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
<공략자들 185화>
인한의 마력이 다함에 따라, 격리해 뒀던 공간이 해제됐다.
콰아아아!
직후 주위의 눈보라가 몰아치고, 지면을 향해 눈이 쏟아져 내렸다.
금세 눈으로 뒤덮인 지면에서 이정환이 인한과 눈을 마주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인한아!”
길드원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글러트니가 행한 일에서 해방된 모양이었다.
그런 후, 인한과 이정환이 사라진 걸 느끼고는 주위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던 중인 것 같았다.
인한은 긴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허공에 나타난 인한과 이정환을 추궁한 동료들이었지만, 꼭 나중에 대답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그건 이정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계약이야. 미안하지만, 말할 수 없다.
정말 진중한 표정으로 인한에게 고개를 숙인 이정환이다.
그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왜 씨앗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인한은 꾹 참았다.
아침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남짓이었다.
다시 잘 수도 있었지만, 인한은 그냥 텐트 안에 털썩 앉아 글러트니와의 전투에 의한 내상을 다스리기로 했다.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위그라노아가 말했다.
“그를?”
-우리의 세계는 꽤 정교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꽤 상위 위계였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다른 위계의 세계는 어떨까.
“그게 무슨 소리야?”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해 왔다. 만약 독과 병균이 산소의 역할을 하는 세계라면, 혹은 세계의 자원은 극도로 한정되어 있는데 그 주민들은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있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면…….
“그건…….”
병마의 왕과 폭식의 왕을 말하는 것이다.
-문득 의문이 들더군.
위그라노아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금의 왕들은…… 정말 절대악(絶代惡)인 것인가?
* * *
43층의 공략은 수월히 진행됐다.
몬스터 앤트의 표피를 가공한 신발은 상당히 전투에 도움이 됐고, 시간이 흐를수록 길드원 전체의 면역 스킬이 향상되어 추위도 견딜 수 있게 됐다.
“지금 1선 길드들이 38층 돌파했다고 하니까…… 43층 도착할 때쯤엔 이거 불티나게 팔리겠는데요.”
이창훈이 검은 광택이 나는 갑옷을 툭툭 건드리며 씨익 웃었다.
[몬스터 앤트 경갑]
패시브 스킬로 <부상>과 <마찰 계수 증가>가 붙어 있는 아이템이었다.
특허 등록도 착착 진행되고 있으니, 이것도 해태 길드의 주력 상품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래도 이건 재료값이랑 인건비만 받을 거다. 재료도 직접 가져오면 그마저도 안 받을 거고.”
“예?! 왜요?”
대략 50퍼센트…… 아니, 30퍼센트만 마진을 내도 주력 상품의 일부가 될 수 있을지 몰랐다.
43층에서만 사용하지 않고, 물이 많은 필드에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아이템이니까.
하지만 인한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공략법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아이템으론 돈 벌 생각 없어.”
“아니…… 어휴.”
이창훈이 뭔가를 말하려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긴 뭐 그랬으면 지금 돈 더 벌었겠지…….’
해태 길드의 상품 중엔 이런 아이템이 한두 개가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5층의 보스 샌드 크리퍼 공략법 ‘베놈트’나, 11층 필드의 독을 중화시켜 주는 ‘씨그랜의 목걸이’ 등이 있다.
사실 제작법도 이미 해태 채널을 통해 알린 상태고, 오픈 소스로 공개도 했다.
인한이 뿌려 댄 공략에 필요한 아이템은 정말 다양했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라. 어차피 네가 만든 약은 제대로 값을 쳐줄 테니까.”
“……제가 속물도 아니고 저한테 들어오는 돈 아까워서 그러나요. 아쉬워서 그렇지.”
“그만 구시렁대. 이번 일에서 못 느꼈어? 브랜드 이미지의 힘 말이야.”
이정환이 씨익 웃으며 이창훈의 등을 툭 쳤다.
국가적 차원에서 해태 길드에게 쏟아졌던 공격.
하지만 그동안 해태 길드, 그리고 인한이 쌓아 왔던 이미지가 역풍을 만드는 큰 버팀목이 됐다.
“그건 그렇지만…… 어휴, 됐습니다. 뭐 그걸로 돈 안 벌어도 충분히 수익 나오고. 저는 그냥 해태 길드가 훨씬 더 커질 수 있는데 아쉬워서 그래요.”
“그것도 문제없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인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이번에 아이템 하나 개발할 생각이니까.”
“예? 인한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영약을 팔까 생각 중이야. 시제품 제작하려고 36층에 있는 엘프 마을에서 재료도 조달한 거고.”
“예?”
“뭐?”
이번 말에는 이정환도 놀라 했다.
인한과 해태 길드가 떨어져 지냈던 3년간.
인한은 간부들의 마나 스킬이 일정 수준에 도달했을 때 영약을 만들어 먹인 적이 있었다.
“이번 공략 끝나면 한번 준비해 볼 테니까 기대해.”
“오오!”
엘프의 호의에 쓰인 약초 외에도 인한은 몇 가지 준비한 일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양산형 영약이었다.
필요한 재료는 40층 이하에서 다 구할 수 있다.
‘기껏해야 100스테이터스 정도 높이는 거지만…… 수요가 엄청날 테니까.’
탑에 관한 연구가 많이 진행됐지만, 아직 영약과 관련된 연구는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다.
애초에 탑에 있는 물건을 조합해 마력을 높인다는 발상을 한 사람이 없었다.
수억, 어쩌면 한 병에 수십억에서 수백억까지 할지도 모른다.
‘넬레바나…… 거기에 오랜만에 들러 볼까? 거래를 틀 수 있으면 물량을 더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인한은 그런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인한의 그 생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엘프의 마을 넬레바나.
그곳은 이미, 멸망한 상태였으므로.
* * *
43층 보스 몬스터.
설인왕 그란탈이 쓰러지고, 잠시 숨을 고른 길드원들이 일사불란하게 부산물 해체에 들어갔다.
‘솔로 때와는 비교도 안 되는군.’
솔로로 했다면 며칠은 걸렸을 공략이지만, 길드와 함께 손발을 맞추니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이번 공략도 20시간 만에 끝났다.
경이적인 속도.
해태 길드 구성원의 강함과, 팀워크의 힘이었다.
‘아니, 그것만도 아닌가.’
인한의 눈이 누군가에게 향했다.
이토록 빨리 공략을 해낸 데에는 그 무엇보다, 한 사람의 존재가 컸다.
‘이정환, 저 자식. 오래전부터 내가 길드에 들어올 걸 상정하고 진형을 구상하고 있었던 건가?’
이정환.
그는 천부적인 군사(軍師)였다.
인한이 길드에 합류한 순간, 이정환은 갑자기 변형된 진형 구조를 제시하더니 공략에 바로 적용시켰다.
정상적인 진형에서 크게 벗어난, 일그러진 진형 구조.
‘나 하나를 중심으로 길드 전체가 움직이는 진형이라니.’
인형이 눈을 반짝였다.
이 진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 한 명.
바로 인한이다.
인한을 중심으로 길드 전체의 전력이 빠르게 회전한다.
인한이 최전방에서 몬스터와 부딪치고, 후방을 막을 필요가 없어진 임태호와 겐지가 자유롭게 움직인다.
형세를 살필 줄 알고, 유동적으로 움직일 줄 아는 아나스타샤와 이소영이 뒤를 받치고, 후방 지원 팀이 그 모두를 지원한다.
탱커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오직 인한뿐.
인한이 무너지면 길드 전체가 흔들리는 배수의 진이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인한이 무너지지만 않으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때마침 길드의 정비가 끝난 게 보였다.
이정환의 눈짓을 받은 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해태 길드는 또 한 번 위를 향했다.
44층 공략을 진행하기 전, 해태 길드는 한 번의 휴식 시간을 갖기로 했다.
43층의 필드에서 상당한 고생을 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간의 개인 시간을 가지게 된 인한은, 탑을 올랐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스테이터스와 스킬 창을 살펴보고, 기이한 점을 알아챘다.
“뭐지?”
워낙 많은 스킬을 가진 상태였기에 그동안 못 보고 지나갔었다.
필드를 돌아다니며 사냥을 하다 휴식을 취하며, 세계수에 접속해 수련을 하려던 차에 발견한 사실.
엘프의 호의를 통해 얻은 <넬레바나의 가호>.
듀란에게 받아 섭취한 세계수의 열매에서 얻은 <세계수의 정화>.
넬레바나에서 얻은 두 개의 스킬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럴 수가 있나?’
불길한 예감이 느껴졌다.
인한은 쉬지 않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36층, 넬레바나의 입구.
인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결계가 사라졌다.’
그뿐이 아니었다.
곳곳에 파괴의 흔적이 역력했다.
탄 흔적, 잘려 나간 흔적, 거대한 괴수가 지나친 흔적.
‘몬스터?’
결계가 사라진 후, 마을의 외곽 지역에 나타난 몬스터의 모습이 보였다.
빠각!
만티코어의 하위 몬스터가 일격에 쓰러졌다.
인한이 다급히 마을의 내부로 진입했다.
“이게 대체…….”
넬레바나는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숲과 엘프가 공생하고, 아름다운 자연이 안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감싸고 있는 곳이었다.
공기는 신선했고, 분위기는 부드러웠다.
들어서는 사람을 감싸고, 보듬어 주는 힘이 있는 땅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니다.
처절한 파괴의 흔적이 인한의 눈에 펼쳐져 있었다.
엘프들의 거주지인 거대한 나무들은 처참하게 부러져 지면에 뒹굴고 있었고, 지면에는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수십 개의 크레이터가 그려져 있었다.
‘이건…… 발터다!’
침입자가 있다.
최소 수십 명. 아니, 흔적이 이상하다.
난도질당한 흔적이 있는데, 사람이 오밀조밀 겹쳐서 동시에 휘두른 것도 아니고, 이런 상처는 날 수 없다.
‘……레오?’
임태호에게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수십 자루의 검을 오러로 엮어서 사용했다는 이야기.
만약 그랬다면 이 흔적이 납득이 간다.
‘아니…… 더 있어. 이건 마법의 흔적이다! 거기다, 광검술!’
레오, 정체 불명의 마법사, 그리고…… 정체 불명의 검술을 사용하는 자.
흉수는 셋이다.
빠득!
인한이 주먹을 꽉 그러쥔 채,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일란에게서 정령술 교육을 받았던 마을의 공터.
관리되지 않은 그곳에는 잡초가 무성했고, 벌레형 몬스터 한 마리가 내려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수련이 끝나고 몸을 닦았던 온천의 물은 말라 버렸고, 물기가 남아 있는 웅덩이는 썩어 갔다.
엘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던 서고는 무너져 있었고, 마력초와 약초밭은 처참하게 짓밟혀 있었다.
“누구, 누구 없으십니까!”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한 나머지, 인한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소리치며 거주지를 뛰어다니고 말았다.
그리고 두 눈에 참상이 들어왔다.
말라비틀어져, 죽어 있는 엘프 소녀와 중년의 여성.
땅바닥에 쓰러져 구더기가 들끓는 엘프 노인의 시체.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남성과 여성 엘프.
시체, 시체, 그리고 또 시체.
“우욱!”
저도 모르게 구역질이 올라왔다.
인한은 헛구역질을 몇 번 반복하다, 지친 표정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을의 중앙, 그나마 전투의 흔적이 없는 곳에 찾을 수 있는 엘프의 시체들을 모조리 모아 가지런히 눕혀 놓았다.
엘프들은 인간처럼 화장을 하거나 매장을 하지 않는다.
바람에 날려 자연스레 숲과 대지의 일부가 되게끔, 풍장을 한다.
그러나…… 이대로 놔둘 수는 없는 법이다.
툭! 투둑!
인한이 시체들의 중심으로 넓은 범위에 주술을 펼쳤다.
족히 1년은 지속될 결계다.
몬스터를 내쫓지는 못하겠지만, 몬스터의 감각을 속여서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수법이었다.
거의 한나절을 그렇게 작업한 인한은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는 인한의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마을의 중심, 세계수 넬레바나가 있던 곳이다.
밀도 높은 마나와 속성력이 느껴지는, 세계수가 뿌리 내린 성스러운 땅.
“아……!”
그러나.
그 땅은 메말라 갈라져 있었으며, 그 땅 위에 썩어 가고 있는 죽은 거목 한 그루만이 있을 뿐이었다.
인한이 다급히 넬레바나로 뛰어갔다.
핏줄처럼 줄기줄기 뻗어 있는 넬레바나의 뿌리 사이.
인한의 눈에 전사의 복장을 한 엘프들의 시체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정체불명의 검술을 익힌 자.
그자의 소행이다.
뜨겁게 달궈진 쇠꼬챙이에 찔린 듯, 급소에 일격을 맞은 것으로 절명한 시체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그 시체의 숲에서, 깊은 교류를 나눴던 한 여성 엘프와 원로 엘프의 흔적을 발견한 순간.
콰아앙!
분노를 참지 못한 인한에게서 마력이 폭풍처럼 뻗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