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0
<공략자들 190화>
필드 탐색이 끝나고, 중간에 발견한 안전지대로 돌아온 해태 길드는 노숙 준비를 끝냈다.
인한은 자신의 침낭을 펴고, 모닥불을 피워 둔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전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예? 아, 네……. 저, 인한 씨.”
“네? 왜 그러세요?”
“아, 그게, 그…….”
이소영이 우물우물하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예? 아, 네, 감사합니다.”
인한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안전지대 밖으로 빠져나왔다.
인한은 필드를 질주하며 마력을 넓게 퍼뜨렸다.
“위그라노아, 얼마나 남았지?”
-이제 21퍼센트 정도 남았다.
인한이 한동안 빠르게 필드 공략을 한 이유, 그리고 밤마다 휴식을 취하지 않고 필드로 나서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넬레바나의 원정은, 쉽게 설명하면 엘프족의 마력원이라 할 수 있다. 그걸 흡수한 자는 환상종의 마력원을 갈취한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걸 추적하기 위해선 환상종 특유의 자연과 동화되어 있는 마력이 필요하다.
인한은 2주 전, 위그라노아가 말해 주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47층에는 페어리가 있을 거야. 안개에 마력을 흘리는 게, 분명 그 녀석들이 하는 일일 거 같거든. 대화는 통하지 않지만…… 정령을 사용하면 우호적으로 접근할 수 있겠지.”
-상당히 서두는 것 같군. 마력의 흔적은 생각보다 짙게 남아 있다. 굳이 서두르지 않아도 충분히 잡을 수 있다.
“아니.”
인한은 위그라노아의 말을 끊어 내며,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더 이상 질질 끌면 안 돼.”
질기고 질긴 악연.
그것을 끊기 위해 인한은 적극적으로 움직이기로 했다.
인한은 땅을 박차며, 그렇게 말했다.
* * *
47층 공략은 성공적이었다.
보스존에서 몇 번의 실패가 있었지만, 금세 극복하고 진행할 수 있었다.
길드원들의 피로도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에 해태 길드는 48층 필드를 어느 정도 탐색한 후, 탑 밖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최소 보름에서 최대 한 달 정도면 층 하나를 공략할 수 있었다.
그 뒤에는 보통 탑의 밖에서 1주일 정도의 시간을 갖고, 다시 탑을 올랐다.
“그럼 다들 호출이 있을 때까지 푹 쉬도록!”
휴식도 공략의 일부분이다.
인한도 휴식 시간이 되면 꼭 집에 틀어박혀서 충분히 휴식을 취했다.
물론, 하루의 대부분을 수련에 보냈다.
인한은 마당에 있는 잔디 위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잡념을 떨쳐 내고, 호흡과 마력의 흐름에만 집중했다.
‘6단계라.’
우웅!
40층에서의 일 이후 인한은 마나 스킬 6단계에 도달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힘의 상승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력의 효율이나 위력이 강해지기는 했지만, 그건 단계를 올릴 때마다 그래 왔던 것이었다.
‘오리지널 오러 스킬을 펼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인한은 발터와 레오와 박철환 등의 6단계를 넘어섰던 헌터들이 펼치던 기술들을 떠올렸다.
4단계가 오러의 수렴과 방출만 가능하다면, 5단계부터는 오러에 방향성을 부여해 자신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다.
원거리 공격에 사용하거나, 타인을 치료하는 데 사용하는 등등은 5단계의 기술이었다.
6단계는 불확실하지만, 오러를 이용한 특수한 힘을 갖게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공간을 부숴 버리거나, 오러로 이루어진 검을 휘두르거나, 사물의 구조를 분해시키거나.
‘그런데 난…….’
인한은 그런 걸 할 수가 없었다.
보통 마나 스킬의 단계가 오르면 할 수 있는 것들이 머릿속에 입력되듯 떠오르기 마련인데, 그런 것이 없었다.
무언가 다른 깨달음이 필요한 걸까.
-오러를 통해 세계의 흐름에 관여하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6단계에 대한 실마리로 알려진 말이 이것이었다.
특이하기 그지없었던 발터, 레오, 박철환에 비해 평범한 데다 어느 정도 미디어에 노출되기까지 했던 리셴이 했던 말이었다.
리셴의 기술은 심검(心劍)이라고 불렸다.
마음이 닿는 곳, 벨 수 있다 여기면 무엇이든 벨 수 있는 절대의 검.
이것을 펼친 후에 리셴은 신검이란 칭호를 얻었다.
한 미디어에서 공간 관련 스킬이 아니냐는 질문에, 리셴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위에 했던 말을 내뱉었다.
‘세계의 흐름이라.’
인한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설마?’
인한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오러를 피워 올렸다.
후욱!
인한은 그 세계에 집중했다.
모든 힘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찰나의 시간이 무한히 늘어난 듯 느껴지는 세계.
먼지의 모양조차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감각이 벼려지며, 무엇이든 인한의 통제하에 놓이는 곳이다.
‘애초에 이곳은 뭘까?’
레오는 이게 그리 대단할 것 없다고 말했다.
힘의 경지가 어느 순간에 다다르고, 씨앗이 있을 때 펼쳐지는 것이라고.
우웅!
이 세계에는 백색의 실선이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어떤 선은 힘의 흐름이다.
이 세계에 있는 수많은 힘들의 흐름이 가시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건 애초에 뭐지?’
때때로 인한의 인식이나 성장에 따라 선은 사라지기도 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인한은 천천히 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초점이 흐려진 인한의 눈이 멍하니 백색의 선으로 향했다.
그 순간.
-준비가 끝났다.
화악!
위그라노아의 말이 인한을 일깨웠다.
인한이 눈을 껌뻑였다.
백일몽에라도 빠진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괜찮나? 감각이 흐트러진 것 같다만.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건 그렇고 뭐라고?”
-추적이 가능해졌다. 동시에 같은 층에 있게 되면 내가 알려주마.
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날 때 한 층씩 돌아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도 의문투성이로군.’
박철환.
자신의 밑에 있었건만, 돌이켜 보면 인한은 그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박철환에게도 어떤 특별한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회귀자, 그도 아니면 미래를 보는 능력.
씨앗을 보유하고 있다면 가능할지 모른다.
아니면 어떤 상상하지 못할 맥락의 힘이거나.
애초에 박철환은 인한과 마찬가지로 랭킹에도 등록되어 있지 않다.
우웅!
국제 전화용으로 새로 개통해 두었던 스마트폰이 울렸다.
“뭐야 이게?”
영어로 적혀 있는 문자를 보고는 인한이 눈가를 찌푸렸다.
-날세. 잠깐 보지. 1층 물의 마을에 있는 맥의 술집으로 오게.
리 쉔펑이었다.
간단한 문장이었기에 금방 해석할 수 있었다.
인한은 고개를 갸웃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인한은 일단 2층으로 향한 다음, 땅의 돌을 통해 물의 마을로 들어갔다.
인한이 첫 등록한 1층의 마을이 시작의 마을이기에, 처음 탑에 들어오면 시작의 마을로 나오게 되기 때문이었다.
인한은 사람들에게 물어서 맥의 술집이란 곳을 찾아갔다.
“왔군.”
칵테일 바와 같은 모습의 내부였다.
인테리어에 상당히 공을 들였는지 어둑한 술집에 은은한 조명이 퍽 잘 어울렸다.
리 쉔펑은 서너 명의 사내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참고로 술값은 자네가 내게. 원래 사장님이 내는 것 아니겠는가?”
“……예?”
“돈 많지?”
“…….”
뻔뻔하게 킬킬대며 웃는 리 쉔펑을 보며 인한이 어색하게 웃었다.
“중간 보고 겸, 부탁할 겸 불렀네. 설마 정말로 아무런 터치를 안 할 줄은 몰랐거든.”
“보고는 서류로 받고 있습니다.”
“아직 우리도 정리가 안 됐는데 서류를 어떻게 만들란 말이야. 자, 자, 앉도록 해. 일단 소개를 하지. 이쪽은…….”
소개가 끝나자 리 쉔펑이 말을 이었다.
“재밌는 걸 발견해서 말이야. 그래서 자네를 이렇게 얼른 불러낸 것일세.”
“재밌는 것이요?”
리 쉔펑이 힐끗 옆에 앉은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정장이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특히 올백으로 넘긴 백금색 머리카락과 맑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그는 사람들끼리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홀로 입을 꾹 닫은 채 술잔만 기울이고 있던 사람이었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다기보다는 사색이 깊은 사람인 것 같았다.
“아직 완성되지도 않았고, 뒷받침할 증거도 부족하네. 그런데 설명하라 이건가?”
“그야 자네가 이 친구에게 돈을 받고 탑을 오르고 있지 않은가? 자네 연구진들 돈 대 주는 것도 이 친군데? 거기다 그 호위도 이 친구 부하들이고.”
“…….”
“우리한테 이미 다 얘기해 놓고 왜 그러는가. 얼른 말하게.”
“이해할지 모르겠군.”
“어허! 하버드에서 자네 강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데, 잘 설명해 보게. 일반인도 알아듣도록.”
사내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인한을 바라보았다.
분명 마력 한 점 느껴지지 않는 일반인이건만, 눈빛에 서려 있는 기세가 만만치 않았다.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중력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네.”
사내는 잠시 생각을 하는 듯 고민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상대성 이론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예, 어느 정도는.”
그래도 복잡하게는 모르고 있다.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느낌만 파악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차원에 대해 자네는 알고 있는가?”
“1차원 2차원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거면…… 네, 알고 있습니다.”
점은 1차원. 그걸 무수히 늘린 면은 2차원. 그 면을 무수히 늘려 3차원이 된다.
“그럼 시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간 말씀이십니까? 절대적인…… 신도 건드릴 수 없는 뭐 그런 것 아닙니까?”
“조금 다르네. 3차원이 2차원 세계를 무수히 늘려 완성된 것처럼, 4차원도 3차원 세계를 무수히 늘려 완성된 세계라 생각해 보게. 즉, 이 세계에서 공간이 하나의 좌표인 것처럼 시간도 하나의 고정된 좌표에 불과한 것이라고. 우리는 3차원 세계의 존재이기에 인식하지 못할 뿐,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사실 환상에 가깝네.”
“예? 그게 무슨…….”
지금껏 인한이 알던 것과 상당히 다른 이야기였다.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보면, 질량이 있는 물체 주변의 공간은 그 질량으로 인해 휘기 마련이네. 즉 중력은 시공간을 뒤틀 수 있지. 혹 그런 얘길 들어 보았는가? 목성에 들어갔다 나온 후에 지구로 귀환하면, 엄청난 시간이 흘러 있다고.”
“아, 네. 들어 본 것 같습니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던 이야기였다.
“그렇듯 시간은 절대적이지 않네. 저 하늘에 떠 있는 인공위성은 지구의 중력의 영향을 받아서 미세하게 시간이 다르게 흐르고. 또…….”
그 뒤로 그는 몇 가지 예시와 간단한 설명을 하며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그런데 이걸 설명해 주시는 이유가 뭐죠?”
“안 그래도 본론으로 들어가려 했네. 많은 사람들이 탑을 이계와 연결된 통로라고 여기지.”
“예, 실제로 그렇습니다.”
“맞네. 그런데 단순히 그런 곳만은 아니야. 내 생각에 이 탑은 공간만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야. 이곳의 중력은 지구보다…… 음, 이 얘기는 조금 멀리 갔나. 하여튼 이곳에서 나는 상대성 이론을 뒷받침할 사실을 발견했네.”
사내는 목이 마르는지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는 1층, 13층, 21층을 분석하며 재밌는 사실을 깨달았네. 이 세 층이 같은 세계라는 사실을 말이야.”
크게 놀라운 건 아니다. 아발론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게 재밌는 게 아니야. 여기서부턴 내가 설명하지. 그 층 말이야…… 같은 세계이긴 한데, 시간대가 달라.”
“예?”
리 쉔펑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걸 봐 보게.”
리 쉔펑이 품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작은 풀 조각들이었다.
“1층 전역에 펼쳐져 있는 잡초라네. 독성을 가지고 있는 데다, 특이한 성분을 포함하고 있어서 엄청나게 빠르게 자라지. 물이 없어도 자라고, 햇볕을 못 받아도 자라네. 그야말로 슈퍼 잡초지.”
리 쉔펑이 이번에는 돌조각 하나를 꺼냈다.
“이건 13층. 지층이 도출되어 있는 바닷가에서 캐내 온 것이라네.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지. 지구에는 없는 원소로 이루어져 있네.”
“이걸 왜 보여 주시는 겁니까?”
“그 돌 말이야, 그 잡초들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걸지도 몰라.”
“예?”
“그 최고의 증거가 이거지. 이걸 발견한 건 저놈의 힘이 컸어.”
자신을 지질학자라 소개했던 남자가 당당하게 가슴을 쭉 펴며 술잔을 들었다.
“화석이라네. 지층에서 발견했지. 천문을 확인하게.”
인한이 돌조각 하나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몬스터 오크의 화석]
[오랜 옛날 필드에 자랐던 참나무의 화석입니다.]
“……!”
몬스터 오크.
1층 시작의 마을 근처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나무다. 히든 던전 고대인의 도피처의 입구이기도 했다.
“이 세계는 식물의 성분부터가 우리 세계와 달라. 썩기 쉬운 나무와 풀이 또렷한 모습을 갖춘 채 화석으로 남아 있었지. 아마 그 마나라는 것의 영향일 터.”
리 쉔펑이 서류를 꺼내 인한에게 내밀었다.
“1층과 13층과 21층. 이 세 지역에 걸쳐 있는 지각, 환경, 등등을 분석한 내용일세. 맥락이 맞아. 아직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이 세 층은 시간대가 다른 같은 세계라는 게 내 생각일세.”
리 쉔펑이 시선을 돌려 설명을 하던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검은 탑. 단순히 차원을 연결하는 통로가 아닐세.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하나의 쐐기에 가까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