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공략자들 199화>
-어째서? 트리아스 액셀이 있다면, 더욱 쉽게 다가설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냥 내 생각이긴 한데, 나는 그런 게 세 개나 있는 거잖아.’
오러, 정령술, 마법.
세 가지 힘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다.
세계의 이치에 더욱 깊이 파고드는 것.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사유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어 세계의 이치를 탐구하는 철학이나, 종교와 비슷한 면이 있다.
-그렇군. 그런 거군. 이해했다.
마나 스킬은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방법이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것으로 세계의 이치를 파악하는 것이다.
정령술은 그 반대다.
자연과 순리를 이해하며 세계의 이치에 들어선다.
마법은 지극히 이성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구조를 연구하고 탐구하는 것으로 세계의 이치를 뒤튼다.
‘이해했으면 됐어.’
-오해하지 마라. 네 인식에 문제가 있음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뭐?’
-아직 납득할 수는 없으나, 일단 모종의 방식으로 물질계에 있는 존재가 세계의 근원에 접촉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해 봤을 때…… 네가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방식에 대한 커다란 잘못이 있다.
‘뭐? 그게 뭐지?’
-아직까지 눈치채지 못했나? 너는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을 바라고 있지 않은가.
‘무슨 소리야?’
-앞뒤가 바뀌었다. 너는 이미 세계의 근원에 접촉했다. 트리아스 액셀이 세 가지 힘을 모두 다루기 때문에 계속 실패한다는 건 말이 안 돼. 네가 실패하는 부분은 접촉한 이후다.
인한의 눈이 커다래졌다.
-세 가지 힘을 다루는 ‘방식’이 다를 뿐이지, ‘결과’는 결국 세계의 근원에 도달하는 것이다. 과정이야 어떻게 됐든 너는 이미 세계의 근원에 접촉했다. 실제로 너는 엘릭서를 인벤토리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흡수하지 않았나.
그랬다.
그 뒤로도 집에서, 혹은 50층에서.
뭐가 어찌됐든 인한은 일단 접촉하는 데 성공하기는 했다.
그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볼 때 너는 트리아스 액셀을 별개의 세 가지 기술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트리아스 액셀은 어디까지나 합일(合一)을 추구하지 않는가? 오러, 용언, 정령술의 세 가지 기운이 일체화되는 게 바로 트리아스 액셀이라 생각된다만?
인한은 입을 꾹 다문 채 말을 잇지 못했다.
맞는 말이다.
트리아스 액셀은 하나의 힘이다.
세 가지 힘을 합쳐 만드는 하나의 새로운 힘인 것이다.
‘그럼…… 더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아직까지도 이해가 안 간단 말인가? 네가 말한 순서가 정말 올바른 방법이라는 전제 하에 얘기해 보자면, 너는 지금 ‘목적’도 없고 ‘과정’도 없다.
‘뭐?’
-너는 세계의 근원에 접촉해 무엇을 하려는 거지?
‘그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냥 막연히 그런 감각을 붙잡았고, 계속해서 수련해 보려고 한 것이었다.
-이 세계에는 재밌는 말이 있더군. ‘너 자신을 알라’. 결국 오러든 정령술이든 마법이든 나를 아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아닌가?
‘그래, 맞아.’
-더 설명이 필요한가? 원형구현이라. 즉 세계의 근원과 자기 자신의 내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거겠지. 그런데 넌 너 자신의 내면도 모른다. 네 자신을 모르고 있으니, 당연히 세계의 근원에 접촉할 순 있어도 그 뒤로 이어지지 않는 거겠지.
인한의 입이 벌어진 채 닫히지 않았다.
정곡이었다.
* * *
해태 길드에는 꽤 큰일이 있었다.
니시야마 겐지가 한국으로 아예 눌러살기로 한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해태 길드의 간부이자, 유일하게 한국에서 지내지 않는 겐지는 여러모로 불편함이 많았다.
그래서 가족이 일본에 있기는 하지만, 비행기 타면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거리였기에 한국에서 지내기로 결정한 것이다.
“자, 이거 받아.”
겐지를 마중 나간 인한은 아나스타샤에게 줬던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내는 주술 인형을 건넸다.
겐지도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고 있는 모양이지만, 아직 서툴러서 말이 어눌했던 탓이다.
“크으윽! 한국인이 강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인가!”
겐지가 한국에 들어온 첫날.
이소영이 당당하게 간부들을 이끌고 간 곳은 곱창집이었다.
그냥 매콤한 정도의 소스였음에도 겐지는 헉헉거렸다.
“으으으! 입술이 아파! 혓바닥도! 크으윽! 그런데 맛있어!”
누가 보면 생사대적의 상대를 마주하는 걸로 오해할 정도였다.
그는 눈에 살기마저 보이면서도 추가 메뉴로 나온 순두부찌개를 퍼먹었다.
겐지는 소스가 묻은 입가를 스윽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태호 님과 인한 님이 강한 이유가 바로…… 매운맛이었나.”
또 무슨 이상한 생각에 빠지는 모양이었지만, 아무도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코웃음만 쳤다.
매번 이렇게 시간을 내서 같이 식사를 하는 건 이소영이 주장해서 하게 된 일이었다.
간부들이 모이는 날은 무조건 회식 날이었다.
무슨 얘기를 하든 먹을 게 들어가면서 하면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식사 자리가 끝날 때쯤, 인한이 입을 열었다.
“잠깐 솔로로 활동하도록 할게.”
순간, 정적이 흘렀다.
테이블 중앙에서 곱창이 자글자글 타들어 가며 고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간부들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왜요?”
먼저 물어본 건 이소영이었다.
인한이 말했다.
“잠깐 수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레오, 박철환. 그놈들을 이대로 둘 수는 없어요.”
인한의 눈에 차가운 기색이 머물렀다.
그러나.
“절대 안 되거든요!”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인한아, 아무리 생각해도…….”
“인한!”
“뭐, 형님 없으면 우리끼리 오르면 되죠!”
인한의 말에 오랜만에 모였던 해태 길드 간부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물론, 혼자서 다른 소리를 한 이창훈은 이소영과 아나스타샤의 날카로운 눈총에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소영이 테이블을 쾅 내리치고는 말했다.
“……2차 가요.”
“예?”
“2차 가자고!”
이소영이 빼액 외치며 벌떡 일어섰다.
2차는 술집이었다.
대학로에 이소영이 자주 가던 술집이었다.
이소영은 대학에서 한때 연극을 했었던 과거가 있었다.
그녀는 하루 공연이 끝나면 꼭 밤에 막차 기다리면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굉장히 조용한 분위기의 내부는 낡은 한옥식이었다.
21세기의 술집에서는 보기 힘든 7, 80년대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제는 초로의 여인이 들어서는 사람들을 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 이게 누구야!”
“이모, 오랜만이에요.”
“소영이 아니야! 이게 얼마 만이야!”
“자리 있어요?”
“그럼, 있지! 어여 들어가. 어우야, 장정들을 데리고 왔네.”
이소영은 방 밖에서 여인과 웃으며 떠들었다.
한동안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이소영이 본론을 꺼냈다..
“빨간 두꺼비 한 짝…… 아니, 두 짝 가져다주세요”
뭔가 이상한 얘기를 들은 것 같았다.
보통 병 단위로 이야기를 하지 않던가.
그런데, 한 짝? 두 짝?
‘애초에 짝이 뭐지?’
쿵!
그때, 이소영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장님의 남편으로 보이는 할아버지가 소주 박스 두 개를 내려놨다.
‘설마 짝이 박스였어?’
소주 박스 옆에 앉아 있던 이창훈이 흠칫 놀라고는 벌벌 떨었다.
“저, 누, 누님?”
“오늘 마력 써서 술기운 내보내는 사람 있으면 재미없어요, 진짜?”
“……!”
“그리고 이거 진짜 얼마 안 되는 거 알죠? 한 사람당 대충 여섯 병밖에 안 돼요.”
“애초에 물도 그 정도로 한 번에 못 마시거든요!”
“마셔. 남자잖아.”
“그, 그거 성차별 발언입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잠잠해지고, 결국 소주가 한 병 두 병 따지기 시작했다.
아나스타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역시 한국의 술은 그냥 물 같네요.”
“…… 예?”
“조금 술맛 나는 물?”
역시 보드카를 물처럼 마신다는 나라 출신답게 아나스타샤는 소주를 거침없이 들이켰다.
술잔은 계속해서 돌았다.
의외로 술에 약했던 임태호는 두 병쯤 됐을 때 뻗어 버렸고, 이창훈은 한 병 마시고는 마력으로 술기운을 흩어내려다 들켜서 벌주 한 병을 마시고 쓰러졌다.
겐지는 애초에 술을 마시질 않았다.
평소처럼 ‘수행하는 몸. 언제나 만전의 상태를 유지해야 하오!’라는 뉘앙스의 말을 하고는 물만 홀짝이고 있었다.
“이모! 여기 맥주 네 병!”
“그래!”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인한, 이정환, 이소영, 아나스타샤, 겐지였다.
얼굴빛이 시뻘게질 정도로 취한 이소영이 이를 바득바득 갈며 인한을 노려보았다.
“대체…… 으응? 진짜 아싸야? 왕따야? 중2병 걸린 애도 친구랑 같이 있으려고 하지 혼자 있으려고 하지는…… 우욱!”
상당한 주당이었던 이소영도 취했고, 아나스타샤도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중독 면역 탓에 취하고 싶어도 취하지 못한 인한은 뒷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다.
“맞아요. 인한, 왜 계속 그렇게 무리를 하려고 해요. 레오, 박철환. 두 사람 모두 인한이 굳이 싸울 필요 없어요. 조금 성가시긴 하지만 무시할 수도 있잖아요?”
“…….”
인한은 말없이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이 사람들은 모른다.
박철환의 교활함을, 레오의 끈질김을.
‘이번엔 확실하게 죽여야 해.’
지금처럼 어중간해선 계속 휘둘릴 뿐이다.
결과가 어떻게 됐든, 끝장을 봐야 했다.
‘감히 길드를 건드려?’
그냥 말로만 적대감을 표했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데스 파티는, 박철환은 실행에 옮겼다.
놈은 인한과 해태 길드를 노리고 있다.
그걸 가만히 내버려 둔다?
무시한다?
멍청한 생각이다.
그러면 결국 다치는 건 인한이 될 것이고, 길드원이 될 것이다.
‘하루빨리 완성해야 해.’
원형구현.
자신의 내면을 인식하고, 그것을 길로 삼아 세계의 근원에 접속하는 기술.
그 힘은 절대적이다.
레오가 그것을 가지고 있는 이상, 승패는 장담할 수 없다.
‘레오가 얻었다면, 발터도 얻었단 소리다. 마찬가지로…… 박철환도.’
인한이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저기요, 인한.”
“네? 윽!”
어느새 숨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진 아나스타샤가 인한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커다란 그녀의 눈동자에 인한이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언제나 인한은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거 알아요?”
“맞아! 우리 못 미더워? 아니면 싫어? 왜 맨날 말 안 해 줘!”
인한을 타박하는 아나스타샤와 이소영.
이정환이 어색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진정시켰다.
“자자, 두 분 다…….”
“정환, 당신도 마찬가지에요.”
“맞아! 이정환 너도 아무것도 말 안 해 주잖아!”
“으윽.”
여성진의 기세에 흠칫 놀란 이정환.
겐지가 호탕하게 웃으며 둘을 말렸다.
“하하! 역시 여걸들이십니다! 자, 자, 이런 분위기는 안 좋습니다. 싸우는 건…….”
“넌 가만히 있어! 이 진지충아! 맨날 오타쿠 같은 말투 쓰고!”
“지, 진지충……. 오, 오타쿠…….”
겐지가 침울한 표정으로 주저앉았다.
인한은 당황해서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그때 인한을 노려보던 이소영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왜…… 맨날 숨겨요. 말해 주면 안 돼요? 계속 그렇게…… 뭐든지 숨겨야 해요?”
고개를 푹 숙인 이소영이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인한 씨는 맨날 벽을 치고 있어요. 언제나 동료다 뭐다 잘해 주고 소중히 여겨 주고 할 건 다 하면서…… 다 좋아요, 다 좋은데! 결국 그 벽으로는 넘어오도록 두질 않아요.”
그 말을 끝으로 쓰러져 버린 이소영은 아나스타샤가 데려가고, 쓰러진 임태호와 이창훈은 이정환이 맡았다.
갑작스러운 분위기에 넋이 나간 겐지는 인한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저…… 인한 님.”
인한의 가라앉은 표정이 마음에 걸렸던 걸까.
겐지가 말을 걸어왔다.
“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다들 취해서 그런 것일 테니까요.”
집으로 향하는 길.
다행히 겐지가 국제 면허를 가지고 있어서 겐지가 운전대를 잡았다.
차는 부드럽게 적막한 도로 위를 달렸다.
“예, 알고 있습니다.”
다시 차 안에 조용한 분위기가 흘렀다.
한숨을 푹 내쉰 인한이 신호등을 바라보았다.
“……제가 잘못한 것 같습니까?‘
인한의 물음에 겐지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잘못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인한 님. 그저…… 저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 ‘벽’이라는 건.”
“그런가요.”
인한이 입을 꾹 다물었다.
‘벽이라.’
밤하늘에 떠 있을 별들은 네온사인의 빛에 가려져 빛을 잃었다.
어두컴컴한 밤거리.
창밖을 바라보는 인한의 눈동자에는 LED등의 불빛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