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공략자들 212화>
검은 탑 100층.
티끌 하나 없는 순백의 공간.
그곳에 있는 건 정장 차림의 한 사내와 왕좌를 연상케 하는 거대한 의자뿐이었다.
“쓸모없는 놈.”
라스틴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죽고 말았나.”
그가 손을 휙 휘젓자 몇 가지 천문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그 천문들을 확인한 라스틴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고는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손을 까딱이던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원형에 도달했단 말인가. 고작 최하위 위계에서?”
수많은 정보가 떠올라 있는 창을 바라보며, 라스틴이 눈을 번쩍 빛냈다.
“대체 이 세계는 뭐지? 최하위 위계라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줄 알았건만, 왕들이 개입을 해 왔으며, 하질 않나, 고작 몇 년밖에 안 되는 시간에 50층에 가까워지질 않나. 거기다 이 녀석을 죽였다고……?”
딱딱-
의자의 팔걸이 부분을 두드리는 라스틴의 눈빛이 초조함으로 가득 찼다.
콰앙!
그러다 어느 순간, 라스틴이 팔걸이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힘의 파동이 순백의 공간을 흔들며 퍼져 나갔다.
“빌어먹을! 어차피 이곳까지 오지 못할 것은 뻔하거늘, 왜 이렇게 거슬리냔 말이다!”
이를 꽉 문 채 형형한 눈빛을 보내던 라스틴은 이내 허탈한 듯 혀를 차고 등받이에 등을 깊게 기댔다.
“할 수 있는 게 고작 하찮은 존재의 손을 빌리는 것이라니.”
라스틴이 손을 휙 흔들자 한순간, 그의 앞에 살색 고깃덩어리가 나타났다.
꿈틀대며 움직이던 그 고깃덩어리는 곧 사람의 형상으로 모습을 탈바꿈했다.
그건 레오였다.
“대체 날 속박하고 있는 이 천문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내가 잊고 있는 건 대체 무엇이냐…….”
라스틴이 천문을 조작하며 이를 으득 갈았다.
다음 순간, 영혼 없이 초점을 잃은 레오의 눈동자에 빛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네놈이 할 일은 단 하나다. 죽여라. 죽이고 또 죽여라.”
라스틴이 레오의 몸을 툭 밀었다.
레오의 모습이 곧 모습을 감췄다.
* * *
검은 탑 1층 필드.
아직 개척되지 않은 ‘경계’ 인근.
이곳은 헌터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었다.
대부분의 헌터들은 1층 메인 던전을 클리어하고 2층으로 오르지, 1층 필드 구석구석을 탐색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필드의 중앙.
한 나체의 남자가 누워 있었다.
조각처럼 완벽한 비율을 가진 사내였다.
과하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근육을 가진 사내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크르르…….
헌터의 발길이 닿지 않기 때문일까.
1층 외곽은 몬스터의 수가 상당히 많다.
그런 몬스터들이 사내를 노리며 천천히 다가왔다.
사내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서서 몬스터들을 바라보았다.
권태로운 듯 쳐진 눈매가 묘한 퇴폐미를 흘렸다.
-카앙!
고블린이 사내를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려는 순간.
-크를?
고개를 갸웃한 고블린이 몽둥이질을 멈추고 천천히 사내에게 다가왔다.
사내는 눈을 깜빡이며 고블린을 내려다보았다.
고블린뿐이 아니었다.
수많은 몬스터가 인간인 사내를 보고도 아무런 적의를 내비치지 않았다.
우우웅-
낮은 소음이 사내에게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사내, 아니, 레오의 머리에 기묘한 형상이 일렁였다.
그것은 뿔이었다.
열둘, 열셋, 열넷…… 뿔의 개수가 멈추지 않고 증가했다.
그러는 동안, 흑색의 눈동자를 지녔던 레오의 눈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 * *
해태 길드가 데스 파티를 선제공격한 이후.
데스 파티 본대가 입은 타격은 사실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랭커와 길드원들 일부가 죽거나 다쳤지만, 그래도 치명적인 타격이라 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데스 파티의 구조 자체는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운영하던 암시장 12곳, 장물 거래소 3곳, 하위 헌터 팀 9개 등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는 데스 파티의 숨겨진 돈줄이었다.
그 탓에 환산할 수 없을 정도의 상당한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데스 파티는 31층까지의 아인족 마을 18곳을 반강제적으로 개방해야만 했다.
반대로 이번 일로 해태 길드는 커다란 이득을 얻게 됐다.
암시장이나 장물 거래소를 털어서 얻은 이득은 그다지 큰 것이 아니었다.
해태 길드가 얻은 것은 이미지와 지지였다.
순수히 탑을 오르기 위해 존재하는 길드라는 이미지, 그리고 불의에 가만히 있지 않는 정의의 사도라는 이미지.
그에 따른 뭇 헌터들의 지지는 분명한 힘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소득은, 누가 뭐래도 레오의 죽음이라 할 수 있었다.
드러나 있는 칼보다 숨겨져 있는 칼이 무서운 법이다.
그리고 레오는 숨겨져 있는 칼이었다.
언제 어디서, 어느 때에 박철환이 휘두를지 모르는 칼.
다음 전략과 전술을 세울 때 레오의 존재를 감안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큰 진보였다.
오성 병원 중환자실.
교수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어쩌다 또 이렇게 다치셨습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인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일전에 인한이 죽을 위기에 있을 때 자신을 담당했던 교수였다.
교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갈비뼈 골절 8곳, 인대가 늘어난 숫자는 일일이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지요. 한쪽 팔은 아예 잘리셨고, 나머지 팔은 거의 조각이 난 상태. 전신의 근육이 혹사를 당하셨습니다. 대장과 간에서 일어난 출혈은 간신히 멈춘 모양이지만…….”
처음 인한이 뚜벅뚜벅 걸어와 응급실에 수납 신청을 할 때는 소름이 다 돋았다.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인한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살아 있는 게 믿겨지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원래라면 오래 걸리더라도 집에서 그냥 회복했을 텐데…….’
이정환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각 층의 주요 마을에 해태 길드의 사람을 배치해 놓았다.
레오가 도망치거나 박철환이 포착되면, 바로 연락이 이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인한도 24층에서 레오를 놓친 후에 다시 층을 뛰어넘어 따라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레오를 잡은 이후에 탑의 밖으로 나가려던 인한이 길드원에게 들켜 버렸다.
당연히 이정환에게 연락이 갔고, 이정환은 간부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의사로서 이런 질문을 환자에게 하는 게 정말 이상한 건 저도 알지만…… 몸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그다지 좋진 않은데, 금방 나을 수 있을 겁니다.”
인한이 힘겹게 웃으며 대답했다.
거의 전신의 뼈가 부서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극체술의 회복력을 믿자니 내상이 심해서 마력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워디나.’
-우우!
인한은 정령술로 치료하는 방법을 택했다.
현재 인한의 체내에는 워디나의 물방울이 돌아다니며 회복을 돕고 있었다.
“그래도 정말 대단한 회복력이시군요. 아직 입원하신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대부분 회복하셨다니요.”
“제가 익힌 게 회복에 특화된 것이라 그렇습니다.”
“수많은 헌터를 봤지만 인한 헌터님 같은 분은 처음입니다. 자, 그럼 저는 이만 가겠습니다. 제 의사 경력 수십 년째에 환자에게 도움이 안 되기는 처음이네요.”
의사가 자리를 비켰다.
“인한, 몸은 좀 어때요? 괜찮아요?”
곧 아나스타샤가 방에 들어오며 말했다.
그녀의 뒤에서 겐지도 따라 들어왔다.
아나스타샤와 잠깐 인사를 한 인한은 곧 겐지를 보며 웃었다.
“환자는 들어가서 쉬지, 왜 왔어?”
“인한 님에 비해선 크게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고작해야 골절 몇 곳에 내상 조금 있는 정도이지요. 마력으로 회복하고 있으니 일주일이면 전부 회복할 것입니다, 하하!”
호탕하게 웃는 겐지.
일반인 입장에선 그걸 치명상, 혹은 중상이라고 부르는 걸 알려나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5단계네?”
“오, 알아보십니까?”
“당연하지.”
겐지의 오러 흐름을 바라보던 인한이 눈을 빛냈다.
임태호에 이어 겐지도 5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신기술을 연마 중이니, 얼른 회복하고 대련합시다!”
“그래그래, 알았어.”
그때까지 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아나스타샤가 입을 열었다.
“인한.”
“네?”
“아.”
인한의 코앞에 돌연 사과가 들이밀어졌다.
구석에 가서 뭘 하나 했더니 사과를 깎고 있었던 것일까?
“아, 해요.”
아나스타샤가 사과를 쭉 밀어 넣었다.
입을 벌리지 않으면 아예 쑤셔 넣을 기세라서, 인한은 저도 모르게 받아먹었다.
“크흑!”
왜인지 알 수 없으나 옆에서 겐지가 분노와 짜증이 섞인 눈물을 흘렸다.
잠시 잡담이 오가고, 한참 뒤에 아나스타샤가 조심히 입을 열었다.
“인한.”
“네?”
“그 팔…….”
아나스타샤는 말을 잇지 않고 꾹 다물었다.
인한이 팔꿈치 어림에서 뚝 끊겨 있는 자신의 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생되고 있어요. 제대로 보셨습니다.”
“대체 어떻게?”
본래, 인한의 팔은 거의 어깨에 다 닿을 정도로 잘려 있었다.
아니, 애초에 잘린 게 아니라 분해됐기 때문인지 상처 부위가 굉장히 처참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느새 팔꿈치까지 회복된 것이다.
‘레오의 씨앗을 흡수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극체술의 힘인가.’
팔다리가 절단된 후에도 극체술에 의한 회복이 이어질까 궁금했는데, 그 답이 나온 것 같았다.
레오의 씨앗과 상승효과를 내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저 극체술의 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인한의 팔은 서서히 재생되고 있었다.
“그럼 저흰 가겠습니다.”
“갈게요, 인한. 푹 쉬어야 해요.”
인한의 팔이 회복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둘은 병실을 나갔다.
인한은 피식 미소를 짓고는 등받이에 깊게 몸을 기댔다.
그리고 잠시 뒤.
우우웅!
병실 내에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가습기에서 흘러내리던 수증기가 허공으로 치솟고, 물병이 회전하며 하늘을 날아다녔다.
아나스타샤가 잔뜩 깎고 나간 사과들도 허공에 떠올랐다.
“흠.”
원형 구현, 공간 장악이었다.
오러에 의해 강제로 사물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인한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모든 이론을 뛰어넘어 세계의 규칙을 조종한 것이다.
‘의외로 간단한 거였어.’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다.
‘이게 6단계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상당량의 오러가 필요로 하지만, 정작 일어나는 현상은 오러에 의한 변화가 아니다.
오러는 단지 연료일 뿐.
이 변화는 심상을 통해 어딘지 모를 먼 곳에 접속을 하고, 거기에 있던 무언가를 끌어오는 기분이었다.
‘트리아스 액셀에도 6단계라고 적혀 있으니까 맞긴 한 거 같은데…… 대체 마나 스킬과 트리아스 액셀의 궁극적인 단계는 뭐지? 이건…… 마치 신과 같잖아?’
당연하다는 듯이 중력이 뒤틀리고, 관성이 제어된다.
말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냥 할 수 있다.
이건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조금 더 연구해 봐야겠어.’
인한이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마력의 흐름이 뚝 끊기고, 병실 내의 모든 사물들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인한은 1주간의 회복 기간을 가지고 퇴원했다.
“1주일만 더 쉬도록 하죠. 다들 고생했으니까 휴가인 셈 쳐요.”
“……뭐?”
인한의 말에 더 쉬자는 말이 나오자, 공략조 전원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지, 지금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형님 입에서 쉬도록, 고생, 휴가……가 나온 거 맞습니까?”
이창훈이 덜덜 떨며 이정환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정환 형님! 인한 형님이 이상합니다! 머리 검사 하라 그래요! 저 검은 탑 오타쿠우우쿠릅!”
마지막 부분에 도달해서 이창훈의 말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브릅? 크릅? 으르르! 어! 으으!”
혀가 꼬이기라도 한 건지 혓바닥과 입술이 제멋대로 뒤틀리며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푸하! 이, 이게 무슨?”
인한이 원형 구현으로 이창훈의 입술과 혓바닥을 뒤튼 것이다.
아마 이창훈은 영영 모르겠지만.
“헉!”
“방금 뭐라고 했냐? 탑 오타쿠?”
인한의 형형한 눈빛에 이창훈이 흠칫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공략조 전원 인한을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저…… 길드장님, 역시 정밀 검사를 받아 보시는 게…….”
준간부에 속하는 해태 길드의 랭커, 존 윈터의 말이었다.
“그래, 자식아. 병원 잠깐 가 보자.”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변한다던데…….”
“인한 씨! 괜찮아요?”
임태호, 겐지, 이소영까지 차례대로 인한에게 걱정을 표했다.
그에 인한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내가 도대체 어떤 이미지인 거야?’
인한이 울상을 짓자, 이정환이 피식 웃으며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그럼 길드장님 공식 말씀이니까 쉬도록 합시다. 원래 오늘 50층 탐색을 해 보려고 했는데…… 뭐, 괜찮겠죠.”
“오오!”
“…….”
인한이 미간을 팍 찡그리며 길드원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한 번 가로젓고는 떠들썩한 길드원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심상을 깨달으며, 알게 됐다.
인한은 분명 겁쟁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다치는 것보다, 동료들이 다치는 게 더 무섭다.
이 광경, 이 공간.
이걸 지키기 위한 힘이 바로 인한의 원형 구현이다.
꽈악!
인한의 눈이 굳은 의지로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