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191화 (191/266)

# 191

<공략자들 191화>

“시간…… 말씀이십니까?”

“그걸 뒷받침하는 재밌는 사실이 하나 더 있네.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에 아무도 떠올리지 못한 것. 본격적인 조사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아무도 모른 게 있었지.”

“그게 뭐죠?”

“각 층은 중력의 크기가 달라. 그것뿐인가. 공기의 구성 물질도, 환경의 순환 구조도 전부 다르다네. 좋은 예로 9층의 공기가 있겠지. 그곳은 공기 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한 성분이 37퍼센트나 있었네. 질소는 고작 28퍼센트, 나머지는 산소와 기타 성분들이었지.”

“자, 잠깐만요. 그러면 어떻게 그곳에서 숨을 쉬는 헌터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단 말입니까?”

공기의 질이 조금만 달라져도 알아채는 게 인간이다.

그런데 정체를 알 수 없는 성분이 37퍼센트나 섞여 있는데 알아채지 못한다고?

거기다 중력이나 원소의 형태나 환경의 순환 구조도 다르다니?

“그게 바로 이 탑의 비밀이지. 그냥 내 개인적인 견해이네만, 땅의 돌을 통해 층을 이동하면, 무언가 빛에 휩싸이며 막을 통과하는 기분이 들지 않는가.”

“예, 그렇죠.”

땅의 돌에 접촉하고 원하는 층에 오르면, 한순간 몸이 빛에 휘감기며 얇은 물의 막을 통과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기분은 이동하려는 층과 층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길어진다.

“내 생각하기에, 그 땅의 돌을 통과하는 순간 탑이 헌터의 육체를 제멋대로 위화감 없이 세계에 적응하도록 하는 것 같네.”

“…….”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들이었다.

인한의 표정이 일그러져 있을 때, 리 쉔펑이 씨익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걸 들으면 더 놀라겠군. 검은 탑의 꽤 많은 층이 지구와 똑같을 정도의 환경을 가진 걸 눈치챘나?”

“예? 분명 방금 전은 다르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에잉, 그건 그런 세계도 있다는 거지. 몇몇 층은 이세계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지구와 많은 부분이 흡사하네. 물론 대기나 지질 등은 지구와 상당히 다르지만.”

“수억 년 전 지구의 대기와 21세기의 대기가 다르듯이 말이야.”

지질학자라 자신을 소개한 사내가 끼어들 듯 입을 열었다.

리 쉔펑이 자연스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자연의 규칙이 적용되고 있는 곳들과 다르게, 원소 기호나 물의 순환 구조, 아아, 이게 또 재밌는…….”

“삼천포로 빠지는군. 자네가 그러니까 수강 신청률이 저조한 거야. 그러면서 학점도 짜고, 과제도 많으니까.”

“아니, 이 자식이! 하여튼 우리 세계와 비슷한 층들이 꽤 많더라 이 말이지.”

리 쉔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그라노아가 말을 걸어왔다.

-기억나는가. 내가 저번에 했던 말이다. 어째서 이 세계는 최하위 위계인 주제에 그토록 아발론과 닮아 있는가에 대해서.

‘그건…….’

인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인한이 리 쉔펑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먼 과거나 먼 미래의 지구가 이 탑의 층인 건…… 지구가 멸망하고 흔적이 다 사라져서…….”

그런 내용의 이야기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사실 현재의 문명 이전에, 초과학 문명을 이룩한…….

“뭐? 흐하하하! 이 친구 재밌는 농담을 하는구만! 하하!”

리 쉔펑이 인한의 어깨를 팡팡 두들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진심이었습니다만.’

사실 아발론이 지구의 과거나 미래가 아니었을까, 하고 때때로 생각해 왔던 인한이었다.

“그럴 리가 있나! 하하! 지구가 아무리 변해도 이 세계처럼 변하진 않을 걸세. 그리고 과거의 문명? 그런 게 있다면 지금까지 과학자들이 밝혀 내지 못할 리가 없지!”

-그렇다. 그 추측은 잘못됐다. 아발론과 지구는 한없이 같지만, 또한 한없이 다르다. 으음, 그렇군. 이 세계의 표현에 따르면…… 동전의 앞뒷면이랄까?

‘동전의 앞뒷면?’

-성질도 비슷하고 생김새도 같다. 하지만 결정적인 무언가가 다르지. 바로 마나의 유무다.

인한이 위그라노아의 설명을 듣는 동안, 리 쉔펑은 호쾌하게 안주로 나온 과일 꼬치를 단번에 입에 집어넣었다.

“뭐! 지금 진행하고 있는 건 이 정도라네. 어때, 꽤 재밌지?”

인한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인한은 간간이 대꾸만 하면서 술잔을 연거푸 기울였다.

너무 많은 내용을 들었기 때문일까.

머릿속에 수많은 단어가 떠다녔다.

그리고 그중.

‘탑이 시간마저 관통한다…….’

그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쩌면, 그건 인한이 다시금 탑을 오를 수 있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에.

* * *

해태 길드는 48층까지 공략을 완료했다.

몬스터 마켓에 올려진 영약은, 처음에는 누군가의 질 나쁜 농담이라 여겨지며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인한이 스트리밍 채널에 슬쩍 마력 스테이터스를 높여 주는 약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 후로 치열한 호가 경쟁이 이루어졌고, 끝내 일주일만에 98억원이라는 가격에 거래가 이루어졌다.

“말도 안 되는군. 이런 돈이 나올 수가 있는 건가?”

이창훈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는 피식 웃으며 인한에게 말했다.

“98억 원이 나왔다고 해도 그대로 받을 수는 없어. 그건 알지?”

“그래, 어떤 졸부가 미친 척하고 돈지랄했을 테니까.”

“그래도 완전히 말도 안 되는 가격은 아니야. 무려 750포인트 이하라면 100포인트나 올릴 수 있는 아이템이니까.”

보통 마력의 정수, 혹은 마나의 정수라고 불리는 아이템의 경우 150억에서 200억 원 사이를 오고 간다.

고작 마력 스테이터스 100포인트를 올려 주는 정수가 그 정도니, 200포인트나 300포인트짜리가 되면 가격은 끝도 없이 치솟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그럼 내가 먹은 영약이나 정수들은 대체 가격이 얼마나 하는 거지?’

엘드라드, 넬레바나의 호의, 마나의 정수…….

그것들을 다 더하면,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가격은 내가 적당히 해서 판매해 볼게. 그래도 말도 안 되는 금액이 벌릴 거다. 수량이 무려 100개나 있으니까.”

“거기다 계속 만들 수 있을 거야. 일단 기업들도 성분분석을 할 게 분명하고. 그러니 영약으로 이만큼 큰돈을 버는 건 어느 수준까지 만이다.”

회귀 전, 이 정도 영약은 1억이면 살 수 있었다.

“뭐 그래도 확실한 건, 해태 길드의 든든한 돈줄이 하나 추가됐다는 거지.”

인한과 이정환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 * *

지혜의 왕이 허공에서 천천히 날아들었다.

아니, 어쩌면 부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위아래의 구분이 모호해질 정도의 어둠이었다.

사방이 까마득한 어둠뿐이었고, 방향을 알 수 있는 사물 따위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날아들던 순간이었다.

한순간, 먼 곳에서 갈색으로 빛나는 밝은 빛 한 점이 나타났다.

그건 토파즈색의 물처럼 투명한 거대한 암석이었다,

헌터들이 봤다면 땅의 돌이라 불렀을 테고, 인한이 봤다면 에테르 코어라 불렀을 아이템이 거기에 있었다.

“순조롭게 되고 있나?”

에테르 코어의 정면.

한 마리의 드래곤이 있었다.

백색의 피부와 날개를 지닌 드래곤에게 지혜의 왕이 접근했다.

두 순백의 존재는 에테르 코어의 앞에 나란히 섰다.

“재밌더군. 이 에테르 코어라는 구조 말이야. 누구의 업적이지? 역시 땅의 왕인가?”

“그래. 그보다 알아낸 것을 말해라.”

“흐음, 네 예상대로 이건 무슨 힘이 있는 게 아니라 정보를 저장해 놓는 장치더군. 그런데 보안이 엄중해. 쉽게 뚫지 못하겠어.”

“너라도 말인가?”

“오호, 그렇게 날 높게 평가해 줬을 줄은 몰랐군.”

“높고 말고를 떠난 문제다. 시초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네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비밀이 있단 말인가?”

“이거 아주 콕콕 찌르는군.”

드래곤은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 어깨를 으쓱했다.

위대한 종족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하는 행동은 장난꾸러기가 따로 없었다.

“이건 왕의 레갈리아로 만들어진 거야. 미안하지만 뭔가를 알아내려면 접속 코드가 있어야 하거든. 그게 아니라면 강제로 보안을 깨는 건 상당히 시간이 걸릴 거 같고.”

드래곤, 아니, 시초의 왕은 에테르 코어를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이런 게 있을 줄 왕들은 아무도 몰랐는데 말이야. 라스틴, 그놈은 옛 왕일 적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에 저도 모르게 사용한 거 같군.”

시초의 왕의 겹눈이 지혜의 왕을 꿰뚫었다.

“그리고, 배반자인 너는 자격 박탈에 기억까지 잃었으니 모르는 것이고.”

“입조심하도록.”

지혜의 왕에게서 무형의 기운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하여간 넌 정말 음흉하다니까. 대체 한 가지 일을 진행하면서 몇 개나 얻으려고 한 거야?”

시초의 왕이 춤이라도 추듯 이리저리 몸을 흔들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검은 탑 프로젝트, 말만 유희지 대체 몇 가지 일을 진행시킨 거야? 흠흠, 뭐가 있더라. 일단 첫 번째는 역시 세계의 정수를 통한 아발론 정상화. 거기다 분화된 세계를 멸망시킴으로써 아발론으로 ‘흐름’을 집중시킨 게 있겠지?”

“시끄럽다.”

지혜의 왕이 말했지만 시초의 왕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유희라는 이름으로 왕들의 시선을 그쪽으로 돌릴 수도 있고, 그사이에 착착 너는 다른 일을 진행했을 테고.”

“…….”

“또 씨앗이나 사도라는 것들을 통해서…….”

콰앙!

한순간, 폭음이 공간을 휩쓸었다.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마법진이 사방에 떠올라 시초의 왕을 노리고 있었다.

“워워, 진정해. 동료끼리 그 정도 농담도 하지 못하나?”

“난 어디까지나 네 쓸모를 인정한 것뿐이다. 절대적으로 필요하진 않아. 네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진 않아. 그러니 그 입, 반드시 조심해야 할 거야.”

“그래그래. 알았다고.”

시초의 왕이 미소를 지었다.

지혜의 왕의 눈동자가 시초의 왕을 노려보았다.

“잡담은 여기까지. 시작하도록 하지.”

지혜의 왕이 에테르 코어에 손을 얹었다.

* * *

검은 탑 50층은 여러 의미로 유명한 층이었다.

중층인 50층을 기점으로 몬스터의 질이 말도 안 되게 높아지기 때문이다.

필드 자체의 난이도도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괴기하게 바뀐다.

“자, 자, 정비 끝났으면 50층 땅의 돌에 등록만 해 두고 얼른 나가서 쉽시다!”

“잠깐만.”

인한이 이정환을 멈춰 세웠다.

“일단 몇 명씩 나눠서 보내 보자. 땅의 돌 주위에 몬스터가 있으면 위험해. 중층이니까 조심해야지.”

“음, 확실히 그러네.”

인한의 말에 이정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가 먼저 갈게.”

인한은 이동진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솨아아아!

시원한 감촉이 전신을 휘감고, 숨이 턱 막히기 시작했다.

인한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천천히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물이었다.

50층 필드, ‘꿈의 바다’.

필드의 형태는 심해였다.

일단 땅의 돌을 활성화시킨 인한은 1층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곧장 드루이드의 인형으로 이정환에게 연락했다.

인한은 그에게 50층의 특성을 설명한 후, 곧장 땅의 돌을 통해 이동하라는 얘기까지 전했다.

시간이야 오래 걸리겠지만, 제일 확실한 방법이었다.

50층에서 1층은 땅의 돌을 통한 이동 시간이 상당히 길기 때문에, 도착한 사람은 먼저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대체…… 물속에서 공략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임태호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인한과 간부들은 따로 남아 1층에 자주 가던 주점에서 회의 겸 회식 겸 모였다.

한동안 얘기를 주고받던 중, 인한이 내용을 정리하듯 말했다.

“아까 말했던 대로, 일단 49층에서 성장을 하도록 하는 걸로 하죠.”

“그래? 음, 확실히 49층 보스존은 지금까지와 달리 엄청나게 고전했으니까. 너무 빠르게 오르는 것도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임태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리고…… 전 잠깐 따로 행동하겠습니다.”

“응? 또 왜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거예요. 인한?”

이소영과 아나스타샤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외쳤다.

“죄송해요.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동안 혼자서 필드에 나갔던 것도 그 일 때문입니다.”

인한은 그렇게 말하고 남은 맥주를 목 뒤로 털어 넘겼다.

술자리가 끝나고, 인한은 집으로 돌아가며 생각에 잠겼다.

‘박철환.’

중층에 넘어서기 전에 처리해야 할 놈이다.

놈의 위치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생긴 이상, 지체할 생각은 없었다.

인한의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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