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
<공략자들 176화>
임태호의 모습은 겉보기에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발산하는 기파의 질이 너무나 달라졌다.
이창훈도 느낀 건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빡셌다. 이 자식, 솔로가 이렇게 힘든 거인 줄 몰랐다. 넌 역시 괴물이구나.”
강하고 약한 것을 떠나서, 솔로잉은 원래 두 배 세 배 더 힘든 법이다.
패턴을 홀로 뚫어야 하고, 공략법을 홀로 돌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뭘 하신 겁니까?”
“그냥 뭐, 많은 일이 있었다. 흐흐!”
이 주째가 되는 오늘까지 던전에만 있었던 모양인지, 상당히 모습이 꾀죄죄했다. 눈가엔 다크서클도 가득했다.
물어보지 않아도 씻거나 자지 않고 몬스터들을 때려잡은 게 분명했다.
덕분에 냄새도 지독했다.
“잠시만 있어 보세요.”
인한이 워디나를 소환했다.
임태호의 몸이 커다란 물방울 속에 갇혔다.
“오! 이게 뭐냐?”
“정령술입니다.”
인한은 다음으로 실리암을 소환해 버프를 걸었다.
임태호는 한결 괜찮아진 모습으로 돌아온 자신을 살펴보고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 인한은 사람들과 함께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같이 오르지 않으려고?”
이정환이 물어왔다. 인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쉬고 싶어. 밖에서 할 일도 있고. 계속 이렇게 빠지게 돼서 미안하네.”
그에 이정환이 미소를 띠면서 농담을 던졌다.
“어차피 우리로서는 네 발을 잡을 뿐이겠지. 조금만 기다려 보라고. 금세 치고 올라갈 테니까. 추월당하는 건 순식간이야.”
“정말 그럴 거 같아서 무섭다, 하하.”
인한이 길드원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그들 모두 하루가 지날수록 무섭도록 성장하고 있었다.
당장 임태호만 보더라도 그랬고, 이창훈은 인한의 변화를 알아챌 정도로 감이 좋아졌다.
“그건 그렇고 내가 부탁한 건 어떻게 됐지?”
“달의 검 팀을 말하는 거냐?”
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연락이 왔다. 너의 소개를 받았다고. 합류하고 싶다더군. 그래서 의사 타진 중이다. 이미 있는 팀을 받아들이는 건 의외로 손이 가서 말이지.”
이정환이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같이하게 된 건가.’
달의 검은 기반이 탄탄하고, 신뢰할 만한 팀이다.
해태 길드의 규모가 인한의 생각보다 훨씬 커지겠지만,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하던 참이었다.
이미 완성되어 있는 조직을 받아들이는 쪽이 더 편하다.
“이런, 까먹고 안 줄 뻔했군. 이거, 저번에 부탁한 거다.”
이정환이 두꺼운 서류철과 USB를 인한에게 건넸다.
인한의 눈이 빛났다.
2주 전, 이정환에게 비밀리에 부탁했던 것이었다.
“네가 말한 인물들에 대한 정보야. 국정원에게 어느 정도 아이템 제공을 하는 대가로 얻어낸 것도 있고,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있었어. 그냥 평범한 헌터나 일반인도 있던데, 이거 뭐야?”
“나중에 알려 줄게.”
수많은 헌터의 인적사항이 적혀 있는 파일이었다.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일 게 분명했다.
그 뒤로 이정환과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정오가 됐을 무렵, 이정환이 시간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슬슬 가야 할 것 같은데…… 길드장님께서 한마디 해 주시지?”
피식 웃은 인한이 이정환을 따라 일어섰다.
주위를 둘러보자, 사람들의 시선이 인한에게 쏠려 있는 것을 느꼈다.
연설은 원래 짧고 굵게 하는 법이다.
인한은 잠시 머릿속에 말을 고르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해태 길드원들을 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 되면 뭘 말해도 잔소리밖에 안 되겠는데?”
“하하하!”
농담 반 진담 반.
공연한 이야기를 할 필요 없을 정도로, 해태 길드의 길드원들은 뛰어났다.
“긴 말은 필요 없을 것 같군.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단 하나다. 해태 길드의 수칙을 잊지 마라. 멍청하게 행동해도 좋고, 비겁해져도 좋다. 도망치는 것도 된다. 하지만 길드의 수칙만은 잊지 마라. 얼마 전 사건에서 너무 많은 멍청이들이 수칙을 잊어버린 것 같은데, 이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도록 하길 바란다.”
해태 길드의 수칙은 단 세 개다.
배신하지 말 것.
다치지 말 것.
그리고 가장 중요한 마지막.
결코 죽지 말 것.
“그럼 다들 몸 조심히 다녀와라.”
그렇게.
해태 길드가 다시 한번 탑에 올랐다.
* * *
팀 태산북두(泰山北斗)는 대다수가 중국인으로 이루어진 헌터 그룹이었다.
총 인원 13명, 현재 9층까지 공략한 상태인, 이름이 알려지거나 유명한 팀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무난하게 탑을 오르는 흔한 헌터 팀 중 하나였다.
검은 탑, 9층 필드.
태산북두 팀이 옹기종기 모여 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참…… 징하다, 징해.”
“그러게 말이다.”
“저런다고 숙련도 많이 오르긴 하냐?”
“나도 모르지…….”
그들의 눈앞에, 한 4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지만, 그 검로(劍路)는 검사 클래스를 전직하면 얻게 되는 흔하디흔한 C급 액티브 스킬 ‘기본 검술’이었다.
“그런데 진짜 노력파긴 하다. 어떻게 전투 직후에 저렇게 훈련을 하냐? 시간 날 때마다 검만 휘두르는 거 아녀?”
“뭐, 우리가 알 바냐. 우리 팀 괴짜 집단이잖아?”
“그건 그렇지. 저쪽 양반도…….”
팀원들의 고개가 다시 다른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많이 잡으면 60대는 되어 보이는 중년인이 나무나 수풀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었다.
“역시 검은 탑의 환경은 신기해…… 호흡이 가능하다는 것은 산소 포화도가…….”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데, 그 내용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팀원들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저 양반이야 돈줄이니까 데리고 다니지. 솔직히 저 친구는 도움이 거의 안 되지.”
“그건 그렇지. 저렇게 노력하는데…… 왜 그렇게 약한 거지?”
“낸들 아냐! 마력 쌓는 데도 재능 있다잖냐!”
사내들이 피식피식 웃으며 잡담을 나눴다.
그런 잡담 소리가 검을 휘두르고 있는 중년 사내의 귀에는 또렷하게 들렸다.
그러나 사내는 검로는 단 일 밀리미터도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휘둘러지고 있었다.
“슬슬 출발하자고.”
“어이! 리셴! 그만하고 슬슬 출발하지!”
검을 휘두르고 있는 사내가 검을 멈추더니,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랬다.
사내의 이름은 리셴.
이제는 오지 않을 과거, 신검이라 불렸던 랭킹 4위의 헌터이자, 검은 탑 최대 인원을 자랑하는 길드인 혈맹의 길드장에 오른 사내의 이름이었다.
* * *
기여도에 따라 부산물의 대금을 정산받은 리셴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부족하군.’
대략 이번 3일 동안 번 돈이 1천 위안 정도 됐다.
적은 돈이었다.
“후우…….”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리셴의 딸은 백혈병을 앓고 있었다.
어렸을 때 애가 너무 아파해서 대학병원에 데려갔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됐다.
건설 현장을 뛰어 다니는 일용직 노동자인 리셴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그때 돈이 될 거라는 이야기에 검은 탑을 오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건설 현장보다야 많은 돈을 벌 수 있었지만…… 그래 봤자 9층 구간의 필드만 이리저리 돌아다닐 뿐이었다.
그것도 팀에 속해 있는 리셴에게는 병원비를 내는 것도 빠듯했다.
막막한 마음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옆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뭐 하는가?”
팀원 중 하나였다.
헌터는 아니고, 어디 유명 대학 교수라는데, 연구를 위해 팀에 합류한 사내였다.
중년 사내가 팀의 운영비의 절반 정도를 대주고 있기에 몇 가지 조건을 바탕으로 태산북두 팀과 같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리셴이 난처한 표정을 짓자, 중년 사내가 입을 열었다.
“벌써 같이 다닌 지 일주일이 넘었건만 이름도 모르는 겐가? 리 쉔펑이라고 하네.”
“아, 저는…….”
“리셴. 미안하네만 나는 자네의 이름을 알고 있지.”
“하하…….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일이 조금 많이 있어서.”
“상관없네. 젊을 때는 다 그런 거지.”
젊다고 말하기엔 이미 너무 나이가 들어 버린 리셴이지만, 그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리 쉔펑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리셴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리 쉔펑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돈을…… 빌린다면…….’
이미 상당한 사채를 끌어안고 있는 리셴이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팀의 운영비의 절반을 내고 있는 리 쉔펑이라면, 어느 정도의 돈은 빌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아니다. 안 돼…….’
그러나 곧, 리셴은 고개를 휘휘 저어 생각을 떨쳐 냈다.
이미 팀에서의 위치가 흔들리고 있는데, 같은 팀원에게 또 돈을 빌려서 문제를 만든다면 그대로 바로 퇴출이다.
그러면 정말 솔로로 활동하든지 아래층의 돈벌이가 적은 팀에 합류해야 할지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만 가야 할 것 같습니다. 곧 딸의 면회 시간이라…….”
“그래, 알겠네. 힘내게나. 무언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주고.”
“감사합니다, 선생님.”
리 쉔펑에게 언제나 깍듯하게 선생이라고 칭해 왔던 리셴이었다.
그 말이 퍽 마음에 드는지, 리 쉔펑이 미소를 지었다.
리셴은 무거운 발걸음으로 탑의 바깥에 나가기 위해 땅의 돌 앞에 섰다.
그때였다.
또 한 명이 그를 불러 세웠다.
“실례합니다. 리셴 씨 맞으십니까?”
멋들어진 고급 정장 위로도 드러날 정도로 탄탄한 몸을 소유한 사내였다.
정장 복장이어도 드러나는 몸 때문에 누가 봐도 헌터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사내였다.
“누구신지……?”
“이런 곳에서 찾아왔습니다.”
사내가 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해태 길드 길드장.
그 밑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최인한?”
리셴이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보았다.
맑은 눈빛에, 부드러운 미소가 매력적인 사내.
“반갑습니다. 최인한이라고 합니다.”
사내가 손을 내밀며, 그렇게 말했다.
* * *
1층 물의 마을 카페.
인한과 리셴이 마주앉아 있었다.
‘리셴이라…….’
랭킹 4위.
혈맹의 맹주.
검의 천재.
이정환의 스승.
인피니티 시리즈, 천검의 주인.
40대 초반이라는 늦은 나이에 탑을 오르기 시작했으면서도, 박철환과 발터와 레오와 어깨를 나란히 한 괴물 헌터.
인한이 주먹을 사용하는 발터에게 동경심을 가졌듯, 리셴은 검을 든 수많은 헌터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지금은 평범하다 못해 평균 이하의 헌터에 불과하지만…….’
인한은 리셴을 바라보았다.
아직 개화되지 않은 꽃이다.
관록이라고 해야 할까. 리셴의 눈에는 차분한 심지가 엿보였다.
이런 사람은 쉽게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제게 무슨 일이십니까?”
리셴이 입을 열었다.
“영입 제안을 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영입 제안?”
리셴의 눈이 커다래졌다.
해태 길드는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길드였다.
그런 길드에서 자신에게 영입 제안을 해 오는 것이 믿겨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실례합니다만, 조사를 했습니다. 따님이 많이 아프시다구요.”
“예, 그렇습니다.”
“저희가 치료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한 번에는 안 되겠지만, 1년 이내에 완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병원비도 지원해 드릴 수 있지요.”
리셴의 눈이 빛났다.
백혈병을 치료한다? 골수 이식 같은 게 아니라?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마나 스킬 3단계의 후반에 이르면 마력을 통해 불균형을 이루는 육체의 흐름을 제어할 수 있게 됩니다. 그걸 사용하는 겁니다.”
“마나 스킬 3단계라.”
아마 지금 그에게 있어서 가장 기뻐해야 할 소식이었을 텐데, 그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합니다. 일단 육체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상대의 마력계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마나 스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마력을 다루는 실력도 4단계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나야 하고요.”
인한은 인벤토리에서 종이를 꺼내 계약서를 내밀었다.
“계약서입니다. 해태 길드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계약서이니, 따님의 일과 관련하여 몇 가지 조항을 추가하겠습니다. 저희와 같이하시지 않겠습니까?”
리셴은 계약서를 펼쳐보지도 않고 그저 묵묵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인한이 물었다.
“왜 그러시죠?”
“몇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리셴이 고개를 들어 인한의 눈을 직시했다.
부드럽던 그의 모습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저는 특별한 재능이나 힘을 가지고 있는 것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유명 헌터인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째서 해태 길드의 길드장이나 되는 사람이 절 찾아온 겁니까?”
타당한 질문이다.
인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잠시 손을 내밀어 주시겠습니까?”
“……?”
리셴이 손을 내밀자, 인한이 리셴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바닥을 겹쳤다.
그리고.
화악!
인한의 노도와 같은 마력이 리셴의 마력로를 파고들었다.
찰나의 순간, 전신의 마력로를 모조리 휩쓴 인한이 천천히 손을 떼고 입을 뗐다.
“오래 전부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다르다는 걸 느끼고 있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