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공략자들 204화>
“이야, 자식. 오랜만이다.”
“그래, 주호야.”
이창훈과 헤어진 후, 인한은 퇴근한 고등학교 동창 이주호와 만났다.
동창회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지만, 그 뒤로도 인한은 빠짐없이 동창회에 나갔었다.
덕분에 여전히 친구들 몇몇과는 연락이 이어졌다.
“그런데 토요일에 무슨 야근이야?”
“오늘 7시에 해외로 꽤 큰 물량이 뜨는데, 이게 어제 밤에 문제가 터져서…… 어휴, 꼴통 부장 새끼. 덕분에 사우나에서 출근했다.”
“밤샜어?”
“뭐, 그런 거지. 야, 얼마 전에 대리까지 달았는데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크크!”
이주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피식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네가 보자고 하고?”
“그냥 오랜만에 얼굴이나 볼까 해서.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형 돈 잘 번다.”
“올, 잘나가는 헌터다 이거지? 내가 오늘 네 통장에 0을 하나 없애 주마.”
인한이 피식 웃었다.
“그러려면 네가 먹으려는 음식점 건물을 사야 할 거다. 아니, 그 블록을 다 사야 하나……?”
“뭐……? 이, 이 자식!”
결국 음식점은 근처에 있는 한우 전문점으로 정해졌다.
“오호! 한우다, 한우!”
이주호의 호들갑에 인한이 피식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술잔이 오고 가고, 자글자글 고기가 익어 갔다.
오랜만에 만난 이주호였지만, 어색하기는커녕 오히려 긴장이 풀어지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아득할 정도로 오래된 과거의 얘기와 별것 없는 농담을 주고받았다.
고기는 달았고, 술은 썼다.
뿌연 연기가 고깃집 안에 가득했다.
“크크! 내가 그랬었나?”
“그래! 짜샤! 지금이야 구원자니 뭐니 해도, 너 고등학교 때 담탱이한테 얼마나 까였냐!”
인한이 웃음을 터뜨렸다.
스스럼없는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길드의 동료들은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사이지만, 이런 대화를 나누고 이런 자신을 보여 줄 수는 있는 건 오랜 친구인 이주호뿐이었다.
우웅!
그러던 순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이주호의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으응? 어이구! 우리 마나님 아니신가!”
불콰하게 취한 이주호가 씨익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우리…… 컥!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니, 내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서…… 아앗! 아, 알았다니까, 그래! 으응, 어, 응. 잘 출발했어. 그럼! 내일 휴일인데! 응, 으응! 아, 민주니? 잠 안 자고 뭐 했어!”
전화를 받자마자 당황해하는 이주호를 보며 인한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인한과 이주호도 어언 30대로 접어들었다.
결혼을 조금 빨리 한 이주호는 갓 돌을 지난 딸이 있었다.
“좋아 보인다.”
“크흠, 좋기는 무슨. 결혼은 인생의 지옥이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주호의 표정은 미소가 가득했다.
“내가 솔직히 상사랑 후임 다 좆같은데, 가족 생각하면서 꾸역꾸역 한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니야! 뭐…… 헌터인 너만 하겠냐만은.”
“나야 그냥 싸우고 깨지고 하는 게 전부인데 뭐.”
“말이야 쉽지.”
유릿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럴 때면 인한은 자신의 육체가 싫어졌다.
취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런 자리에서조차 아무리 마셔도 제정신이어야 하니 말이다.
“커흑!”
기분 좋은 탓인지 과하게 술을 마신다 싶던 이주호가 기어코 테이블에 이마를 박고 쓰러졌다.
인한은 피식 웃고 계산을 마쳤다.
“이야아! 내 친구가 끅! 최인한이야, 이것들아!‘
술주정을 부리는 이주호를 지탱하며 인한은 천천히 술집을 나섰다.
수많은 사람들의 흔적이 밤거리를 가득 채웠다.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이 반짝이며 어둠을 밀어냈다.
‘아아.’
살짝 열린 인한의 입에서 나지막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참으로, 삭막한 삶이었다.
취미도, 흥미도, 그렇다고 별다른 욕구도 없었다.
하는 일이라고 해 봤자 탑을 오르고, 공략을 생각하고, 수련에 매진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쉬거나 놀고 싶어도,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들어 본 바로는 창훈은 돈을 쓰는 걸, 이정환은 독서를, 이소영은 영화나 연극을, 아나스타샤는 요리를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럼 나는?’
없었다.
아무것도.
오늘도, 쉬기 위해, 혹은 놀기 위해 필사적이었을 뿐이었다.
‘난 역시 나 자신을 모르는구나.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 지조차 제대로 몰라.’
유난히 바람이 차게 느껴지는 밤거리였다.
인한은 오래된 친구를 등에 업은 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게 쉽게 이랬다저랬다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음 날, 인한은 스마트폰으로 온 문자를 보고 헛숨을 들이마셨다.
‘3억……?’
하루 쇼핑하고 3억에 가까운 돈을 써 버렸다.
그 정도로는 통장 잔고의 앞자리, 아니, 앞의 앞자리도 변하지 않지만 왠지 모르게 움찔하게 됐다.
‘아니지. 영약 만들 때는 이것보다 몇 배는 더 썼잖아.’
인한은 고개를 휘휘 젓고 몸을 일으켰다.
순간, 자연스레 탑으로 향할 생각을 했던 인한이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돈 쓰는 것도 의외로 재밌긴 하네.’
그러고 보면 이주호와 같이 먹은 한우도 상당히 맛있었다.
인한은 지갑이 들어가 있는 카드를 던졌다 받았다를 반복하며 씨익 웃었다.
* * *
해태 길드의 3팀은 24층을 탐색 중이었다.
리 쉔펑은 직접 대마를 돌돌 말아 입에 물며 연기를 길게 뿜어 댔다.
“그거 마약 아니에요?”
달의 검 팀의 부팀장, 이제는 해태 길드 3팀의 부팀장인 유하영이 리 쉔펑이 옆에 서며 눈가를 찌푸렸다.
“대마가 마약? 뭐,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이게 담배보다 건강할걸?”
“네?”
“아가씨와 이런 쓰잘데기 없는 걸로 논쟁해 봤자 끝도 없으니까 그만하자고. 하여튼 난 가끔 이걸 태워 줘야 머리가 돌아가서 말이야.”
리 쉔펑이 씨익 웃으며 연기를 들이마셨다.
“그건 그렇고, 뭘 알아보시려고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나야 모르지. 저 괴짜한테 물어봐.”
리 쉔펑이 힐끗 가리킨 곳에 돌더미를 이리저리 살펴보며 눈을 빛내는 중년인이 있었다.
“분명…….”
“인류학자인데, 24층에서 뭘 발견한 모양이더라고.”
유하영이 눈을 껌뻑였다.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바라보며, 리 쉔펑이 문득 물어봤다.
“그런데 아가씨, 공략조들 멈춘 모양이던데, 이대로 괜찮은 거 맞아?”
“괜찮을 거예요.”
“으음? 묘하게 확신이 가득 차 있군?”
“길드장님을 신뢰하는 거죠.”
“그러다 몬스터 웨이브라도 발생하면…….”
“그거야말로 없을 거예요. 전 10층 공략팀에 속해 있었거든요.”
“아, 3차 몬스터 웨이브?”
“네, 맞아요.”
리 쉔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일은 세계적으로도 꽤나 유명하게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였다.
수많은 날고 긴다는 헌터들이 고전하고 있던 몬스터를 단숨에 처리한 인류의 영웅의 이야기 말이다.
“그분, 천문이 뜨고 나서 클리어하셨어요. 분명 이번에도 뭔가 이유가 있어서 멈춘 게 분명해요.”
“슬슬 이동하겠습니다! 다들 모여 주십시오!”
휴식을 취하고 있던 3팀의 중앙에서 겐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옆에 있는 세릴은 땅바닥에 앉은 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래도 안전하라고 랭커까지 붙여 주고 말이야. 이 길드, 갈수록 마음에 든다니까, 흐흐!”
데스 파티가 해태 길드를 적대하는 것으로 결정 난 뒤로, 해태 길드에서는 필드를 돌아다닐 땐 무조건 간부가 둘, 랭커가 둘 이상 같이 움직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히든 던전 찾아가는 건 언제 할 생각인가?”
“아, 안 그래도 오늘 이동할 예정이었어요. 저분 말에 다르면 곧 조사가 끝난다고 하셔서요.”
여전히 정체 모를 돌덩이를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는 중년 사내를 바라보며, 유하영이 웃었다.
“운도 참 좋구만. 보스전 보상으로 히든 던전의 힌트가 나오다니.”
사실 3팀은 며칠 전, 23층 보스전을 치렀을 때 낡은 지도 하나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지도인 줄 모르고 버리려고 했지만, 교수들이 이것저것 훑어본 후에 그것이 숨겨져 있는 ‘어떤 장소’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드물지만 이런 경우도 있다고 하고…… 일단 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괜찮겠나? 히든 던전은 상당히 위험한 것 아니었나?”
“잘 모르겠습니다.”
“응?”
의외로 자신감 없는 목소리에 리 쉔펑이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다는 게 무슨 소린가?”
“그냥…… 감이에요. 물론 단순히 24층 히든 던전이라면 별로 무섭지 않아요. 저희는 27층까지 공략한 경험이 있으니까요. 거기다 이번에는 간부님들도 두 명이나 붙어 있고.”
니시야마 겐지와 세릴.
상위 층의 던전이야 무리겠지만, 그들이라면 어지간한 던전은 혼자서 클리어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지만, 그냥 언제나처럼 걱정되서 그런 거겠죠.”
유하영은 긴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런 쪽에 감이 좋았다.
하지만 말 그대로 어디까지나 감에 불과했다.
정확하지도 않은 것으로 혼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뭐, 무슨 일 생기면 나 잘 부탁하네. 난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고 싶으니까, 끌끌!”
리 쉔펑의 웃음에 유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세요. 무슨 일은 없을 테니까요.”
3팀은 곧 넓은 암석 지대에 도착했다.
곳곳에 돌더미가 가득한 공간이었다.
“한참 숲이었는데 갑자기 이런 곳이 나오는 게 신기하네. 무슨 돌덩이들이 이렇게 많아?”
3팀의 팀원이 중얼거렸다.
교수진 중 한 명이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자연적인 지대가 아닐세. 이건 아무래도 건축물의 잔해인 것 같은데?”
한 초로의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가더니 돌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건 주축돌이군! 이건 땅을 평평하게 하는 용도고, 호오, 설마 이건 키스톤(Keystone)인가? 형태가 많이 다르긴 하지만 고대 서양의 건축과 비슷한 양식인걸?”
흥미로운 걸 발견했다는 듯 사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리 쉔펑이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히든 던전, 정말 있긴 있었나 보군?”
히든 던전의 가치는 천문학적이다.
누구나 갈 수 있는 메인 던전이나, 몬스터가 넓게 분포되어 있는 필드와는 달리, 히든 던전의 몬스터는 한정된 공간에 집약되어 있다.
굳이 몬스터를 찾으러 돌아다니거나, 선행하고 있는 헌터 팀의 눈치를 볼 것 없이 마구잡이로 사냥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뿐 아니라 히든 던전에서는 희귀 아이템을 얻을 수 있고, 지구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희귀 자원이 발견될 때도 있다.
[히든 던전 ‘이종족의 보급 창고’의 입장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혹시 모를 일을 위해 최초 발견자 보상은 겐지가 얻기로 했다.
“흐음, 지하에 있나.”
히든 던전은 무너진 두 기둥 형태의 암석 아래에 있었다.
겐지가 기둥을 베어 내자, 그 밑으로 지하로 통하는 통로가 나타났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세릴 님.”
“몰라.”
세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어본 사람이 기분 나쁠 정도의 단답이었지만 겐지는 익숙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일단 공기의 질도 체크해 봐야 하고, 함정이 있을 수 있으니까 제가 먼저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던전 중에는 너무 오랜 시간 내부의 공기가 묵혀져 있어 독성을 발하는 경우가 있다.
그도 아니면 침입자를 물리치기 위한 함정이 설치된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먼저 들어가 살펴보던 겐지는 딱히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흠, 그냥 흔하디흔한 던전이구려.’
대략 100미터 정도 진행했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통로도 20명 정도는 일렬로 늘어서 걸을 수 있을 만큼 넓었고, 마력으로 훑어보아도 특별한 함정이나 위험한 장치는 없는 것 같았다.
‘형태는 미로형인가? 이건 애먹겠는데.’
던전 중 가장 난해한 것이 바로 미로형이었다.
이 점을 주의시켜야겠다고 생각한 겐지는 들어온 김에 몬스터도 몇 마리 잡아 보았다.
지금껏 본 적 없는 특이한 외견의 몬스터였지만, 그다지 강하지는 않았다.
“일단 별 문제는 없구려. 그럼 진행하는 걸로 할까.”
겐지는 몸을 돌려 입구로 돌아갔다.
3팀은 곧 정비를 끝내고 던전에 입장했다.
잠시 후, 그들이 모습을 감춘 곳에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크흐흐, 저놈들을 잡으면 이 히든 던전을 공짜로 준다, 이거지?”
“아무리 하위 팀이더라도 명색에 해태 길든데 괜찮겠습니까?”
“해태 길드가 대수냐! 어차피 데스 파티에게 추월당했어! 우리는 데스 파티의 줄을 잡으면 될 뿐!”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검을 치켜세웠다.
“이번 일 끝나면 전원 두둑하게 챙겨 주마! 흐하하!”
그들은 3팀이 들어간 곳의 뒤를 밟으며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