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공략자들 177화>
오래전부터 그의 눈엔 길이 보였다.
딱히 초능력자들처럼 선이 보인다던지 허공에 색선이 나타난다던지 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인한이 찾아온 것에 놀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달리기를 할 때, 자전거를 탈 때, 보드를 탈 때, 운전을 할 때,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머릿속에 그리며 움직이게 된다.
영화로 다뤄져서 유명해졌던 운동 중 하나인 파쿠르와 비슷했다.
한 지점에서 어떤 지점까지 가는 길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다.
공간과 사물을 인식하고, 최적화된 움직임을 그리는 것.
그게 그의 눈에 보인 것이었다.
결코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그가 보는 길들은 조금 더 세밀하고, 다양하게 떠올랐을 뿐이다.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운전을 하든…… 매 순간마다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건 절대 특별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비범한 거죠.”
“그럼?”
“마력계에 대해선 아시겠죠?”
“마력로와 마력원을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인들은 대부분 단전과 혈맥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딱히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닌 모양이었다.
“리셴 씨, 보유 마력량이 어느 정도 되시죠?”
“대략…… 180포인트 정도 됩니다.”
180포인트.
그 정도면 2단계는 물론이고 운만 좋다면 3단계에 도달했을 수도 있는 마력량이다.
절대 9층에서 허덕이며, 팀원들의 발목을 잡는 정도가 아니다.
“제가 재능이 없는 것 같더군요. 이 정도로 마력량을 높였는데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조금 가라앉은 인한의 표정을 오해했는지, 리셴이 그렇게 답했다.
“절대 아닙니다. 그 많은 마력이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거죠.”
“다른 곳이라면…… 설마 그 길이 보이는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습니다. 다만, 조금 다르죠.”
리셴이 마력량이 상당하면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이유.
그것은 그의 눈이 그 많은 양의 마력을 잡아먹고 있기 때문이다.
인한이 마력으로 그의 상태를 살펴본 이유는 바로 그 부분 때문이었다.
“설명이 필요합니다.”
“말하는 것보다 보는 게 더 확실할 겁니다.”
인한이 종이쪼가리를 허공에 휙 던졌다. 그리고 허공에 주먹을 뻗었다.
투웅!
미세한 마력이 번져 나갔다.
곧이어,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이가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파공탄의 응용.
마력량을 제어해서 위력을 줄인 것이다.
“따라 해 보시겠습니까?”
“그걸 말씀입니까?”
“예.”
“……굳이 따라 해야 합니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인한의 표정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서렸다.
리셴. 이 비범한 재목.
진흙 속에 감춰진 진주를 누구도, 하물며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파삭!
리셴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인한의 기술을 따라 해냈다.
“했습니다만.”
“어떻게 하신 겁니까?”
“예? 그냥…… 마력로 내부에서 마력을 몇 배 뻥튀기시킨 것 아닙니까? 딱히 복잡한 기예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너무 거친 방식이라 팔이 얼얼하지만…… 이 정도 위력이면 누구나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뇨. 절대 아닙니다.”
상대의 마력 운용법을 보고 바로 따라 한다?
그건 예로 들자면, 음식을 한 번 맛도 보지 않고 재료와 조리 방법을 모조리 알아 버리는 것과 같다.
‘발터, 그라면 가능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 인한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아무리 발터라도 단숨에 모조리 베껴 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게 가능했다면 이미 그는 탑을 끝내 버렸으리라.
“비슷하게 따라 할 수는 있겠지만, 당신은 지금 완벽하게 해냈죠. 적어도…… 제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스킬이래 봐야 기본 검술 하나뿐입니다만.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스킬이 떠야 하는 거 아닙니까?”
“리셴 씨, 당신은 딱히 기술 자체를 베끼는 게 아닙니다. 그 기술을 펼치기 위한 마력 운용법을 알아내는 거죠.”
“마력 운용법……?”
같은 스킬을 펼치더라도, 마력의 움직임에 따라 발생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같은 파공탄도 일점돌파로 예리하게 사용할 수 있고, 넓게 퍼뜨려 방어막처럼 사용할 수도 있는 법이다.
리셴은 영화 속이나 만화 속 주인공들처럼 상대가 펼치는 기술만 보고 모조리 베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순한 마력 운용법에 한해서만큼은 완벽하게 카피해 낼 수 있었다.
“아마 아직 하층에 있는 상황이기에 잘 와닿지 않으실 겁니다.”
위층으로 갈수록 기술과 스킬 등의 복잡함보다는 마력 운용법 자체를 다루는 것이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많은 헌터들이 운용법에 더욱 파고들었었다.
과거, 리셴은 검술의 고강함보다는 오러를 통해 펼치는 오러 스킬들을 단번에 파악해 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헌터들이 박철환과 발터를 그 무지막지한 강함 때문에 상대하기를 꺼렸다면, 레오는 기괴함과 잔인함 때문에 꺼렸고, 리셴은 밑천이 털릴까 봐 꺼려 한 것이다.
“당신의 눈은 요컨대 마력을 보는 겁니다. 그냥 보는 것으로 할 수 있는 거죠. 문제는 아직 하층이라 그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드러나지 않는 겁니다.”
인한의 말에 리셴이 눈을 빛냈다.
잠시 침묵이 길어지고, 리셴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예, 말씀하시죠.”
“그럼 제 재능을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아직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만.”
“그건…… 운이 좋았다고 해 두죠.”
“예?”
인한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입을 닫았다.
‘대답할 생각이 없는 것이로군.’
리셴은 그 미소에 차분하게 가라앉는 걸 느꼈다.
계약서를 보았을 때, 딱히 문제점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애초에 딸을 구할 수 있고 조건도 좋은 것을 보면 절대 그에게 해가 되는 계약은 아니다.
아니, 애초에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답은 정해져 있었으니까.
“하겠습니다. 부디, 제 딸을 잘 부탁드립니다.”
리셴이 자리에서 일어서 고개를 푹 숙였다.
무려 미래의 신검, 리셴이 해태 길드에 들어오게 된 날이었다.
인한은 바로 리셴의 앞에 각석을 내밀었다.
“현금으로 드릴까 했는데, 아무래도 걸리는 게 많아서 말이죠. 오각석과 육각석 위주입니다. 병원비 체납되신 게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걸로 해결하십시오.”
병원비만 내기에는 좀 과한 양이기는 했다. 족히 1억은 될 돈이었으니까.
리셴이 고개를 저었다.
“저를 이토록 가치 있게 봐 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다 받을 수 없습니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가장 등급이 낮은 5각석 하나를 손에 쥔 리셴이 말을 이었다.
“병원비는 이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은인. 필히 이 은혜는 갚도록 하겠습니다.”
리셴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참 담백한 사람이다.
인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셴은 다시 한번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잠깐. 혹시 리 쉔펑이란 사람을 알고 있습니까?”
분명 이 시기라면 리셴과 같이 행동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때의 인연이 시작이 되어, 혈맹에 리 쉔펑이 들어오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예? 아, 팀원입니다. 그런데 그분은 왜?”
“그분도 제 목적 중 하나이기 때문이죠.”
인한의 눈이 빛났다.
* * *
인한이 받아 낸 서류.
그건 회귀 전 시대를 살아왔던 인한만이 알 수 있는 인명록이었다.
박철환은 죽어야 할 자이며, 발터와 레오는 결코 받아들일 수 있는 사내가 아니다.
하지만 아직 두각을 보이지 않은 리셴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 명 더.
탑의 현자, 리 쉔펑.
혈맹 소속의 헌터였던 그는 수많은 연구원들과 함께 탑을 연구했고, 다른 강대국 못지않게 탑의 비밀들을 알아냈다.
현대의 에디슨이라고까지 불리던 사람이 바로 그였다.
“호오, 영입 제안이라? 그리고 자네는 팀을 탈퇴하고 들어가기로 했고?”
“예. 그렇습니다.”
리 쉔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직접 만 담배를 입에 넣더니 훅,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리 쉔펑은 리셴과 달리 시작부터 부정적인 생각을 하며 나섰다.
“난 그냥 프리랜서가 좋아. 연구할 거리는 산더미처럼 있지. 어디에 속하면 휘둘릴 뿐이라네. 이 친구는 진국이니 가져간 것을 타박하지 않겠네만, 난 어디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네. 미안하군.”
“상관없습니다.”
“음? 뭐라고?”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맘껏 하시죠. 돈도 필요한 만큼 대 드리죠.”
“……?”
두 중국인이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밑에 헌터 팀 하나를 붙여 드리겠습니다. 적어도 20층 중반까지는 올라간 놈들입니다. 연구하고 싶은 거 있으면 하십쇼. 끌어들이고 싶은 인재가 있다면 끌어들이시죠. 모든 경비는 제가 대겠습니다.”
“호오…….”
탁!
담뱃재가 툭 떨어졌다.
그의 표정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모르고 있는 것 같네만…… 난 꽤 부자라네. 돈 때문에 이 생활을 하는 게 아니란 소리지. 그리고 지금도 내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엔 충분한 생활이야. 그런데 굳이 날 끌어들이는 이유가 있는가?”
“원하는 걸 모조리 할 수 있는 것과 그저 충분할 정도라는 것에는 분명 차이가 있을 텐데요. 그리고 리 쉔펑 씨께서 흥미를 가질 만한 것들이 제게는 많다고 자신합니다.”
인한이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아직 다 소모하지 않은, 넬레바나에서 얻은 약초들과 몇몇 이파리들이었다.
“이건 수분이 없이 자라는 풀이죠. 주위에 있는 수풀을 잡아먹으면서 성장합니다. 이건 세 가지 종류의 열매를 동시에 자라게 하는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리고 그 자라는 열매의 종류를 정할 수도 있습니다. 사과를 먹이면 사과가 자라고, 배를 먹이면 배가 자라죠. 그리고…….”
인한이 꺼내는 아이템들에 리 쉔펑의 눈이 점점 더 휘둥그레졌다.
인한은 아이템을 모조리 떨어뜨려 놓고, 입을 열었다.
“아직 검은 탑은 의문투성이입니다. 그리고 그 의문에 가장 접근해 있는 건 단연코 해태 길드입니다.”
덜덜 떨리는 리 쉔펑의 눈을 보며 인한이 쐐기를 박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뒤로 3주간.
인한은 거의 쉬지도 않고 계속 검은 탑을 이리저리 뒤지고 다녔다.
그렇게 해태 길드에 하나둘씩 인원이 늘어났다.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자.
이름이 알려졌지만, 혼자서 움직이는 자.
유명 길드가 될 미래를 가지고 있는 헌터 팀.
총 47명에 달하는 사람이 해태 길드에 합류했다.
아무리 영입 제안을 해도 넘어오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간단하게 끌어들인 사람도 있었다.
그중 인한이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것은 리 쉔펑이었다.
무려 탑의 현자라고까지 불렸던 인물.
그가 무엇을 발견할지 기대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하는 인원은 다 데려와도 된다고 했겠지?”
“……예. 그런데 뭘 하시려고?”
“내가 이래 봬도 인맥이 넓은 편이지. 아는 놈들 다 데리고 와서 연구소를 하나 만들어 버리겠어! 크하하!”
호탕한, 아니, 사악한 미소를 터뜨린 리 쉔펑의 말에 인한이 오한에 몸을 떨었다.
물론 돈은 많다. 해태 길드가 벌어들이는 돈이 거의 기업급이다.
인한 개인의 경우엔, 인벤토리에 있는 부산물과 아이템, 거기다 가지고 있는 정보들만 계산해도 수백 억 단위가 될지 몰랐다.
하지만 왜일까.
그 돈이 순식간에 빠질 것 같은 기분은.
* * *
“호오, 대충 이런 느낌이군요.”
인한은 리셴과 탑을 오르고 있었다.
“마력 운용. 흠, 누가 몰라도 이름을 잘 붙였습니다.”
인한이 리셴에게 가르치고 있는 건 간단한 마나 스킬이었다.
그가 저도 모르게 마력을 ‘보는 것’에 소비하고 있기에, 그것을 조절하게 해 주었다.
그 외에도 기초적인 마나와 마력에 대한 기술들, 그리고 운용법을 가르쳤다.
‘괴물…….’
그리고 인한은 리셴을 보며 또 한 번 좌절감을 느꼈다.
인한이 마나 스킬의 기본 지식과 마력 증가에 도움이 되는 약초를 몇 개 정도 먹였었다.
그런데 그 뒤에 리셴은 어느 날 자다가 일어나더니 ‘이렇게 하면 될 거 같은데?’라는 말과 함께 갑자기 마나 스킬 3단계에 올랐다.
‘이러다 밑천 거덜 나겠는데.’
그 뒤로 3단계에 할 수 있는 것들을 가르치던 인한은, 서서히 가르칠 게 줄어드는 걸 느끼며 소름이 돋았다.
리셴과 상대하던 헌터들은 다 이런 기분이었을까.
리셴은 정말 스펀지나 솜처럼,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원래부터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기술을 쌓아 갔다.
“흐음, 그럼 이런 것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날, 11층 던전을 돌고 있는데 리셴이 말했다.
리셴의 마력이 요동친다고 생각한 순간.
리셴이 갑자기 주먹을 들더니 허공에 뻗었다.
“아, 이게 아닌가?”
고개를 갸웃하던 리셴이 마력을 몇 번 끌어 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아, 이거군.”
부웅!
리셴의 주먹이 멋들어지게 허공을 갈랐다.
누가 보면 춤이라도 추는 것으로 보겠지만, 인한의 눈에는 그런 게 아니었다.
‘파검식을 따라 했어!’
권사도 아니고 검사다.
그런데 인한이 몬스터를 상대하며 펼쳤던 기술을 연상시키더니 단숨에 따라 했다.
마력 운용법만 아니라, 움직임까지 따라 한 것이다!
“한번 요령을 파악하고 나니까 쉽군요. 은인. 이 정도라면 격투술에 대한 기본 소양도 익힐 수 있겠습니다.”
리셴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인한에게 다시 한번 목례를 했다.
인한이 질린 눈동자로 리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