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공략자들 186화>
인한은 시작의 마을 뒷골목으로 향했다.
어둑한 술집에 들어서자, 체구 좋은 러시아계 백인 사내가 눈을 빛냈다.
“와인 한 병 주십시오.”
“생각보다 일찍 오셨군요. 아직 숙성이 덜 됐는데…… 한 30일 정도는 더 지나야 합니다.”
“어떤 부분이 숙성이 덜 된 겁니까?”
“세밀한 맛이 없습니다. 지금은 아직 은은한 향이 나질 않을 겁니다.”
인한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상관없습니다. 나머지 값은 이걸로 치르죠.”
술값을 내는 데 인한이 내민 것은 A등급의 칠각석이었다.
공식적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각석 중 가장 높은 등급의 각석이 B등급의 육각석인 것을 떠올리면, 상상하기도 힘든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음, 그럼 바로 가져오도록 하죠.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내는 자연스럽게 각석을 받고는 카운터 뒤쪽으로 향했다.
잠시 뒤, 사내가 종이 봉지에 작은 와인병을 담아 인한에게 내밀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손님을 가려서 받지 않네.”
사내의 말에 인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뭐라고 대꾸하지 않고, 낚아채듯 종이 봉지에 담긴 와인병을 받으며 술집을 빠져나갔다.
인한은 술집에서 조금 떨어진, 인적 드문 곳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적당한 곳에 멈춰 서서 종이를 뒤집었다.
거기에는 마력을 사용해 안력을 높이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글자로 그린 암호와 인터넷 주소가 적혀 있었다.
콸콸콸! 툭!
다음으로 와인이었다.
술을 모조리 땅바닥에 쏟아 버리자, 비닐에 쌓여 있는 USB가 땅에 툭 떨어졌다.
인한은 그것들을 챙겨 인벤토리에 넣어 놓고 바로 탑을 나섰다.
한국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어딜 가도 최고질의 무선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탑 근처 카페에 들어간 인한은 노트북을 꺼내 종이 봉지에 적힌 주소에 접속했다.
그러자 백색의 화면에 암호를 입력하는 창 하나가 나타났다.
그 암호마저 입력하자, 백색의 창 하단에 다운로드할 수 있는 첨부파일 하나가 있었다.
인한은 첨부 파일을 저장한 후, USB를 꽂았다.
USB 안에 들어 있는 것은 10기가가 넘는 실행 파일 하나뿐이었다.
인한이 그 파일을 실행하자, 연결 프로그램이 떴다.
인한은 사이트에서 다운받았던 첨부 파일을 그대로 올렸다.
우우우웅!
수많은 문자가 휙휙 떠올랐다 사라지고, 이내 몇 가지 문서가 나타났다.
[레오 뒤보아]
[장 플뢰르]
[헬 하운드]
……
문서를 살펴보며, 인한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 * *
레오에 의한 해태 길드 습격 사건.
길드원이 죽고 다친 일이었다.
아무리 레오가 신출귀몰하고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다지만 가만히 있을 인한이 아니었다.
인한은 이정환과 2주를 기약한 뒤, 하루 정도를 현상 수배가 잡힌 거물급 킬러들을 사냥했다.
세 명을 잡아서 고문을 했지만, 그들을 통해 얻어 낸 정보는 있으나 마나 한 것들뿐이었다.
시간 낭비라는 것을 직감한 인한은 방법을 바꿨다.
이런 쪽 일에 있어서 특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탑에 존재했다.
‘알고 계신 정보 조직이 있으면 소개시켜 주십시오. 특정 국가나, 조직과 연결이 없는 독자적인 정보망을 구축한 놈들이어야 합니다.’
무작정 김만춘에게 찾아간 인한은 그렇게 말했다.
김만춘은 양지에서, 그것도 오성 그룹의 밑에서 검은 탑 관련 사업을 진행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음지의 일에 대해 많은 부분을 알고 있었다.
김만춘의 소개로 몇몇 조직을 거치고, 또 거기서 소개를 받아 거치고 거쳐 향한 곳이 바로 그 사내가 있던 술집이었다.
조직명, 망령들.
구소련의 잔재라는 소문이 있는 그들에게 거액의 금액을 지불한 인한은, 킬러들의 추격과 관련 정보를 부탁했다.
그들은 2개월에서 3개월 정도의 시간을 말했고, 그들에게 일을 맡긴 인한은 다시 탑을 올랐다.
그리고 넬레바나의 참상을 인한이 확인했다.
본래라면 완성된 정보를 받을 날까지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하지만 일이 바뀌었다.
기다릴 수 없었다.
인한은 노트북으로 보았던 정보들을 떠올리며 다시 탑으로 향했다.
4년 전, 킬러 조직 헬 하운드가 붕괴했다.
헬 하운드는 원래 그다지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조직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조직 말단에서부터 시작된 붕괴는 빠르게 전체로 번져 나갔다.
그리고 지금.
몇몇 간부들을 시작으로 킬러들이 다시 한 번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긴가.’
한인 타운을 돌아, 차이나타운이 있는 곳.
도저히 탑 내부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건물이 가득한 거리였다.
작은 도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인한은 그 거리의 골목길로 숨어들었다.
헬 하운드는 이전과 달리 거대 조직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무의 뿌리와 같은 점조직 체계를 만들어 내고, 돈을 받고 의뢰를 해결해 주는 방식으로 변했다.
사실 헬 하운드뿐만이 아니라, 많은 음지의 조직은 보편적으로 이런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마피아나 갱, 일본의 야쿠자나 중국의 삼합회 같은 조직들도 자체적으로 헌터를 육성하며 이쪽으로 사업의 규모를 넓혀 가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헬 하운드는 규모와 전력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쪽 세계에서 상당한 신뢰를 받고 있는 데다, 한번 맡은 의뢰는 끝까지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거기까지 떠올린 인한의 표정은 어느새 굳어져 있었다.
‘……설마 검은 칼도 그 자식들이 잡은 거였다니.’
검은 칼, 카일.
랭킹 21위 헌터로서, 회귀 전에도 제법 이름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인한이 영입하려는 헌터 중 하나였는데 갑작스럽게 실종되는 바람에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설마 그런 실력자가 킬러에게 살해당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리천센, 오오츠카, 크롬, 맥스, 락키…… 켄드릭도 있었지.’
익숙한 이름이 몇 개나 존재했다.
회귀 전, 쟁쟁한 이름을 날렸던 헌터들, 랭커로서 이름을 날리게 될 자들이 이상할 정도로 많이 제거되었다.
‘일단 빠르게 움직여야겠군. 손님을 가리지 않는다는 건…… 분명 놈들에게도 내 정보를 팔았다는 거다.’
술집에서 사내가 했던 말을 되새긴 인한은 굽이굽이 뻗어 있는 골목길을 따라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그리고 거리로 빠져나왔을 때, 공기가 확 바뀌는 것을 느꼈다.
음산하고 어둑한 곳이었다.
바로 골목길을 빠져나가면 보이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풍경과는 극명하게 대비됐다.
흉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인한을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이 거리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팔망궁’이라 이름 붙은 상점 문에 인한이 손을 얹은 순간이었다.
“어이, 여긴 왜 찾아왔지?”
민머리 사내 하나가 껄렁대며 인한에게 다가왔다.
인한은 사내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상대와 자신의 파악하지 못하고 공연히 시비를 걸려는 놈이다. 상대하는 건 시간 낭비다.
퍼억!
손을 쓸 것도 없이, 마력을 휘둘러 날려 버렸다.
민머리 사내는 그대로 기절했다.
끼익!
인한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빨간색 기조의 인테리어를 하고 있는 상점의 내부는 음산했고, 공기에서는 향신료의 냄새가 났다.
“처음 보는 얼굴이군. 무슨 일로 찾아왔지?”
상점의 구석, 골동품이 수북이 쌓여 있는 카운터에서 한 중년 사내가 물어 왔다.
암구호 같은 걸 물어보려는 수순일 터다.
하지만 대답할 생각은 없다.
“들을 게 있어서 왔다.”
퍼억!
뚜벅뚜벅 걸어간 인한이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사내는 그대로 뒤로 튕겨져 날아가 골동품과 함께 땅에 널브러졌다.
주위를 슥 둘러본 인한의 감각이 내부에 있는 이들을 찾아냈다.
‘지하에 2층, 입구는 저쪽이고, 열 명 정도인가. 바로 도망치기 시작하는군.’
모조리 파악을 끝낸 인한이 지면을 향해 발을 한 번 굴렀다.
콰앙!
지면이 와르르 무너지며 어떤 방으로 내려앉았다.
“뭐야!”
굳이 입구로 침입해야 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바로 밑에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굳이 돌아갈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퍼억!
단숨에 제압한 인한은 다시 몸을 날렸다.
숨겨진 통로를 통해 도망치려는 놈들의 움직임이 체계적이었다.
훈련을 받았거나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다는 소리였다.
화악!
지하 1층의 네 명, 지하 2층의 나머지 여섯 명.
인한이 그들을 포획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초에 불과했다.
인한은 기절한 놈들을 하나하나 질질 끌고 지하의 커다란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끼이이익!
인한의 손에 의해 천천히, 방의 문이 닫혔다.
* * *
점조직은 즉, 명령을 받는 자는 명령을 하는 자를, 명령을 하는 자는 명령을 받는 자만 아는 구조라는 것이다.
‘점조직이든 뭐든, 결국 이어지겠지.’
인한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망령들이 준 정보에는 중간 관리자의 신원밖에 알려져 있지 않았다.
철저하게 점조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정확한 조직 규모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중간 관리자를 잡고, 또 위로 올라가면 된다.
그렇게 올라가다 보면 분명 레오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다.
킬러 지부에서부터, 수상한 일을 하고 있는 조직까지 인한은 닿는 대로 모조리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점조직은 정체를 들키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을지 모른다.
철저히 하위 조직들 사이의 교류를 없앨수록, 윗선의 정체는 들키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말은 즉, 각개격파 당하기 딱 좋다는 의미.
“크억! 이 자식 뭐야!”
시작의 마을에 있는 킬러의 의뢰 창구 5곳부터 시작해서, 땅의 마을, 물의 마을, 산의 마을…….
1층에 위치한 킬러들의 은신처들을 있는 대로 부숴 버렸다.
각 마을의 중간 관리자는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놈들이었다.
물론 그래 봤자 해태 길드의 일반 길드원도 안 되는 실력.
인한은 그들을 단번에 제압해 정보를 뜯어냈다.
조직에 대한 애정 같은 게 없기 때문일까.
의외로 놈들은 쉽게 정보를 토해 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일정 선까지 올라가자 힘들어졌다.
좀 높은 위치에 있는 킬러들은 갖은 방법을 써서 고문을 해도 정보를 내놓지 않았다.
그런 놈들을 겁준 것은 의외로 용언이었다.
마법과 닮아 있는 그 기술을 보며, 사람들은 제멋대로 인한을 마법도 다룰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다.
“미안하지만, 난 히든 클래스 네크로맨서도 익힌 사람이야. 널 몬스터로 만들어서 평생 탑을 방황하게 할 수도 있지.”
그 말에 남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인한은 남자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걱정하지 마. 헌터가 잡기 전까지는 정신은 깨어 있을 거니까.”
그런 초급적인 협박이, 의외로 통했다.
“매, 매번 거주지를 바꿉니다. 얼마 전까지는 물의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럼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3분 주지.”
그는 장 플뢰르의 현재 위치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그저 장 플뢰르가 한 달에 한 번, 일정한 주기로 거주하고 있는 장소를 옮긴다는 것 정도만 토해 냈다.
그리고 명령의 하달도 드루이드의 인형을 통해서만 하며, 간부급이 아닌 이상 연결되어 있는 인형도 받지 못한 상태라 했다.
그걸로 충분했다.
인한은 헬 하운드의 간부로 시선을 돌렸다.
* * *
산의 마을, 아직 마을의 형태를 제대로 장 플뢰르가 돌연 미간을 찌푸렸다.
‘뭐지?’
A급 의뢰가 하나 들어온 상황이었다.
A급은 최소 100억부터 시작하는 의뢰이기에 확실하게 해결해야 했다.
일선 관리자에게 인형으로 연락을 돌리던 장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저희 쪽은 인원이 부족합니다.
-저희 쪽도 그렇습니다. 이미 S급 의뢰에 대부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장에게 연결되어 있는 총 열 명의 일선 관리자.
그들은 스무 명의 2선 관리자를 관리하고, 2선 관리자들은 각 지부의 중간 관리자를 선정해 관리한다.
그런데 일선 관리자 중 두 명의 제외한 여덟 명이 연락을 받지 않았다.
아무런 징조 없이, 뜬금없는 상황이다.
불길한 감정을 느끼던 장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간부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라.”
다행히 간부들은 모두 연락을 받았다.
이곳의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은 탑의 초창기부터 함께해 온 간부들, 그리고 레오뿐이다.
그 외의 중간 관리자들은 드루이드의 인형을 통해서밖에 연락을 받지 않는다.
‘누가 우리를 치고 있나?’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그래 봤자 여기까지 올라올 수는 없겠지만, 일선의 관리자들까지는 충분히 쳐 낼 수 있을 것이다.
‘일이 귀찮게 됐군.’
나머지 두 일선 관리자에게 몸을 숨기라고 명령한 뒤, 장은 바로 조취를 취했다.
일단 간부들을 이용해 흐름을 파악해야 했다.
‘설마 최인한?’
일전에 망령들에게서 샀던 정보를 떠올린 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다 해도 여기까지는 오지 못할 것이다.’
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에 담배를 물었다.
그 순간.
툭!
장이 있는 조립식 건물의 옥상에 검은색 코트를 두른 인형이 툭 떨어졌다.
“과연 그럴까?”
그 사람은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