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4
<공략자들 214화>
49층 해안가.
딱히 지칭할 말이 없어 해안가라고는 하지만, 현대의 지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환경이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와, 이건 또…….”
이창훈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경계에 가까워진 바다는 파도 한 점 없었다.
보통 바다라는 건 밀물과 썰물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잘 그려진 그림을 보고 있는 것처럼 우뚝 멈춰 선 채 움직이질 않는다.
“거기다 옆에는 사막이고…….”
단순히 해변가의 모래 정도가 아니라, 뒤편으로 상당히 넓은 범위에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그 중앙에는 뜬금없이 숲?”
그 사막의 중간중간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이창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너무 그렇게 놀라지 마. 물이 안 움직이는 건 나도 신기하지만 밖에도 이런 지형은 있으니까.”
“네?”
“호주 가 봤어? 호주에는 바다 옆에 사막이 있고 사막 건너에 빽빽한 숲이 펼쳐진 지형이 있어. 여기랑 비슷하네.”
여기저기 여행을 많이 가 봤던 이소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연의 신비란.”
“잡담은 거기까지 하고 사냥하러 가자.”
“네? 형님, 여기 몬스터가 어디 있습니까?”
“물 안쪽에.”
“……지금 저 정체 모를 물에 빠지라는 소립니까?”
부글부글!
이창훈이 말하기가 무섭게 물가에서 무지막지한 기포가 올라오더니, 열 개의 다리와 집게를 지닌 거대한 돌덩이가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게잖아, 저거?”
이창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족히 신장 3미터 정도 되어 보이는 그 몬스터는 몸통이 회색빛의 암석처럼 생겼다.
그 거대한 몸통에는 조개며 굴이며 각종 생물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쿠오오오오!
놈이 포효했다.
대체 게가 어떻게 소리를 지를 수 있는 지 알 수 없지만, 포효가 흘러나온 동시에 집게와 몸통에 흐릿한 빛무리가 서렸다.
그것은 마력의 빛이었다.
“요즘은 개나 소나 다 다루네…….”
“흠, 먹이를 찾으러 잠깐 나왔나 보군. 잘됐다. 일단 저놈부터 사냥해서 익숙해지자.”
“예?”
“자! 사냥 시작! 입수하기 전에 튜토리얼이라고 생각하고!”
인한의 외침과 함께 사냥이 시작됐다.
그러고 나서 인한은 길드원들에게서 빠져 나왔다.
인한이 있어선 팀워크도 팀워크지만, 일단 개개인의 성장에 도움이 되질 않았다.
멀찍이 떨어진 인한은 천천히 바다로 들어갔다.
‘그럼 나도 슬슬 시작해 보자.’
풍덩!
인한은 오러를 손끝에 집중해 팔뚝을 그었다.
상처 부위로부터 피가 빠져나갔지만,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그 순간.
-크르르르!
피 냄새를 맡은 주위의 몬스터들이 엄청난 속도로 인한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인한은 일절 다른 힘은 사용하지 않고 원형 구현만을 사용하며 사냥을 했다.
확실히 쉽지만은 않았다.
‘역시 내 원형 구현은 공격을 위해선 펼칠 수가 없어.’
공간 장악의 힘을 긴 창처럼 만들어 찔러 보려고 한 순간, 어째서인지 원형 구현이 풀려 버리며 막대한 마력만 흩어져 나갔다.
스스로의 공격 궤도를 트는 정도는 괜찮았지만, 다른 방법은 먹히지 않았다.
‘내 심상이 두려움이고, 구현한 원형은 절대적인 방어이기 때문인 걸까.’
사실 공간 장악이든, 공간 왜곡이든, 인한이 대충 붙인 이름에 불과하다.
원형 구현이란 세계의 근원에 있는 절대적인 개념을 현실에 구현하는 일을 뜻한다.
그리고 인한이 구현한 건 어디까지나 ‘방어’다.
그렇기에 공격적으로 활용하려고 하면 저절로 풀려 버리는 것 같았다.
‘물론 그냥 방어라고 말하긴 좀 그렇긴 한데…….’
인한도 자신이 구현한 원형을 정확히 묘사할 수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유는, 애초에 세계의 근원에 있는 원형 자체가 절대적인 개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말로 뱉는 순간 그건 언어라는 ‘실체’를 얻게 되고, 실체를 얻었다는 건 절대적인 개념인 원형의 모방품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굳이 말하면 지키는 힘……이라고 말해야겠군.’
-크어어어!
그때, 전신이 무지갯빛의 비늘로 덮여 있는 상어 한 마리가 인한을 덮쳐 왔다.
퉁!
물론 접근해 온 순간 정체 모를 막에 의해 막히며 튕겨져 나갔다.
‘파공탄!’
콰아아!
엄청난 기포를 뿜어내며 인한의 공격이 상어의 주둥이에 파고들었다.
펑!
내면에서부터 폭발한 트리아스 액셀의 힘에 상어의 몸이 산산조각 났다.
‘이러나저러나 주먹질로 먹고 살아야 한단 소리잖아? 복잡할 건 없어.’
인한의 달려드는 몬스터를 향해 주먹을 뻗으며 눈을 빛냈다.
바다에서 잡힌 몬스터들을 한데 모은 인한이 말했다.
“지금부터 몬스터의 표면에 달라붙어 있는 조개들을 다 뒤져 보도록 합시다.”
“예!”
몬스터 자체의 해체와 동시에 원목적인 50층 공략을 위한 아이템 제작에 돌입했다.
“1조, 3개입니다!”
“2조, 10개입니다!”
“3조, 4개입니다!”
…….
“도합 124개입니다!”
해태 길드가 수집한 아이템은 다름 아닌 검은색 진주였다.
[드레블 해(海)의 진주]
[등급 : B+]
[종류 : 소모품]
[효과]
1. 수중에서 호흡이 가능하게 됩니다. (제한 시간 : 12시간)
2. 너무 오랜 시간 공기 중에 노출되면 사라집니다.
“한참 부족하군.”
이정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한동안 여기서 지내야겠어. 어쩔 수 없네. 공략조 인원 129명에, 대충 던전 공략하는 데 보름 걸린다고 생각하면…….”
“보름은 더 걸릴 거야. 짧아 봐야 20일, 길어지면 한 달까지 갈 수도 있어.”
인한의 말에 이정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천 개에서 2천 개는 모아야 한다는 거구나.”
50층 도전은 어쩔 수 없이 길어지게 됐다.
때문에 해태 길드는 바닷가 근처의 안전지대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그렇게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크음! 저 잠시 밖에 좀…….”
이창훈이 누가 봐도 어색한 연기를 하며 밖으로 걸어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간단한 즉석 식품으로 식사를 끝낸 인한은 눈을 감았다.
‘오늘도겠지.’
서서히 잠에 드는 걸 느끼며, 인한이 천천히 눈을 떴다.
-뭣이? 자동으로 음식물을 시원해지게 하는 통이라고? 오오! 내 창작욕이 불타오른다!
걸걸한 목소리에 인한이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드워프 한 마리가 있었다.
인한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는 키에, 몸 전체가 근육질에 다부지고, 수염이 상반신을 덮을 정도로 덥수룩했다.
인한은 가라앉은 눈으로 드워프를 바라보며 중얼댔다.
‘땅의 왕.’
드워프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인한의 표정이 더욱 굳었다.
‘레브라그나.’
처음 꿈이 시작된 것은 원형 구현을 성공한 이후부터였다.
그 전에도 때때로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고는 했지만, 원형 구현을 완벽히 성공한 이래로 밤에 잠을 잘 때면 어김없이 인한의 기억에 없는 장면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거기에 맥주를 넣어 마신다는 건가?
“맥주뿐만 아니라 음식도 넣습니다. 저희 세계에서는 차갑게 식은 맥주 아니면 안 마셔요.”
-크으! 차갑게 식은 맥주라! 오늘 바로 해 봐야겠군!
레브라그나는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들이 있는 곳은 축제가 이뤄지고 있는 곳이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캠프파이어가 타오르고, 곳곳에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추며 흥을 돋우고 있었다.
‘아발론에서의 기억.’
보통 기억이란 건 영상처럼 세세한 것까지 확실하게 저장된다기보다는, 특정 요소나 전체적인 맥락으로 저장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인한은 마치 잃어버렸던 걸 찾는 것처럼 그때 느꼈던 향기, 먹었던 맥주의 맛, 살에 닿는 사람들의 온기…… 모든 걸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화악!
화면이 전환되듯 축제의 장소가 순식간에 전환됐다.
이번엔 용왕 볼카누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와 수련을 하던 기억이었다.
-에에잇, 이 멍청한 자식! 왜 그것도 못해! 화염의 정령은 어디까지나 기본이라니까! 용언을 통한 증폭이 후속 작업이라고! 공기에서 산소만 분해한 다음 화염에 주입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냐! 자, 자, 다음! 네 몸 주위의 공기를 절연체로 만들어서 벼락을 흘려 내 봐!
6단계에 들어선 후부터 계속 이렇다.
퍼즐의 조각을 맞추듯 자잘한 기억들이 하나둘 끼워져 갔다.
인한의 눈이 서서히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탑이 세워져 있었다.
기억 속의 인한은 검은 탑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할 수 있을 거야.”
그걸로 끝이었다.
인한의 의식이 서서히 수면으로 부상했다.
* * *
정확히 11일 후.
해태 길드는 2천3백 개 남짓의 진주를 채취하는 데 성공했다.
“으! 몸에 비린내가 밴 것 같아요.”
“……나 한 동안 해산물은 못 먹겠다.”
길드원들이 투덜거리며 몸서리를 쳤다.
하지만 그 11일 동안의 경험 덕에 길드원 대부분이 물속에서 하는 전투에 익숙해진 참이었다.
“인한 님, 이대로라면 50층도 금방 깨겠습니다만?”
겐지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인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50층과 여기는 급이 달라. 거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안 돼.”
해태 길드는 일단 49층 마을로 향했다.
땅의 돌 앞에 선 인한이 진주를 하나 입에 넣었다.
풍덩!
50층으로 이동한 순간, 무지막지한 수압과 함께 숨이 턱 막히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진주의 효과가 발동되며 빠르게 호흡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풍덩! 풍덩!
한 명, 두 명…….
길드원들이 순서대로 50층에 도착했다.
곧 전원이 모였을 때, 미리 말을 맞췄던 대로 인한이 인벤토리에서 드루이드의 인형을 닮은 물건을 꺼냈다.
쇠로 만들어져 있으며 입술 부분에 기이한 문자가 빼곡히 적혀 있는 아이템이었다.
인한이 거기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아아, 다들 들리십니까.
-네! 들립니다!
각 조장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아이템의 이름은 ‘철의 봉화’.
드루이드의 인형과 같은 통신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드루이드의 인형과 달리 통신이 되는 거리는 기껏해야 100미터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마력을 소모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드루이드의 인형과 다르게 일대일 통신이 아닌 다수와의 통신이 가능해지는 게 특징이었다.
-그럼 얘기했던 대로 이 마력 채널로 갑니다. 진주는 최대한 아끼는 걸로. 마법사 팀은 실드 계속 유지해 주시고.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길드원이 괜찮냐고 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심해의 압력을 버티기 위해 마법사 팀이 공략조 전체를 감싸는 실드를 펼쳐야 하는데, 압력이 너무 강해서 단순 실드를 유지하는 데에도 엄청난 마력이 소모됐다.
거기서 인한이 정령술의 힘으로 실드 위에 덮어씌우듯 물의 막을 넓게 펼치는 것으로 압력을 해소하기로 했다.
-말했다시피 전투 시에는 실드를 해제해야 합니다. 그땐 마력을 방출해서 압력에 최대한 버텨 보세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때마침 몬스터가 접근해 왔다.
세계 최초의 중층 공략이 시작됐다.
* * *
50층 진행 1일차.
공략조는 땅의 돌에서 대략 1킬로미터 정도 이동한 후 안전지대를 발견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촤악!
안전지대 내부는 물이 없었다.
조금 눅눅하고 습한 공기가 가득했지만, 심해 지대에 맞지 않게 평범한 풍경이었다.
“이야, 이거 생각보다 더 힘드네.”
임태호가 투덜대며 말했다.
호흡 문제는 해결됐고, 수압을 버티는 거야 인한과 마법사 팀이 수고하고 있으니 괜찮지만, 시야를 확보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심해 특유의 어둠과 필드에 가득한 물 때문에 눈을 떠도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물속에서 땅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보는 건 만화나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얘기지, 현실에선 아니었다.
“그래도 다들 전투는 괜찮네요.”
“화염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건 좀 성가시지만, 다른 마법은 의외로 잘 먹히던데요?”
“일단 진형을 조금 바꿔야겠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공략 회의가 이어졌다.
회의는 간부뿐 아니라 길드원 전체가 머리를 맞대고 이어졌다.
50층 진행 5일차.
이제 슬슬 공략조 전원의 전투가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수중에서 오러를 끌어 올리는 요령도, 전투 방식도 금세 잡을 잡았다.
이동할 때는 지면을 발로 밟으며 이동하는 것이 아닌, 수영해서 이동했다.
참치 떼처럼 한데 모여 물을 가르는 것으로 이동 속도가 증가했다.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야.’
인한이 직접 모았지만 정말 엄청난 모임이었다.
길드원들 전원이 범상치 않은 사람들투성이다.
수중에서의 전투는 경험해 보질 못했을 텐데 며칠 만에 적응해 버렸다.
50층 진행 7일차.
드디어 메인 던전의 입구에 도착했다.
메인 던전, ‘수룡의 궁전’.
심해에 만들어진 엄청난 규모의 건축물을 바라보며, 인한이 눈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