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6
<공략자들 206화>
-검은 탑이라는 이름의 재앙을 끝낸다.
해태 길드의 모토는 어디까지나 검은 탑 100층 클리어에 있었다.
길드장인 인한이 천명한 내용이기도 했으며, 길드의 세 가지 규율과 더불어 모든 길드원들이 숙지하고, 추구해야 하는 절대 가치였다.
“그냥 상황이 잠잠해질 때까지 쉬어야 했을까요.”
경상에 불과했지만, 유찬웅은 다친 팀원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해태 길드는 검은 탑 종식이라는 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조직의 영달이나 이익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업체의 성격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길드의 모토를 뚜렷한 목표로 가지고 움직이는 공략조와 다르게, 하위 팀들에게 검은 탑은 생계의 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냥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자책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혹시 죽은 척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둘러본 겐지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전투는 빠르게 종결됐다.
승리는 당연히 해태 길드였다.
2팀에는 부상자가 몇 명 있었지만, 겐지의 활약 덕에 죽은 사람은 없었다.
그에 비해 습격해 온 상대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대부분이 죽었지만, 킬러라면 현상금이 걸린 사람이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많은 수의 헌터들을 생포한 상태였다.
물론 도망치지 않게 마력계를 끊어 놓고, 팔다리를 자르거나 분질러 두었다.
“이런 위험한 일이 생기니까 후회가 되는군요. 솔직히 말해 다들 탑에 오지 않더라도 한 달 정도는 생활을 유지할 정도는 되는데…….”
“쯧쯔! 이 사람이 또 괜한 소리 하고 있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자 안전지대에 숨어 있던 리 쉔펑이 걸어 나오며 혀를 찼다.
“교수님께도 죄송…….”
“에헤이, 그렇게 따지면 억지 부려서 자네들 끌고 온 나는 뭐가 되는데? 호위를 받고 있는 우리들이 괜찮다는데 왜 자꾸 자책질이여?”
“그래, 오빠. 중상자도 있지만 후유증이 남을 정도는 아니잖아. 얼른 나가서 병원에 가면 돼. 이 정도는 몬스터 상대로도 자주 있는 일이잖아.”
그때쯤, 겐지는 조용히 몸을 돌려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옆에 찰싹 붙어 있던 세릴이 귀신처럼 따라붙었다.
“어디?”
앞뒤를 잘라먹은 말이었지만, 겐지는 알아들었다.
“아직 적의 수장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직 인벤토리에 검을 넣지 않은 것은 그것 때문이었다.
그러나 단숨에 이동하려던 겐지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괴수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 어두컴컴하기 짝이 없는 통로 너머.
그곳에서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자신의 모든 기세를 한껏 드러낸 무언가가 천천히 접근하고 있었다.
‘레오 뒤보아.’
겐지가 눈을 빛냈다.
그러고는 땅바닥에 널브러진 킬러들의 시체와 포로로 잡힌 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자들은 그냥 우리의 힘을 빼놓기 위함이었구려.’
겐지가 숨을 훅 내쉬고 다시 통로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겐지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어? 이, 이거 왜 이래? 어어?”
그때, 1층 사무실에 보고를 하려던 유찬웅이 당황해하며 드루이드의 인형을 퍽퍽 두드렸다.
“인형이 작동하지 않습니까?”
“예? 네, 그렇습니다. 갑자기 먹통이…… 아니, 설마?”
필드로 나가는 팀들에게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레오나 데스 파티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려 줬었다.
그렇기에 이들 역시 무슨 상황인지 겐지의 반응을 보고는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레오가 온 거라면 대체 왜 웃으신 겁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정말 정환 님은 머리가 좋은 것 같습니다. 하하!”
* * *
며칠 전.
인한과 창훈이 만난 뒤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이정환이 모두를 불러 모았다.
“박철환이 뭔가 액션을 취할 거야.”
“아, 이 형님 또 불길한 말씀 하시네. 진짜 이 형님 말씀은 쉽게 웃어넘길 수가 없는데…….”
이창훈이 울상을 지었다.
인한이 물었다.
“어째서 액션을 취할 거라는 거야?”
“지금이 타이밍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인족의 일도 어느 정도 일단락 났고, 아군이 될 조직도 몇 개나 끌어들였지. 무엇보다 현재 공략된 최상층인 49층에 도달했어. 만약 여기서 길드가 타격을 입어 공략이 늦어진다면, 데스 파티는 금세 우리를 추월할 수 있게 돼.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가지고 있던 세계 최고의 타이틀을 빼앗아 가는 것도 가능할 게 분명해.”
“그럼 지금 필드에 나간 길드원들을 다 불러 모아야겠군.”
그러자 가만히 듣고 있던 이소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오히려 타격을 입는 건 우리겠죠.”
“네, 소영 씨 말이 맞습니다. 길드 운영을 위해서라도 필드에 2팀과 3팀이 나가 있는 건 필수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자급자족으로 물량을 조달했으니까요. 물론 그 팀들 저마다의 생계 유지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이런 일에 하나하나 멈춰 서면 우리는 얕보이게 될 겁니다.”
“아니, 하지만 누가 뭐래도 사람 목숨이 제일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요즘 저희들이 붙어 다니고 있다고 해도, 팀을 필드에 내보내는 건 위험할 것 같은데…….”
이창훈의 물음에 이정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그래서 몇 가지 알아봤어. 그런데 데스 파티 내에서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어. 그들은 현재 체제를 정비하고 아인족 마을을 통제하느라 바쁜 모양이더군.”
“그럼 안전하다는 거예요?”
이정환이 고개를 저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인한이 입을 열었다.
“레오. 레오가 움직이겠군.”
“정답. 물론 박철환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겠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데스 파티가 무언가를 해 올 것이란 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럼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그 괴물을 우리가 어떻게 막아요!”
레오에게 안 좋은 기억이 있는 이창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정환이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빅찰환이 무언가 수를 취하거나, 레오가 움직였을 때를 가정한 일이야.”
미리 언질을 받은 것일까.
간부들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을 때, 인한만이 덤덤한 표정이었다.
이정환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우리가 데스 파티를 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린 탑에 없어야 해. 박철환의 눈을 가리는 거다. 언제나처럼 그냥 가만히 당하는 척을 하는 거야.”
* * *
검은 탑 1층의 해태 길드 사무실.
해태 길드의 랭커 중 하나이자 공략조의 원거리 공격형 1팀의 팀장인 레이먼드가 입을 열었다.
이정환이 말했다.
“시작하죠. 각 조장들 응답바랍니다.”
-예!
-예!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이정환의 앞에 쭉 늘어놓은 드루이드의 인형으로부터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데스 파티의 팔다리를 자를 겁니다. 시작의 마을부터.”
병력을 나누는 건, 분명 많은 곳을 통제하는 데에는 좋은 방식이다.
아인족 일을 터뜨린 박철환에게 있어 데스 파티의 인원을 나눈 것은 어쩌면 필수 불가결적인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인원이 나뉘었다는 말은 즉, 각개 격파를 당할 수도 있다는 말.
“이제부터 반격입니다.”
이정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1층 시작의 마을.
마을의 안쪽은 치안도 좋고 화려한 편이지만, 외곽은 상당히 어둑어둑하고 치안도 나쁜 편이다.
마을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스레 생긴 현상이었다.
그런 시작의 마을 외곽.
아는 사람만 아는 지하의 암시장.
콰아아아앙!
한 줄기 폭음이 몰아치며 건물이 반파됐다.
“크하하! 다 쓸어 담아라! 여기 있는 게 다 그놈들 돈줄이다!”
누가 봐도 악당으로밖에 볼 수 없는 대사를 외치며, 임태호가 대검을 치켜들었다.
1층 땅의 마을.
시작의 마을과 마찬가지의 암시장.
“진입하죠. 저쪽 집과 저쪽 집입니다. 다들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세요.”
이정환의 말에 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14층 북쪽 필드.
아인족 중 하나인 호족(虎族)의 마을.
“자, 그럼 우리도 시작해 볼까요?”
이소영이 공략조 인원들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검은 탑 18층, 19층, 27층, 28층…….
데스 파티의 병력, 그리고 사실상 하위 조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조직들의 주위에 해태 길드의 공략조가 모여 있었다.
반격의 서막이었다.
* * *
심층부에 다다랐을 때쯤, 해태 길드의 3팀은 결국 시간을 끄는 일을 멈췄다.
몬스터 사냥의 난이도가 현격히 높아졌기 때문에 더 이상 이동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야.”
“별로 반갑지는 않습니다만.”
겐지는 레오와 마주선 채 검을 꽉 움켜쥐었다.
“그건 그렇고 이제 도망치는 건 끝인가? 네 성격이라면 다짜고짜 달려들 줄 알았는데?”
겐지가 숨을 거칠게 내쉬고는 가슴을 쭈욱 폈다.
“도망이라니! 무사는 결코 도망치지 않는다!”
“그럼 지금 도망쳤던 건?”
“이건 전략적 후퇴였을 뿐!”
레오가 피식 웃었다.
“뭐가 어찌 됐든.”
우웅!
좁은 공간.
레오의 수십 자루의 검이 겐지를 노렸다.
“날 재밌게 해 줬으면 좋겠어. 너는 꽤 쓸 만한 놈이었으니까 그동안 얼마나 강해졌나 한 번 보자고?”
콰가가가가!
검 한 자루, 한 자루가 미사일 폭격을 연상시키는 위력을 품고 있다.
“오러 익시드!”
특유의 오러 증폭법.
한순간 전신의 힘이 증폭된 겐지가 검을 치켜들었다.
“하늘 떨구기!”
겐지가 만들어 낸 오리지널 스킬.
그 이름 그대로, 마치 하늘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오호! 위력이 대단한데?”
“타아아앗!”
겐지가 몰아치는 검들을 하나하나 일일이 쳐 내며 전진했다.
그러나, 레오는 강했다.
위이이잉!
레오의 검격은 변칙적이고, 예측하기 힘들었다.
서걱!
어느새 몸의 곳곳에 검상이 생긴 겐지가 눈을 빛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레오의 경지는 무려 6단계라 한다.
아직 4단계에 불과한 겐지와는 무려 2단계나 차이가 나는 셈.
콰앙! 콰앙!
이어지는 공격에 겐지의 몸이 쭉쭉 밀렸다.
겐지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큭! 시간을 조금 더 벌어야 하는데!’
경지의 차이다.
4단계이기에 그저 방출할 뿐인 겐지의 오러와 달리, 6단계인 레오의 오러는 뚜렷한 목적을 띠고 있다.
‘대체, 왜 나는 5단계가 오지 않는 건가!’
차라리 그랬다면, 이 정도로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한에게 물어봤을 때, 인한은 이렇게 대답했다.
-자신의 마력로를 통해 오러에 의지를 불어 넣어서…….
지극히 이론적인 설명.
그렇기에 겐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냥 빡! 하니까 뻑! 하고 되던데?
임태호의 설명은 더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얕보는군? 딴생각을 해?”
레오의 검이, 코앞까지 들이밀어졌다.
‘아차!’
겐지가 헛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질끈 감았다.
* * *
특정 사람이 탑에 들어왔는지, 안 들어왔는지를 아는 방법은 간단하다.
각 마을의 땅의 돌 앞에 사람을 세워 두면 된다.
유명 헌터일 경우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기 때문에 금세 알아챌 수 있다.
만약 탑 밖에서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미행을 붙여도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건 미행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미행을 눈치채지 못했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하물며 오러를 익힌 헌터에게 자신의 모습을 숨기는 일은 간단하기 그지없는 작업이다.
검은 탑 30층.
인한은 땅의 돌 앞에 있었다.
‘역시 정환이야. 돗자리 펴야 한다니까.’
이정환의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인한은 2팀에서도 가깝고, 3팀에서도 가까운 30층에서 대기를 하고 있었다.
1층에서 24층으로 이동하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30층에서 24층은 아니다.
인한은 순식간에 24층에 도착했다.
손에 들고 있던 드루이드의 인형이 진동했다.
-늦지 않을 수 있겠어? 위치 정보가 애매하잖아.
이정환이다.
1층에서 ‘모종의 일’을 지휘하고 있는 그가 물어 왔다.
“괜찮아. 금방 찾을 수 있어.”
1층 사무실에서 유찬웅이 말한 정보는 막연하게 땅의 돌에서 북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이동한 부근에 있는 암석 지대라는 것뿐이었다.
도저히 정확한 위치라고 말하기 힘든 설명이다.
원래는 지원이 도착하면 그 뒤에 추가 설명을 하려는 모양이었는데, 레오가 등장한 탓에 연락이 이어지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추격의 저주가 있지.’
투웅!
너무 빠르게 이동한 탓에 인한의 옆으로 풍경이 선이 되어 스쳐 갔다.
땅을 한 번 박찰 때마다 대량의 토사가 튀어 오르고, 마력의 여파로 커다란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미안하다. 네게 이런 위험한 일을 시켜서. 이번 일에선 네가 제일 중요해.
“나는 그만 신경 쓰고. 네가 하는 거나 성공하길 빈다.”
-그건 안심해도 돼. 아나 씨와 창훈이를 보냈으니까. 레오를 잡거나 죽이지 못해도 상관없으니까 모두 다치지 말고 살아서만 돌아와라.
“알았다. 걱정 마.”
인한이 숨을 훅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