리가 더욱 잘 전달된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폭발음이 고막을 울리고, 간신히 공격에 버틸 수 있었다.
-캬륵! 키리릭!
드디어 4단계에 진입했다.
어느새 분열체들이 다시 합쳐졌다.
전신에 상처가 가득한 베히모스의 덩치는 기껏해야 1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게 됐다.
-내가 앞장선다!
4단계는 마력 흡수.
하지만 트리아스 액셀은 마력에만 근원을 두지 않는다.
콰앙!
인한의 주먹질에 백색의 파문이 몰아쳤다.
아무리 인한이라지만 전투의 여파에 힘이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다.
베히모스의 몸이 기우뚱했지만, 큰 타격은 없어 보였다.
콰앙! 콰앙!
하지만 인한이 노리는 것은 타격이 아니다.
통칭 어그로, 시선을 끌기 위한 노력.
베히모스가 인한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공격을 펼칠 때, 아래쪽에선 근거리 공격형 길드원들이 체내의 마력을 증폭시키며 물리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마법사와 서포터 카테고리의 헌터들은 근거리 공격형 헌터에게 버프를 중첩시켰다.
‘부탁한다!’
-알았다.
-응! 알았다!
인한의 외침에 정령들이 길드원들에게 버프를 나누어 주었다.
콰아아앙! 콰아아앙!
폭음의 크기가 더욱 커졌다.
-캬아아!
베히모스가 발악하듯 마법과 정령술을 터뜨려 길드원들을 떨쳐 냈다.
그러나 그 공격의 궤도가 갑자기 휘더니 엉뚱한 곳에 터졌다.
원형 구현. 인한의 힘이었다.
‘그리고!’
한순간 인한에게 걸렸던 집중이 풀렸을 때.
인한이 베히모스에게 달려들었다.
‘개량형 마극포!’
콰아아아아!
백색의 포탄이 정면으로 뻗어 나갔다.
천지를 꿰뚫는 빛의 기둥.
그 폭발적인 힘에 베히모스의 몸이 이리저리 뒤틀렸다.
개량형 마극포.
개량형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의도적으로 트리아스 액셀의 힘을 다소 줄인 후 터뜨릴 뿐인 공격이었다.
그 공격에 베히모스가 파란색 피를 왈칵 쏟아 냈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은 베히모스가 돌연 입을 쩍 벌렸다.
-피어다! 다들 마력을 고막에 집중!
인한의 외침 직후.
-쿠오오오오오오오오!
베히모스의 울음소리가 해구를 울렸다.
길드원 전체가 얼굴을 구기며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분명 피어는 피어였는데, 마력이 스며들어 있지 않았다.
고막을 보호했다고 한들 마력이 심신에 파고들어야 맞는데…….
‘설마?’
베히모스의 커다란 눈동자를 본 인한의 표정이 환해졌다.
-쿠오…….
베히모스의 몸이 천천히 쓰러지고 있다.
승리!
중층 공략이 완료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