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
<공략자들 188화>
“그것뿐인가?”
레오가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장은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설마 뒷조사한 것을 알아채신 것인가.’
장은 혹시 몰라 레오에게 사람을 붙였다.
뒤를 밟지는 않고, 각 층의 땅의 돌에 상주 대기시켜서 층을 오를 때 자연스레 마주칠 수 있게끔 한 것이다.
애초에 미행을 하면 바로 들킬 게 분명하기 때문에 택한 방법이었다.
“죄송합니다!”
장이 번뜩 외치며 몸을 수그렸다.
거의 오체투지에 가까운 자세로 몸을 낮춘 장이 덜덜 떨며 입을 열었다.
“실은 사람을 붙였습니다!”
“……어디까지 봤지?”
“박철환, 클라우스와 함께 다니신 것까지 봤습니다. 그러나 37층까지는 해당 층에 도달한 부하가 없어서 따라붙지 못했습니다.”
레오의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레오, 아니, 인한이 이를 바득 갈았다.
‘그게 박철환이었던 건가.’
정체를 알 수 없었던 검사.
엘프 전사들을 몰살시킨 자.
듀란과 일란을 죽인 자.
그게 바로 박철환이었다.
‘거기다 어떻게 클라우스가?’
분명 평생 걷지도 못하게 됐을 터다.
그건 회복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뼈나 근육이 끊어진 게 아니라, 힘줄을 끊어 놓았으니까.
그뿐 아니라 상당히 공을 들여 육체를 무너뜨렸다.
기껏해야 팔이나 움직이면 다행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가 회복했다고 한다.
화악!
절로 살기가 일어났다.
박철환, 레오, 클라우스.
셋이 같이 움직인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가 까다롭기 그지없는 놈들이 대체 왜!
“……그 외에 또 알고 있는 것은?”
장이 흠칫 놀랐다.
갑작스러운 살기는 모든 걸 짓눌렀다.
한순간, 뒤를 캐고 다녔다는 사실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그 외에 알고 있는 것은 어, 없습니다.”
하지만 레오는 코웃음을 쳤다.
“너라면 박철환과 클라우스, 그들의 뒷조사를 한 게 분명 있을 텐데?”
“……예, 그렇습니다.”
“지금, 있나?”
“드리겠습니다.”
장이 고개를 들어 인벤토리를 움직였다.
곧 장의 손에 서류가 들렸다.
“여기 있습니다. 혹시 언제라도 필요로 하실까 싶어 미리 준비해 놓았습니다.”
레오는 서류를 받고 한 장씩 넘겼다.
[박철환]
[나이 : 31]
[랭킹 : 없음]
[국적 : 대한민국 강원도 원주 출생.]
[2차 몬스터 웨이브에 휘말려…….]
……
[달의 검을 탈퇴 후 솔로로 움직이기 시작.]
[하위권 랭커였으나, 어느 순간 랭킹에서 벗어남.]
[씨앗 보유자로 추정.]
[시작의 신전 5단계 공략자로 추정. 획득 마나 스킬은 정체불명.]
……
[최근 비밀리에 몇몇 팀과 솔로 헌터들에 접근하고 있음.]
서류에는 인한이 아는 정보도 있었고, 몰랐던 정보도 있었다.
인한은 빠르게 훑어본 후 다시 레오에게 물었다.
“우리가 마지막에 만난 거나 연락한 것이 언제였지?”
“몇 개월 전이었습니다.”
“내가 그때 했던 얘기를 반복해 봐.”
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아직도 나를 의심하고 계신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심하다.
애초에 장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오히려 그걸 즐기는 편이다. 이렇게 추궁하는 편이 아니다.
“다른 생각이라도 하고 있나?”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그때 분명 주인님께서는 제게 이 서류를 맡기며 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서류를 받아 든 인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해태 길드의 인적 사항이 적힌 서류였다.
두꺼운 서류철에는 일반 길드원과 간부의 특징, 성격, 랭킹 등등 수많은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인한은 그 서류를 정령술로 태워 버렸다.
“거래 내역이나 각종 서류나 파일 등은 어디에 저장하지?”
“여기에.”
장이 자신의 노트북을 넘겼다.
“의뢰금을 받는 계좌와 간부들의 연락망도 주길 바란다.”
장이 표정을 굳혔다.
워낙 씀씀이가 큰 레오지만 대놓고 돈을 요구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주인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
“여기…… 있습니다.”
장은 레오가 요구한 것을 넘겨주면서도 계속 혼란스러웠다.
뭔가 이상하다.
그런데…… 뭐가 이상한지를 알 수가 없었다.
장은 몇 개의 통장과 서류, 그리고 드루이드의 인형이 담긴 가방을 내밀었다.
“자, 잠깐! 하나만 더 묻겠다.”
말투가 또 바뀌었다.
“대형 몬스터를 테이밍하거나, 몬스터 테이머로서 높은 경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게 무슨……?”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목소리가 중첩되며 울려 퍼졌다.
“너! 뭐 하는 짓이야?”
“아니, 형님. 이제 끝이라면서요! 그럼 이왕 정리할 거, 저한테 콩고물이라도…….”
“이제 넌 나가라. 쟤네도 데리고 가고.”
레오의 목소리가 몇 개나 울려 퍼졌다.
‘대체 이게 무슨?’
장의 표정이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졌다.
곧이어 레오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너에게 알 수 있는 건 여기까지로군.”
“예?”
장이 이해할 수 없는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분명 레오의 얼굴이다.
그런데 표정은 레오가 지을 만한 것이 아니다.
위화감이 증폭된다.
의심이 끝 모를 정도로 치솟고, 몽롱하던 정신이 다시 되돌아왔다.
“큭!”
깨질 듯한 두통에 장이 신음을 흘리며 팔로 땅을 짚었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나왔다.
심장이 불길할 정도로 크게 뛰었다.
장은 구역질을 할 것 같은 기분을 참으며, 힘겹게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레오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그곳에 서 있던 것은 레오가 아니었다.
자욱한 안개를 휘감고 있는 최인한.
분명 죽었을 그가 앞에 서 있었다.
“어떻…….”
“지옥에 가서 네가 몬스터를 이용해 씹어 먹은 사람들에게나 물어봐. 그리고, 쉽게 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최대한 길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죽을 테니까.”
인한이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이 다가온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육중한 고통이 안면에 느껴지고 있었다.
“하아아…… 나도 좀 쓸 만한 몬스터 얻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한숨을 푹 내쉬는 이창훈을 본 인한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기분 푸십시오, 팀장님.”
“예, 맞습니다. 저런 개새끼가 익힌 걸 얻어 봤자 기분만 나쁩니다.”
“……그렇지?”
인한은 사람의 개입이 없게 하기 위해 40층 필드의 안전지대로 이창훈과 두 길드원을 부른 것이었다.
그때였다.
“끄으으으아아아아악!”
섬뜩한 비명 소리가 동굴 내부에서 뿜어져 나왔다.
표정이 절로 찡그려졌지만, 이창훈의 눈빛엔 오히려 살기가 흘러나왔다.
‘저 새끼…….’
킬러 조직 헬 하운드의 실질적인 대장.
놈이 레오에게 정보를 넘겼고, 사람들을 움직여 길드를 쳤다.
길드원이 죽고 다쳤다.
같이 일하고 먹고 마시던 동료들이다.
이름도 알고, 가족 사정까지 안다.
동료의 장례식장에 갔을 때, 이창훈은 피눈물을 흘렸다.
“쯧!”
이창훈이 혀를 차고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안전지대 안쪽에서 인한이 걸어 나왔다.
“아, 형님. 끝났습니까.”
인한이 이창훈을 째려보며 말했다.
“그때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하라는 거냐?”
“아뇨. 뭐, 그렇긴 한데…… 저는 누구한테 물어볼 사람이 없잖아요. 그나마 마법사 카테고리라도 특수하기도 하고…… 어어, 형님, 그거 주먹 왜 드십니까? 죄송합니다. 제 실수였습니다. 살려 주세요!”
인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이창훈을 타박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끝낼 타이밍이었고, 이창훈의 답답함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럼 슬슬 나가서 회식이나 하자.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냐? 휴식 시간에 불러냈으니까 비싼 거 사 주마.”
“한우! 한우 먹읍시다!”
이창훈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그래, 가자.”
인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인한과 이창훈, 그리고 두 명의 길드원이 떠난 자리.
안전지대의 안쪽에 새빨간 피 웅덩이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다.
그 웅덩이 속, 고깃덩어리 하나가 꿈틀대며 움직였다.
“쿨, 럭…….”
아주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그 생명은, 한동안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다가 끝내 그 신음마저 흘리지 않게 되었다.
* * *
인한은 망령들에게 향했다.
“또 오셨군요.”
“이번엔 사러 온 것이 아니라 거래를 하러 왔습니다.”
“그러시다면 이쪽으로.”
백인은 인한을 와인 창고로 안내했다.
와인 창고의 문이 닫히자 백인 사내가 인한을 바라보았다.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인한은 드루이드의 인형이 담긴 가죽 가방을 인벤토리에서 꺼냈다.
“헬 하운드의 간부 전원과 연결된 드루이드의 인형입니다.”
백인 사내의 눈이 빛났다.
“모두 죽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일일이 찾아다니며 움직이기엔 시간도 아깝고, 가능할지도 모르겠더군요.”
“이번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군요. 10만 달러로 충분합니다.”
수십 명의 킬러를 죽이는 일이건만, 사내는 어렵지 않다고 말했다.
그 정도의 무력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무력이 아닌 무언가인가.
사내의 말에 인한이 고개를 저었다.
“말했지만, 거래를 위해 왔습니다.”
“그걸 팔 생각이시라면, 굳이 저희 쪽에서 구매할 의사는 없습니다. 저희에겐 쓸모없는 것이니까요.”
“이걸 원하는 자들은 꽤 있을 것 같습니다만? 양도하겠습니다.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시죠. 대신, 확실하게 놈들이 죽는 것을 원합니다.”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후후.”
사내가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웃음을 흘렸다.
지금껏 지었던 영업용 미소가 아니었다.
“영리한 손님은 재미있는 법이지요.”
“승락입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한은 짧게 숨을 내쉬고, 물었다.
“방법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사실 이것도 밝히면 안 되는 정보이지만 앞으로 손님과의 좋은 관계를 위해 특별히 말씀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작 짧은 말 몇 마디였지만, 은근히 인한에게 빚을 지우는 듯한 말투였다.
만만치 않은 상대다.
인한의 표정이 굳었을 때, 사내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희 쪽과 연결된 사람 중 DHS의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DHS?”
처음 들어 보는 조직명이었다.
“국토안보부(Department of Homeland Security)라고 하지요. CIA나 FBI와는 달리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지 않는 조직이라 잘 모르실 텐데, 대테러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911 당시 만들어진 조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DHS는 왜 말씀하신 겁니까?”
“요즘 DHS의 가장 큰 화두는 헌터입니다. 폭탄 하나보다 헌터 한 명이 더 큰 위험을 가져오는 세상이기 때문이지요.”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인한은 사내가 무엇을 하려는 지 알아챘다.
차도살인이다.
헬 하운드가 테러를 생각하고 있다는 식의 정보를 흘리면 된다.
애당초 목적도, 이유도 불분명한 킬러의 연합인 헬 하운드다.
그런 그들이 세계의 경찰이라고 불리는 미국에게 적대감을 표현한다면, 갑작스럽긴 하지만 충분히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망령들은 드루이드의 인형을 사용해 정보료를 챙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랭커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랭커는 얕볼 존재가 아니다.
인한 정도나 되니 랭커를 쥐락펴락하는 것이다.
피해 없이 랭커를 잡으려면, 적어도 동 실력의 랭커 둘은 필요하다.
“걱정하지 마시죠. 개의 실질적인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자와 하위 조직들이 괴멸한 상태가 아닙니까. 병들고 다친 개를 잡지 못할 정도로 그들이 무능하진 않을 것입니다.”
“…….”
개의 실질적인 주인, 즉 장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인한이 필요로 했던 정보와 가져온 드루이드의 인형을 생각하면 어렵지 않게 장이 죽은 걸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정보를 가지고 온 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거기까지 생각을 했을 줄이야.
‘계속 긴장하게 되는군.’
놀라진 않았다지만, 역시 만만히 볼 조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시겠습니까?”
“그러도록 하지요.”
인한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사내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손님을 가려서 받지 않네.”
이곳에 올 때마다 듣는 얘기다.
갑작스레 하대로 변한 것도 이젠 놀라지 않았다.
아마 이 사내는 인한의 정보를 이용해 이득을 볼 생각이다.
그리고, 인한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부디, 그렇게 해 주시지요.”
인한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나갔다.
레오를 향한 선전 포고다.
팔다리가 잘리고, 자신의 장난감들이 괴멸당했다.
아무리 관심이 없다지만, 놈이 과연 아무런 액션도 취하지 않을까?
‘네놈을 찾을 수 없으면 오게 만들어야지.’
레오는 분명 인한을 찾아온다.
그리고 그때, 긴 악연이 끊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