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
<공략자들 198화>
검은 탑 47층.
박철환은 정면을 바라보았다.
“좌측! 막아야 한다!”
“오른쪽에서 몬스터가 추가로 왔어!”
“공격해!”
데스 파티의 헌터들이 미친 듯이 달려들며 던전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흔히 알려진 던전 공략과는 달랐다.
표현이 아닌, 정말 피 튀기는 공략이다.
본래 던전 공략이란 것은 해당 던전을 충분히 클리어할 힘이 있는 자들이 도전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부상을 입지 않을 정도의 성장을 끝낸 후에야 비로소 던전으로 들어가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데스 파티의 모습은 그와 달랐다.
누가 봐도 명백한 열세다.
길드원의 수준은 높지만, 47층의 던전을 공략할 정도는 아니다.
필드에서 성장을 하든지, 46층 던전에서 실력을 쌓은 후에 공략해야 할 듯했다.
“크아아악!”
때마침 팔이 부서진 헌터 하나가 뒤로 쓰러졌다.
동료들은 그에게 힐끗 시선만 준 채 다시 몬스터에게 달려들었다.
상처 입은 부상자는 힘겹게 뒤로 빠졌다.
그런 그에게 회복 마법을 가진 서포터 카테고리의 헌터들이 달라붙었다.
“이 개 같은 몬스터 새끼들!”
회복을 마치자 그는 검을 움켜쥐고는 다시 땅을 박찼다.
팔이 부러진 지 얼마나 됐다고, 사내는 눈가에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줄기줄기 뻗어 내며 몬스터의 전투에 참여했다.
데스 파티라는 이름이 정말로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너는 안 가 보는 거야?”
그런 격전지에서 다소 떨어진 곳.
오연한 자세로 전투를 관전하고 있던 박철환의 옆으로 레오가 천천히 다가왔다.
“내가 왜 가야 하지?”
“저렇게 네가 공들여서 모은 사람들 다치고 있잖아? 그래도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꽤나 낭만주의자가 다 됐군. 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하긴 내가 생각해도 조금 그런 거 같아, 후후!”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지?”
“아, 고맙다고 얘기를 안 한 거 같아서 말이지? 키아! 솔직히 아직까지 관절이 쑤시는 기분이야. 너, 50일 넘게 관절에 말뚝 박혀 본 적 있어? 나, 목도 잘려 봤다?”
“…….”
박철환이 고개를 돌려 레오를 노려보았다.
“내가 널 살린 건, 아직 네게 쓸모가 있어서일 뿐이다.”
“물론! 그것도 알고 있지.”
“알고 있으면 명령한 일이나 완수하도록. 히든 던전 위치를 알려 줬을 텐데.”
“아, 예이…….”
희극적인 몸짓을 하며 레오가 허리를 숙인 순간.
위잉! 콰앙!
폭음과 함께 단백질 타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몸을 숙였던 레오의 육신이 천천히 땅바닥에 쓰러졌다.
레오의 머리에 둥그런 바람구멍이 나 있었다.
뜨거운 무언가가 관통한 것인지, 상처 부위가 타들어 가며 역한 냄새를 흘렸다.
꾸득! 꾸득!
그러나 그 상처도 곧 회복되었다.
레오가 고개를 휙휙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으응? 뭐야. 이렇게 갑자기?”
“정말 일어나는군.”
“그거 확인하려고 한 건가? 참…… 너도 정신병자라니까?”
박철환은 대꾸하지 않고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여전히 피와 살이 튀기는 공략이 이어지고 있었다.
레오가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시선을 돌려 레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박철환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역시, 저놈은 그 녀석의 사도인 건가.”
* * *
인한은 검은 탑 50층으로 향했다.
부글!
한순간, 전신에 물이 달라붙었다.
심해의 압력이 인한의 몸을 옥죄는 것이었다.
‘워디나.’
-우우!
그때, 인한의 전신에서 물이 뽀글뽀글 튀어나오더니 인한의 몸을 감쌌다.
인한은 그 뒤에 실리암을 소환했다.
-이런 곳에서 특정 공기를 만드는 것은 상당한 속성력의 소모로 이어진다. 괜찮겠나?
‘괜찮아.’
-그럼 알겠다. 워디나의 물방울 속이라는 한정된 공간 내에선 호흡이 가능할 거다. 대략…… 2시간 30분 19초, 18초…… 정도겠군.
인한은 물방울을 전신에 감은 채 천천히 나아갔다.
50층 필드 꿈의 바다.
바다라고는 하지만, 지구의 바다와는 여러 모로 다른 점이 많은 곳이었다.
이곳이 진행하기 힘든 이유는 물 특유의 저항력 때문이다.
부웅! 부웅!
인한은 주먹을 뻗어 상태를 확인했다.
심해의 압력, 물의 저항력까지 더해지자 주먹을 뻗는 일이 힘들다.
임태호처럼 체격도 크고 면적이 넓은 대검 같은 무기를 쓰는 헌터에겐 애초에 필드 진행 자체가 어려운 곳이다.
‘그래, 이 정도면 되겠군.’
땅의 돌에서 떨어진 곳으로 향한 인한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나 스킬 6단계.
그걸 펼치기 위해서였다.
‘레오와 상대하려면 결국 이게 필요하다.’
마나 스킬 6단계를 인한은 이미 병원에서 성공했었다.
면회를 거절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 세계, 아니, ‘그곳’에 있을 때의 감각을 잊고 싶지 않아서 바로 수련을 했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집중을 하고 싶어도 워낙 어수선한 곳이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한 것인데…… 설마 성공하지도 않고 실패했는데 그런 파괴력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또 실패하더라도 여기라면 상관없겠지. 거기다 방해도 없어.’
인한은 집중해 들어갔다.
오러를 통해 세계의 흐름에 관여하는 것.
인한은 미래의 리셴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은 정말 적절한 표현이었다.
리셴이 아니었다면 그런 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 분명했다.
세계의 흐름.
혹은 근원.
모든 힘의 시작점이자, 모든 기록이 시작되는 곳.
그곳에 접속하는 것이 마나 스킬 6단계의 시작이다.
‘집중하자.’
그동안의 마나 스킬을 다루던 감각과 전혀 다르다.
이때까지는 마나 스킬이 육체의 현상에 집중해 들어갔다면.
6단계는 나 자신의 정신의 심연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세계의 기록은 지금도 쌓여 가고 있다.’
문득 그런 말이 떠올랐다.
어디서 들었는지, 애초에 듣긴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말.
‘세계는 하나이고, 하나는 결국 세계이다.’
나 자신은 커다란 우주 만물 세계의 일부이다.
그러나 결국 그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것은 작디작은 나라는 세계다.
그 말을 상기한 순간.
정신이 천천히 흐트러진다.
모든 잡념이 하나둘 빠져나가고, 끝내는 나 자신만이 남는다.
우우웅!
자연스레 그 공간이 펼쳐졌다.
모든 세상의 흐름이 펼쳐진 곳.
그러나.
결국 이것들은 모두 커다란 실뭉치에서 풀려나온 실타래에 불과하다.
인한은 천천히 손을 뻗어 얇은 백색의 선을 잡고자 했다.
그 순간.
-……한! 최인한! 최인한! 정신 차려라!
위그라노아의 다급한 외침이 정신을 일깨웠다.
인한의 의식이 천천히 수면 위로 부상해 올라왔다.
흐려졌던 눈의 초점이 돌아오자, 인한이 눈을 껌뻑였다.
‘왜 그래?’
-지금 뭘 하려고 한 거지? 무슨 짓이냐!
‘뭐가?’
-넌 지금 세계에 파고 들려고 했다. 물질계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자살이라고 할 셈인가!
‘물질계?’
-그게 뭔지도 모르고 한 행위인가?
‘왜 그렇게 당황해하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맞아. 이 길이 바른 길이야.’
위그라노아의 의식에서 당황해하는 기색이 느껴져 왔다.
-그게 맞다니. 무슨 소리지? 물질계에 존재하는 사람으로 ‘근원’에 접근하고도 존재를 잃지 않을 수가 있다고?
‘근원? 이걸 근원이라고 표현하는가 보지?’
-이 세계의 언어로 마땅히 표현할 말이 없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다.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건 죽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존재의 소멸이란 말이다!
인한이 피식 웃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이번엔 방해하지 말아 봐. 보여 줄 테니까.’
인한이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천천히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절대적인 관념, 가치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이것을 근원이라 표현한다면, 참 괜찮은 표현이라 인한은 생각했다.
물질계에서 벗어난다는 표현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 모두 다르다.
이곳은 모든 세계의 기록이 쌓이는 곳이다.
아니, 어쩌면 세계 그 자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세계의 형태를 갖춘 것, 형태를 갖추지 않은 모든 것도 결구 이곳의 절대적인 개념의 모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우웅!
그리고.
그 절대적인 개념에 접속한다.
슈욱! 콰앙!
그 순간, 갑자기 사방에 거친 폭발과 함께 태풍과 같은 기포가 일어났다.
일말의 마력도 사용하지 않았다.
속성력, 용언은 물론이다.
격류에 이리저리 휩쓸린 인한이 입을 다셨다.
-지금…… 뭘 한 거지?
위그라노아가 물어왔다.
인한이 대답했다.
“마나 스킬 6단계.”
한숨을 푹 내쉰 인한이 말을 이었다.
“보기 좋게 실패했지만.”
* * *
서양 고대 철학, 그중에서도 플라톤 철학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중심 개념 중, 이데아(Idea)라는 것이 있다.
절대 관념, 절대가 치, 모든 존재와 인식과 개념의 근거가 되며, 초월적이며 절대적이고 비물질적인 실재(實在)를 의미하는 단어이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것이다.
어떤 사물이 있을 때, 그 사물의 본성과 성질과 원형(原形)이 바로 이데아다.
즉, 이데아는 관념을 의미한다.
의자, 사과, 세상, 사람…… 수많은 관념들의 시작, 원형, 근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를 가진 물질들은 모두 이 절대적인 관념인 이데아의 모사에 불과하다.
물질은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이데아는 절대 불변의 속성을 가진다.
-그런 세계에, 너는 접촉한 것이다.
위그라노아가 말했다.
50층에 언제까지나 있을 수 없어서, 탑의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힘을 썼더니 배가 출출한 탓에, 간단하게 근처에 앉아 컵라면을 까먹고 있었다.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네. 나는 철학과는 별로 친하지가 않아서 말이지.’
-철학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존재한다. 아니…… 존재할 거다.
‘……?’
인한이 의아해하는 것을 느꼈는지, 위그라노아가 말을 이었다.
-우리들의 세계에서 오직 세계수만이 세계의 근원에 접속해 있었다. 나라는 불완전한 세계수는 그저 막연히 인지할 뿐이다. 이 세계의 근원, 혹은 시초, 혹은 세계 그 자체라 부를 수 있는 것을 말이지. 그런데 정말 놀랐다. 어떻게 한 거지? 인간의 마나 스킬은 물질계에 존재하는 인간을 신의 경지까지 도달하게 할 수 있다는 건가?
‘나도 그런 건 잘 모르겠어.’
인한이 라면의 국물을 후루룩 삼킨 후 말을 이었다.
‘그런데 레오의 검을 맞은 후에 알게 됐지.’
공간을 뛰어넘은 검격…… 이라고 알았던 검.
그러나 그건 공간을 뛰어넘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내면을 세계에 덧칠한 것이다.
‘벤다’라는 절대적인 관념이 레오의 손에 펼쳐지고, 시공과 모든 힘의 흐름을 초월해 인한의 가슴을 베었다.
-그건…… 그야말로 신이 아닌가? 베고 싶은 것은 모조리 벨 수 있고, 원하는 것을 모조리 죽일 수 있는…….
‘그래서 6단계는 입신(入神)이라 칭해졌지. 그리고 펼치는 기술은 원형구현(原形具現)이라 불렸고.’
그 모든 것에 이름 붙인 게 리셴이었다.
애초에 6단계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말한 게 리셴이었기 때문일까.
그의 말이 대부분 통설이 되었고, 호칭도 리셴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인한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넌 어떻게 그런 걸 맞고도 살아난 거지?
‘아마도 레오가 힘 조절을 한 것도 있고, 내가 미완성이나마 거기에 도달한 탓에 살아날 수 있었던 거야.’
-도달했다고?
‘트리아스 액셀을 말하는 거야.’
세계의 구조와 이치를 뛰어넘은 하나의 기술.
세계를 구성하는 세 개의 힘.
인한은 그것들을 모조리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자꾸 실패하는 것 같군.’
인한이 입을 꾹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