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공략자들 203화>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주인이여.
실리암이었다.
과묵한 편이라 평소 말을 잘 걸어오지 않는 정령인 실리암에게서 걱정된다는 느낌의 의식이 전해져 왔다.
-그동안의 주인과 다르오. 지금 주인은 다급해하고 있소.
‘그래서 지금 나는 원형 구현을 위해…….’
-주인의 감정과 의식은 나와 연결되어 있소. 눈을 돌리지 마시오. 그건 자기합리화가 아닌가. 주인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소. 엘릭서가 없는 상태에서 다시 한번 원형 구현을 맞을 경우를.
‘……!’
-그 정령의 말이 옳아. 넬레바나의 일, 그리고 사무실이 습격당한 일. 내가 알고 있는 본래의 그대라면 회복한 후 곧장 레오를 찾아 나서야 했다. 그러기 위해 추격의 저주를 건 것이 아니었나? 박철환도 마찬가지지. 내게 박철환을 찾기 위한 방법을 만들어 내게 한 걸 잘 기억해 봐라.
인한의 입이 서서히 벌려졌다.
그런 인한에게 위그라노아의 말이 이어졌다.
-물론 레오에게 윈형 구현이 있다. 너는 신중한 사람이야. 당연히 냉정하게 원형 구현을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수련을 하는 것이지.
위그라노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 말을 이었다.
-두려움은 괜찮다. 두려움을 느끼기에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니까. 너는 지금껏 몇 번이나 성장해 왔다. 그러나 그때의 너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목표만을 바라보며 정진했다. 순수할 정도의 노력과 집념으로 강해져 왔지.
마치 말을 이어받듯 실리암의 의식이 전해져 왔다.
-하지만, 주인은 지금 조급해하지. 이 상태로라면 아무리 수련을 한다 하더라도 얻는 것은 없을 것이오. 오히려 잃게 되겠지.
박철환의 심계는 점점 더 진행되고 있으며.
레오는 여전히 활개를 치고 있다.
그러나 인한은 정체되어 있다.
그 사실이 인한을 점점 더 재촉했던 것이다.
-그 상태로 원형 구현의 수련에 임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다. 차라리 지금은 머리를 식히는 편이 좋겠군.
위그라노아의 말에 인한은 대꾸하지 못했다.
“어이! 얼른 가셔요! 뒷사람 기다리잖아!”
그때, 땅의 돌을 사용하기 위해 인한의 뒤에 줄을 섰던 사람이 외쳤다.
인한은 땅의 돌에 손을 떼고 옆으로 벗어났다.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인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인한은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위그라노아의 강권에 못 이겨 내린 결정이었다.
‘제기랄…….’
집에서 깨어났을 때, 10시에 맞춰 놨던 알람이 울리지도 않았는데 새벽 6시에 눈이 떠지고 말았다.
‘정말 조급해하고 있었구나.’
인식하고 나니 그제야 자기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 인한이었다.
잠을 잔 것도 의식적으로 육체를 조정해 수면에 들었을 뿐이지, 진정한 의미의 숙면은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자면서도 박철환과 레오, 그리고 원형 구현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항상 밤잠을 뒤척이게 됐다.
‘나도 참 어지간하군.’
창문 밖은 어스름한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인한은 침대를 박차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방 안에서 한참을 다시 서성거렸다.
‘내면을 깨닫는다라…… 뭐가 잘못된 거지? 대체 왜 깨달음이 오지를 않는 걸까? 원형 구현을 이루지 않고는 엘릭서를 흡수할 수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난 이미 내 심상을 깨달았다는 게 아닐까? 그러면…… 아!’
찰나의 생각이 인한을 수렁으로 빠뜨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인한이 탄성과 함께 이를 깍 물었다.
시계를 확인해 보니 아주 잠깐 생각했을 뿐인데, 거의 30분이 넘어 있었다.
인한은 한숨을 내쉬며 샤워실로 향했다.
쏴아아!
샤워기를 튼 채 인한은 멍하니 화장실 타일 문양을 바라보았다.
따뜻한 물이 육체를 타고 흘러내렸다.
“쯧.”
휴식을 취하고 있음에도 가슴이 답답했다.
머릿속에는 벌 한 마리가 들어가서 왕왕 날개 소리를 울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물만 대충 닦고 나온 인한은 샤워실 앞에 각 맞춰 개어져 있는 가운을 발견했다.
‘뭐야, 이거?’
인한은 산 기억이 없는 물건이었다.
거기다 한두 개가 아니라 탈의실에 있는 수납장 한 칸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뭐…… 창훈이겠지.’
스페어 키를 갖고 있는 건 이창훈뿐이니 굳이 고민해 볼 필요도 없었다.
또 별로 대단치 않은 이유로 사다 둔 게 분명했다.
가운을 걸친 인한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째깍, 째각, 집이 너무 살풍경하다며 임태호가 가져온 시계가 소리를 냈다.
금색 바탕에 붉은색 수실로 장식되어 있는 시계였다.
십장생이 조각되어 있는…… 아무리 봐도 이상한 취향의 비주얼이었다.
‘하아…….’
잠시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가로젓던 인한은 이내 눈을 지그시 감고 긴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박철환과 레오에 대한 생각이 들락날락하고, 원형 구현에 대한 고민이 뒤섞였다.
어느 순간, 이제는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참 나.’
허탈하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원래 알고 있었지만, 다시금 인지했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다.
영화나 드라마 속 멋있는 주인공들처럼 앞만 보고 나아가고, 과거를 손쉽게 극복하고, 앞을 가로막는 걸 간단히 뛰어넘는 영웅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실수도 하고, 고민도 하고, 좌절도 하는 데다 가끔은 혼자 우울함에 빠져 이렇게 한숨만 내쉬기도 한다.
그렇게 생각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실성한 사람처럼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던 인한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이왕 쉬는 거. 제대로 한 번 쉬어 보자.’
인한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형님!”
인한의 연락에 부리나케 찾아왔던 이창훈이 인한의 팔을 와락 움켜쥐었다.
“괜찮으십니까? 병원!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시발! 이 돌팔이 새끼들! 머리 검사도 안 한 거 아니야?”
“이 새끼가.”
“윽!”
인한이 주먹을 휘둘러 이창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창훈이 자신의 머리를 문지르며 버럭 소리쳤다.
“아 왜 때려요!”
“넌 내가 휴일에 불러내는 게 그렇게 이상하냐?”
“당연한 거 아닙니까?”
빠각!
이창훈의 머리에서 호두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컥! 형님, 진짜! 제발! 좀!”
“아무 일도 없어. 그냥 쉬려고 했는데 부를 사람도 없고. 그래서 연락한 거다.”
“아, 하긴 형님 친구 없죠.”
퍼억!
깔끔한 일격이 보디에 작렬했다.
간까지 충격이 닿는 왼쪽 갈비뼈에 들어갔다.
이창훈이 컥컥대며 땅바닥에 쓰러졌다.
‘패, 팩트 들었다고 폭력을…….’
하지만 아무리 간 큰 이창훈이라지만 거기까지 입 밖으로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고등학생 동창이랑은 나중에 보기로 했다. 그 전까지 할 거 없으니까 부른 거야.”
“아, 예, 그러시겠죠.”
이창훈은 믿지 않았다.
인한에게 친구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크흠, 그건 그렇고 솔직히 거의 탑에서 사는 형님이 갑자기 휴일에 부르면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창훈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직도 머리와 배가 욱신거렸지만, 일어서는 데 지장은 없었다.
“아, 맞어, 근데 왜 저만 부르셨습니까? 다른 사람들은요?”
“정환이랑 태호 형님은 데스 파티 관련해서 일이 있고, 아나와 겐지는 탑에 오르고 있을 거다.”
“엥? 소영 누님은요?”
“하필 오늘 오성 그룹 이사 회의가 있는 모양이더라고.”
이창훈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두 누님들. 애도를 표합니다.’
아마 나중에 인한이 할 거 없다고 이창훈을 불렀다는 사실을 듣는다면, 이소영과 아나스타샤는 땅을 치고 후회할 게 분명했다.
“응? 잠깐, 형님? 저도 바쁜데요? 오늘 약속 있었는데 저도…….”
“그래서?”
“…….”
인한은 뚜벅뚜벅 돌아가 이창훈의 차에 탔다.
무거워 보이는 인상에 비해 차는 부드럽게 미끌어지듯 지면 위로 달렸다.
허공에 뜬 채 달리고 있는 기분이었다.
해태 길드에서 가장 소비를 많이 하는 사람을 꼽자면 명품에 관심 많은 이소영 다음으로 자동차 덕후인 이창훈이 있었다.
지금 타고 있는 것도 풀옵션에 맞춘 롤스로이스 팬텀이었다.
이창훈은 이것 외에도 흔히 슈퍼카라 말하는 외제차를 몇 대나 가지고 있었다.
“이건 얼마 정도 하냐?”
“뭐요?”
“이 차.”
“이거요? 이거 신형이에요. 옵션도 다 맞췄고. 출고가가 대충 한…….”
차 얘기가 나오자 이창훈은 멈추지 않고 떠들어 댔다.
시끄럽다며 제지하려던 인한은, 생각을 바꿔 입을 다물고 창 밖에 시선을 던졌다.
한참을 떠들던 이창훈이 말을 멈추고 이창훈을 바라보았다.
“형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니, 아무것도 없다만.”
“…….”
이창훈이 묵묵히 응시하자, 인한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그냥 좀 막히는 게 있어서 그래. 수련 관련해서.”
“우와, 형님도 막히는 게 있어요?”
“뭐?”
“형님 그냥 완전무결 아닙니까? 거의 그냥 무적초인 같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막 기연은 기연대로 와장창 떨어지고, 수련하면 막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데다, 노력은 노력대로 하고.”
“넌 날 어떻게 보는 거냐?”
인한이 피식 웃었다.
이창훈과 함께 있으면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뭐, 그래도 인간미가 있으시네요. 막힌다고 꽁해지시기도 하고. 그래서 갑자기 불러내신 겁니까?”
“그래, 뭐 그런 거야.”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인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도 차나 사러 갈까?”
“……예?”
무슨 차 사러 가는 걸 동네 슈퍼에서 라면 사러 가는 것처럼 말하는 인한이었다.
“대충 좋은 차 하나 추천해 줘 봐. 나도 차나 한 대 뽑자. 아, 맞아. 이참에 건물주나 해 볼까. 강남에 빌딩 한 채 사려면 얼마나 하지?”
“혀, 형님?”
당황한 이창훈이 말을 더듬었다.
“돈은 걱정 마라. 꽤 있으니까.”
인한이라면 충분히 한 번에 강남 빌딩 하나 살 것 같은 생각에 이창훈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인한이 차나 땅을 뚝딱 사는 일은 없었다.
딱히 예정이 없던 인한을 데리고 이창훈이 향한 곳은 서울 강남의 한 백화점이었다.
들어서는 순간, 연락을 받은 안내원들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자동차 주차도 직원이 직접 대신했다.
말로만 듣던 VVIP 서비스였다.
인한이 이창훈을 바라보며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뭘 하고 다닌 거냐?”
“왜요?”
“돈을 얼마나 펑펑 써 댄 거야?”
“응? 형님? 이걸로 놀라시면 안 되죠. 오히려 이 정도는 써 줘야 하는 겁니다. 저희가 얼마나 벌어요? 잘 벌 때는 일주일에 억 단위잖아요? 그런데 오히려 안 쓰는 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저는 그래도 의외로 그렇게 많이 안 쓰는 편이에요. 착실히 재테크도 하고 있고요.”
이창훈은 익숙하다는 듯이 음료와 간식거리를 주문하고 명품관을 거닐었다.
“아, 뭐 사고 싶으신 건 있으세요?”
“아니, 딱히 없다만.”
“그럼 뭐 부탁하죠. 아, 저기요.”
“예, 고객님. 부르셨습니까.”
이창훈의 뒤를 따라오던 정장을 빼입은 미녀가 절도 있는 자세로 대답했다.
“이분 돈 좀 쓰려고 왔다니까. 이번에 실적 올려 보세요. 아마 소개해 주면 소개해 주는 대로 다 살지도 모르니까.”
“예?”
“알아서 빼먹어 보시라구요. 흠…… 그래, 옷부터 사는 게 좋겠다.”
그 순간, 인한은 직원들의 눈이 반짝 빛나는 걸 느꼈다.
셔츠 하나에 수백만 원, 시계 하나에 수천만 원 하는 곳을 인한은 이것저것 추천받으며 돌아다녔다.
카드를 긁을 때는 흠칫흠칫 놀랐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돈을 쓰는 맛에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혀, 형님?”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주시죠. 아, 저것도 좋겠네. 저것도 주세요.”
인한은 가방이 전시되어 있는 벽면 전체를 가리키며 말했다.
“와, 근데 형님은 통장에 얼마가 있는 겁니까?”
거의 백화점을 털다시피 한 무렵이었다.
오히려 인한과 이창훈을 따라다니는 직원들이 지칠 정도로 돈을 써 댔다.
“흠, 내가 알기로는 한…….”
그때, 이창훈의 귀에 들어온 금액의 숫자는.
이창훈이 평생을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단위의 금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