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공략자들 213화>
그때, 탑의 공략은 지지부진했다.
검은 탑 67층에서 공략자들이 멈춘 것은 벌써 5년이 가까워 오고 있었다.
그 전에도 공략이 늦어진 탓에 몬스터 웨이브는 15회 차까지 이어졌고, 사실상 탑의 바깥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이 되어 버렸다.
탑의 바깥엔 안쪽보다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돌아다녔고, 그중에는 무려 7, 80층대의 몬스터도 존재했다.
그 탓에 대부분의 인간들은 검은 탑 안쪽에 터전을 옮겼고, 그곳에서 생활을 이어 갔다.
사실상, 지구는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 인류의 인구수는 기껏해야 1억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마저도 몬스터에 의한 독이나 전염병으로 인해 여전히 빠른 속도로 줄어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16번째 몬스터 웨이브가 다가오고 있다.
시간 제한이 한계에 다다르면 검은 탑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은 밖으로 쫓겨날 것이고, 탑의 내부에 다시 들어오기 위해서는 또다시 보름의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만약 이번에 탑에서 쫓겨난다면, 분명 인류는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꼭.’
피곤에 절어 있는 사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을 쥐었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
공략은 성공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지혜로운 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수많은 강맹한 자들이 검을 휘둘러도,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그 누구도 이 이상은 올라갈 수 없다.
그 뒤에 이어진 무리한 공략.
공략조는 반파됐고,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났다.
대부분의 일반인은 죽음을 맞이했다.
하위 층에 있던 헌터들도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도 꽤 많은 사람이 생존했지만, 공략을 이어 갈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후.
마치 멸망의 선고를 내리듯, 17번째 몬스터 웨이브가 다가왔다.
사내는 홀로 메인 던전에 도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랭커도, 하물며 공략자도 아닌 사내가 메인 던전까지 도달할 수는 없었다.
무리하게 필드를 종횡했고, 메인 던전에 도착하기 전 사내는 정체 모를 유적지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아니, 죽음에 다다른 순간, 사내는 기묘한 균열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균열에 휩쓸리고 얼마 뒤, 사내는 지금껏 와 본 적 없던 새로운 세계에서 눈을 떴다.
아발론.
사내, 아니, 박철환이 눈을 뜬 세계의 이름을, 그 세계의 원주민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의 앞에 부엉이를 연상시키는 순백의 새 한 마리가 나타났다.
-네놈은 뭐지?
새빨간 눈동자에 호기심을 가득 드리우며, 그 순백의 새가 말했다.
“커흑!”
박철환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이 덜덜 떨렸다.
멍하니 오른쪽을 바라보자, 구원의 검이 묘한 청광을 쏟아 내고 있었다.
‘제길.’
온몸에 열이 들끓고 있었다.
내상 탓이었다.
약을 먹으며 회복하고 있지만 쉽게 잠잠해질 것 같지 않았다.
‘제길! 제길!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박철환이 울분을 토해 내며 마구잡이로 주먹을 휘둘렀다.
그럴 때마다 주변 경관이 초토화되어 갔다.
“후우, 후우……. 큭!”
내상을 입은 와중에 억지로 마력을 일으킨 탓에, 박철환이 무릎을 꺾으며 지면에 쓰러졌다.
“최인한…… 네놈은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몰라. 내가 하는 일이 이 세계를 위한 것이야. 그게 맞단 말이다…….”
박철환이 그렇게 중얼거리다 풀썩 쓰러졌다.
* * *
검은 탑 49층 필드.
임태호가 인한과 마주섰다.
50층 도전을 하기 전에 어느 정도 성장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고, 그러기 위해 필드를 돌아다니며 레벨을 높이고 있던 중이었다.
어쩐 일로 인한이 먼저 임태호에게 대련을 요청했고, 임태호는 기쁘게 받아들이며 검을 들었다.
“흐흐, 어디 한번 손맛 좀 볼까?”
박철환은 큐베리아의 뿔을 가공한 대검을 들고 인한에게 겨눴다.
외견 자체는 잘 다듬어지지 않은 석검(石劍)같았지만, 사용자의 마력 증폭, 지속 피해, 추가 피해, 방어 관통 등등 수많은 효과를 가진 A+급 아이템이었다.
“약속 지켜라. 손발 안 쓴다고 했다.”
“예, 물론이죠.”
“그럼 간다! 천둥새의 일격!”
파지지지직!
임태호가 검을 휘둘렀다.
그 이름 그대로, 벼락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마력의 폭풍이 인한을 노렸다.
하지만 다음 순간.
휘익! 콰앙!
갑자기 오러의 방향이 회전하더니 하늘로 치솟으며 터져 버렸다.
“으응?”
임태호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그게 뭐냐?”
“음, 이게 되네.”
인한이 고개를 갸웃하다 씨익 웃었다.
“뭐냐니까!”
“아, 마나 스킬 6단계 기술 중 하나입니다. 설마 공간의 좌표를 뒤트는 것도 될 줄 몰랐어요. 이거 용언으로도 비슷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좀 더 연구가 필요하겠어. 아, 계속 날려 보십쇼. 일단 감 좀 잡게.”
인한이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임태호가 표정을 팍 찡그리더니 대검을 쭉 당기며 오러를 있는 대로 집약시키기 시작했다.
“내가 오늘 네놈 팔몽둥이 하나 부러뜨린다.”
쿠구구구구!
마력이 집중됨에 따라 지면이 크게 흔들렸다.
인한 정도는 아니지만 각종 영약을 습득하며 임태호의 마력도 3천 스테이터스나 된 상태였다.
그 막대한 양의 마력이 전부 임태호의 일검에 스며들었다.
“으, 으아악! 또 뚜껑 열렸다!”
“다들 도망쳐! 마법사 팀은 전부 결계 전개하고!”
“아 진짜 맨날 대련만 하면 저래! 하다 보면 질 수도 있는 거지!”
“시끄럽다! 크아아악! 용의 어금니!”
임태호가 짐승이 낼 법한 외침을 하고는 검을 휘둘렀다.
임태호의 오리지널 스킬, 용의 어금니.
이름이야 거창하지만, 사실상 오러를 있는 대로 집약시킨 다음 휘두르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스킬이었다.
문제는, 그 집약시킨 오러에 ‘절삭’의 특성이 부여된다는 것이었다.
거기다 누구도 따라 하기 힘든 최상의 오러 운용에 가지고 있는 마력량의 수십 배에 달하는 파괴력을 보여 준다.
콰아아아아!
천지가 진동하는 울림.
결국 용의 어금니는 인한에게 접근했고…….
“으응?”
인한은 조금 긴장한 듯 눈가를 찌푸렸지만.
콰아아아아!
또다시 용의 어금니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치솟더니 폭발해 버렸다.
“으악! 잔여 오러가 떨어진다!”
“다들 위쪽으로 펼쳐! 위쪽!”
“커으윽! 나 내상 입었어!”
용의 어금니의 폭발 이후, 그 막대한 오러의 잔여물이 지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임태호가 허망한 눈으로 인한을 바라보았다.
인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게 되네?”
인한의 원형 구현, 공간 장악.
이건 생각보다 더 많은 효과를 지닌 힘이었다.
-넓은 천을 생각하시게. 이제 그 천은 시공간일세. 만약 여기에 무거운 물체가 떨어지면 어떻겠는가? 천이 아래로 푹 꺼지겠지? 그게 시공간의 일그러짐일세.
리 쉔펑이 소개한, 이제는 해태 길드 소속의 연구원 중 하나인 ‘제임스 리버 교수’의 설명이었다.
-그럼 만약 여기에 아까 전 무거운 물체보다 조금 덜 무거운 물체를 흘려보낸다면? 천에 생긴 굴곡을 따라 가벼운 물체가 더 무거운 물체에 의해 생긴 굴곡을 따라 떨어지겠지? 이게 중력의 원리일세. 큰 질량을 가진 물체는 시공간을 휘게 만들고, 다른 물체가 거기에 딸려 들어가는 거야.
들었던 설명에 착안한 인한은 공간장악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사용해 봤다.
사방 10미터로 작용하는 자신의 힘을 공격의 진행방향에 집중시켜 본 것이다.
그러자, 공간이 뒤틀리며 왜곡이 일어났다.
다른 방법 사용법으로는…….
“아! 진짜 그거 사기 아닙니까!”
겐지가 버럭 외치며 눈가를 찌푸렸다.
“왜?”
“아니, 분명 왼쪽을 쳤는데 왜 오른쪽에서 공격이 날아온단 말입니까? 그게 대체 뭡니까?”
공간 왜곡을 자기 자신에게 사용하는 것이다.
공격의 궤도가 왜곡점을 따라 전혀 다른 방향을 두드리게 된다.
인한은 분명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쳐서 막지도 않았는데, 공간이 뒤틀리며 제대로 직격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대련입니까! 이럴 거면 그냥 혼자 합니다! 캬악!”
그 성격 좋은 겐지도 화가 났는지 툴툴대며 떠나 버렸다.
다음으로 앞에 선 것은 아나스타샤였다.
“일단 공간 왜곡이 일어난다는 걸 알았으면, 전신을 방어하고 있으면 되는 거잖아요?”
서걱!
아나스타샤의 검술은 그야말로 수준급이다.
최상위 검술 스킬 중 하나인 소드 댄스는 아나스타샤의 재능과 맞물리며, 무려 S급 스킬로 진화하는 기염을 토해 낸 것이다.
캉!
인한이 허공에 주먹을 뻗은 순간, 미리 긴장하고 있던 아나스타샤가 가볍게 막아 냈다.
“그 공격, 일단 왜곡된다는 걸 알고 있으면 쉽게 막을 수 있어요. 마나 스킬 4단계만 되면 전신의 감각을 극대화시킬 수 있으니까요.”
아나스타샤가 그렇게 말했다.
물론, 간단히 말하지만 그건 아나스타샤 정도의 검술과 센스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 이건 어떠십니까!”
인한이 정면으로 주먹을 뻗었다.
“흡?”
똑같은 방식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일부러 빗나가게 한 게 아니라 정타를 노린 공격이다.
아나스타샤가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막았지만.
화악!
공격이 꺾이며 다른 방향으로 공격이 이어졌다.
카앙!
하지만 아나스타샤는 이것마저 검으로 막았다.
“쩝, 그래도 막히는군요.”
“확실히 갑자기 다른 곳에서 공격이 이어지니까 놀랐어요. 하지만 노골적이긴 하네요. 그거, 집중이 굉장히 많이 필요한 기술이죠?”
“네, 아시겠나요?”
“펼치기 직전에 뭔가 오는 게 확실히 느껴져요. 거기다 일단 집중이 필요하다 보니 공격이 느리기까지 하고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한은 원형 구현을 레오나 박철환보다 빠르게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상대적일 뿐, 그냥 주먹을 뻗는 것보다는 꽤나 느린 속도로 전개된다.
“흠, 근데 인한. 한 번만 거기 서 줄 수 있어요?”
“네? 왜 그러세요?”
“잠깐만, 잠깐만요. 날아오는 검은 피하거나 맞지 말고 막아 주세요.”
“네?”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검에 오러를 집중하더니 인한을 향해 휘둘렀다.
‘뭐야?’
궤도도, 거기에 담긴 힘도 간단하다.
인한은 가볍게 주먹을 뻗어 검을 쳐 내려고 한 순간!
휘익!
검의 궤도가 급격하게 뒤틀렸다.
아니, 처음부터 검의 궤도는 그대로였다.
아나스타샤가 오러를 교묘하게 사용해 검의 방향을 속인 것이다!
“커흑!”
아나스타샤의 검이 인한의 복부를 강타했다.
물론 상처가 나지는 않았지만, 불의의 일격이었기 때문인지 묵직한 고통이 전신에 번져 갔다.
“앗! 이, 인한! 미안해요! 괜찮아요?”
“괘, 괜찮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건…….”
“아니, 그냥 인한의 검을 보다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해 본 건데…… 이게 되네요?”
인한이 경악했다.
아나스타샤는 지금 마나 스킬 5단계의 초입에 해당하는 기예를 해 낸 것이다.
오러를 이용해 상대의 감각을 속이는 것.
단순 방출과 흡수만 가능한 4단계에선 멀찍이 떨어진 기예다.
“으음, 흐음…….”
아나스타샤가 뭔가 떠올렸는지 생각에 잠겼다.
골똘히 자신만의 세계에 들어가는 아나스타샤.
‘설마 깨달음을 얻었다고?’
인한의 표정이 구겨졌다.
‘제길! 이래서 천재들은!’
인한이 부들부들 떨었다.
저대로라면 짧은 시일 내에 5단계에 도달할 것만 같았다.
물론 동료가 성장하는 건 기쁘지만,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진 것이다.
사실 인한이 몰랐지만, 오러란 근육과 같아서 사용할수록 느는 법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억제하고 있는 그들이 인한을 상대로는 마음껏 펼칠 수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인한도 또한, 아주 뛰어난 깨달음 제조기였던 것이다.
“자! 다음!”
인한이 외치자 이번엔 보무도 당당하게 해태 길드의 랭커들이 달려들었다.
콰앙! 콰앙!
또다시 폭음이 울려 퍼졌다.
한편,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
와작! 와작!
이창훈이 팝콘을 먹으며 인한을 구경하고 있었다.
“캬! 역시 구경은 싸움 구경이지!”
-키엑! 키엑!
“뭐야, 곱린이. 이거 달라고? 싫어, 인마!”
-캬아아악!
“어, 어어! 몬스터가 사람 친다!”
-케케!
이제는 오크 정도로 체구가 커진 곱린이 킥킥 웃으며 팝콘을 뺏어서 와작와작 씹었다.
이제는 뿔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흐릿해진 곱린이는 때때로 무서울 정도의 지능을 보여 줬다.
‘어휴, 씨. 왜 내 새끼들은 다 이러는 거야?’
이창훈이 툴툴댔다.
그렇기 때문에 보지 못했다.
우웅! 우웅!
곱린이의 손 끝에 맺힌 기묘한 마력의 응집체를.
“자, 자! 이제 거기까지만 하고 다시 이동합시다!”
시간이 흐르고, 이정환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말했다.
“49층 외곽에 있는 해안가로 이동! 거기서 50층 공략의 실마리가 있다!”
인한의 말에 공략조 전원의 눈이 반짝 빛났다.
“거기서 나오는 특정 몬스터의 아이템을 입에 넣고 있으면 수중 호흡이 가능해진다. 50층 진행도 이제 가능해질 거란 말이지.”
공략조의 이동이 개시됐다.
인한은 가만히 먼 곳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물론, 숨만 쉴 수 있다고 50층이 극악의 난이도인 건 바뀌지 않은 건 마찬가지야.’
심해의 압력. 그것이 문제다.
거기다 50층의 보스 몬스터는 인한조차 감당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베히모스, 드디어 다시 보는군.’
중층의 악몽을 떠올리며, 인한의 표정이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