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5
<공략자들 175화>
산과 산이 만나는 협곡에 건조되어 있는 거대한 구조물이 큐베리아의 보스존이었다.
인한이 천천히 안쪽으로 들어갔다.
-시이익.
안쪽, 어두컴컴한 곳에서 커다란 인기척과 함께 나지막한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쿵!
놈이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지면을 밟는 순간, 육중한 울림과 함께 붕괴된 천장에서 돌가루가 후두두 떨어져 내렸다.
쿵!
두 번째 걸음이 이어졌을 때, 붕괴된 천장에서 떨어진 빛에 큐베리아의 모습이 드러났다.
전신을 뒤덮고 있는 광택 있는 푸른색 비늘, 지면에 우뚝 서 있는 기둥과 같은 네 개의 다리, 그리고 놈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다이아몬드를 닮은 투명한 네 쌍의 용의 뿔.
몽마왕 큐베리아.
틀림없는, 놈의 모습이었다.
“후우…….”
인한은 저도 모르게 긴 숨을 내쉬었다.
머릿속에서 수천수만 번을 되새김질한 보스존의 풍경과 그곳에 있는 큐베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감으면 당장이라도 큐베리아와 대적하고 있는 옛 해태 길드의 동료들이 보일 것 같고, 대지를 휩쓰는 폭발음이 들릴 것만 같다.
‘괜찮아. 할 수 있어.’
꽉 움켜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더 이상 머릿속이 하얘지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트라우마는 극복했다.
이곳에, 이렇게 놈의 앞에 서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크르르르…….
큐베리아가 낮은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그저 호흡했을 뿐인데, 주위 마나가 들썩인다.
인한보다 월등히 높은 지성을 보유했을 테지만, 놈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더 좋다.
불필요한 대화를 하지 않을 수 있으니.
쿠우우웅!
탐색전, 간 보기, 그런 것들은 전부 필요 없다.
처음부터 인한은 전력으로 힘을 일으켰다.
태산과 같은 압력이 공간에 드리워진다.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무려 수십 년에 달하는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이 놈과의 전투를 고대하고 또 고대했단 말인가.
인한은 놈보다, 놈을 더 잘 알고 있다.
-키이이이이!
기이한 울음소리와 함께 피막으로 뒤덮인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그곳에 수십 개의 마법진이 떠오른다.
직후, 예리한 마력의 화살이 수백 개가 인한에게 몰아쳤다.
콰앙!
마법진의 일부는 부상 마법이었던 것인지, 큐베리아가 구조물의 천장을 부수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비로소 큐베리아의 전신이 드러난다.
생김새는 흔히 알려진 드래곤과 같지만,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는 고작 10미터에 날개도 그 2배에서 3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은 크기의 드래곤.
보통 드래곤의 크기가 꼬리에서 머리까지 대략 6, 70미터에 달하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작은 놈이었다.
하지만, 작더라도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최강종이라 일컬어지는 용족, 그중에서도 최강의 존재인 드래곤의 존재는 결코 허명이 아니다.
-쿠오오오오오!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큐베리아가 드라칸 산맥 전역을 울리는 긴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 * *
용언의 힘이 맥동하고, 정령술이 발동하며, 오러가 온 세상을 불태울 듯 맹렬하게 피어올랐다.
세계의 근간을 뒤흔드는 힘, 트리아스 액셀의 현현이었다.
콰앙!
큐베리아의 기파와 인한의 기파가 충돌하는 소리가 대기 중에 퍼져 갔다.
인한의 주먹이 그러쥐었다.
쩌엉!
펼쳐진 날개로부터 극한의 마력이 응축되고, 발사된다.
휘둘러지는 주먹에 정교하게 구축된 마법이 분쇄된다.
최강종의 이름은 허명이 아니었으며, 중층의 수문장이라 불렸던 큐베리아의 힘은 그동안의 보스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하나 그렇다 하더라도 예상 이상의 힘이다.
인한은 공격을 채 세 번도 이어 가지 못했다.
결국 잠시 쏘아져 온 브레스를 방어하는 데만 집중하기로 한 인한이 태세를 전환했다.
그러면서 큐베리아를 자세히 살펴본 인한은 확신했다.
‘변종.’
격변의 날 이후 나타난 강화된 몬스터. 그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상관없다.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콰아앙!
드래곤으로서 뭇 생명체들의 머리 위에 섰을 큐베리아의 움직임도, 옥죄어 오는 용언과 오러의 흐름에 무뎌진다.
틈과 틈, 찰나와 찰나.
두 존재가 극한의 전투를 이어 간다.
쉬이이익!
인한의 눈이 머나먼 무언가를 바라봤다.
색이 사라지고, 공간의 구분이 무뎌진다.
힘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지고, 튕겨져 나간 마력의 알갱이와 먼지 한 톨의 모양까지 정확히 시야에 잡힌다.
쩌저정!
또 한 번의 브레스.
오리하르콘 슈트의 방어력이 뚝 떨어지며, 마주 서며 휘둘렀던 팔 부분이 얼어붙으며 떨어졌다.
브레스에 마법을 섞은 것인지, 살갗을 파고들며 마력로에 이물질이 섞여 들어왔다.
터엉!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는 두 존재.
하지만 두 존재에게서 피어오르는 상념의 질은 너무나 달랐다.
막연히 살의를 피워 올리는 큐베리아와,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는 인한.
피와 살이 뭉개지는 전투의 현장 속에서.
인한이 떠올린 것은 큐베리아를 향한 분노도, 복수심도 아니었다.
일격, 일격, 뻗어 내는 주먹에 그동안의 시간의 흔적들이 풀려나온다.
대기를 가르며 나아간 주먹에 옛 해태 길드의 추억과, 40층의 악몽과, 데스 파티의 이야기가.
회피하며 돌아서는 몸놀림에 수없이 쌓아 올린 인연과 이별의 흔적이.
힘과 힘의 충돌에서 회귀 후의 만남과 변화, 의문과 해답들이.
끌어 올리는 힘의 흐름 속에서 부딪히고 떨어지며 늘어나고 줄어드는 모든 감정의 소용돌이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격렬한 전투의 순간, 인한의 주먹은 결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었다.
‘아아.’
그리고 그 이야기는, 과거를 향한 작별의 인사이기도 했다.
한 사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 팔을 잃고 슬픔과 고독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그곳에 있다.
인한은 그 나약하고 부족하기만 한 사내를 거부하고, 잊으려고만 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잊고 싶고, 눈을 돌리고 싶지만, 이 이야기는 분명 그 사내, 아니, 인한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지고 또 이어지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인한의 미래이기도 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인한의 움직임이 급격히 변화했다.
폰 체술이 틀을 닦고, 파검식이 이론을 구축했다.
발터 에스키엘의 육중함, 레오의 교활함, 임태호의 분방함…….
수많은 만남이 그곳에 살을 붙였고, 과거의 부족함과 현재의 성장과 미래의 기대가 완성시켰다.
그리고 비로소 이 자리에, 인한이 구축하고, 용왕 볼카누스가 다듬어 완성된 총 열 두 가지의 기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스킬을 창조했습니다.]
[이름을 결정하십시오.]
홀연히 떠오르는 천문을 보며, 인한이 생각했다.
만약 이 기술에 이름을 붙인다면, 이게 가장 좋을 것 같다고.
[스킬을 획득했습니다.]
[무극인(無極印)]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
화인처럼 인한의 영혼 속에 새겨진 자국.
합쳐서 무극인이라 이름 붙인다.
위이이이이이잉!
인한의 주먹에서 타오를 듯 빛나는 세 개의 힘의 고리가 나선형으로 이어지며 거친 소음이 울려 퍼졌다.
-키에에에에엑!
큐베리아가 기어코 몽마왕으로서의 힘을 드러냈다.
검은 안개와 같은 힘이 피어오르며 썰물과 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과거 해태 길드를 몰살시켰던 스킬, <영원의 꿈>.
사방을 휘감는 그 절망을 앞에 두고, 응축된 힘의 고리가 개방됐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추락한다.
휘둘러진 일격에, 큐베리아의 날개의 일부가 갈기갈기 찢어지며 균형을 잃었다.
드래곤의 날개는 마법을 위한 기관 중 하나인 바, 그것 중 하나가 찢어졌다 한들 나는 것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큐베리아는 다시 날아오르기커녕 좀처럼 균형을 잡지 못하고 일어서려다 쓰러지기를 계속해서 반복했다.
-키에에에에엑!
트리아스 액셀의 힘 때문이다.
용언과 속성력과 오러는 본래 합쳐질 수 없는 힘이다.
그런 힘이 단숨에 내부에 침투하자, 내부의 마력계가 거부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후욱!
마치 한 장의 깃털처럼, 인한의 몸이 큐베리아의 몸 위로 내려앉았다.
거암과도 같은 압력으로 큐베리아를 찍어 누르는 인한의 오러가 사위에 가득 번져 갔다.
주먹을 치켜드는 인한.
주먹에 맺힌 세 개의 힘의 고리가 세상을 불사를 듯 맹렬하게 타올랐다.
이미 마력계가 모조리 망가졌을 큐베리아의 숨통을 끊는 데는 과도한 힘.
그러나 모든 것을 쏟아 내기라도 하듯 힘의 출력이 끝 모를 듯 솟아오른다.
그리고.
콰아아아아아아!
큐베리아와 함께, 대지가 무너지며 거친 울림을 토해 냈다.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해 낸 큐베리아의 시체 위, 인한의 시선은 떠오르는 천문이 아니라 드넓은 창공으로 향했다.
인한의 눈에서 작은 물줄기 하나가 흘러내렸다.
* * *
40층 공략 후, 인한은 탑의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몇 번이고 겪어온 보스전이었지만, 큐베리아와의 전투는 내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인한은 수련도 한 번 하지 않고, 집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했다.
자주 산책을 나가고, 그동안 먹어 보지 못했던 음식들을 사 먹거나, 통장에 쌓여 있던 돈들을 펑펑 써 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이었다.
인한은 언더 코어의 마력 흐름이 이전과는 다르게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마치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마력을 외부로 방출한 순간.
[극체술<6단계>]
마나 스킬의 단계가 한 단계 상승했다.
볼카누스를 만나기 위해 걸었던 길과, 내면의 성장이 마나 스킬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이다.
‘이래선 영약이 의미가 없네.’
인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마력량이 스킬 업그레이드에 도움이 될 줄 알고 영양을 만들어 섭취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어처구니없게 단계가 올라갈 줄은 몰랐다.
“오늘 출발한다.”
큐베리아 공략 후 이틀이 지났을 무렵.
인한은 이창훈의 연락을 받았다.
해태 길드가 다시금 공략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인한은 바로 검은 탑 1층으로 향했다.
시작의 마을, 땅의 돌 앞에 해태 길드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직 약속 시간이 되지 않은 건지 수는 3, 40명밖에 안 되어 보였다.
“오셨슴까?”
이창훈이 인한을 반겼다.
인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창훈에게 다가갔다.
“잘 지냈냐?”
“예, 그럼요. 저 이번에 차 뽑았습니다! 아, 형님은 그런 거 잘 모르시겠군요. 슈퍼카입니다, 슈퍼카! 세계에 몇 대밖에 없는 놈으로다가! 이거이거, 밟으면 얼마나 부드럽게 나가는 지 아십니까? 엔진이 완전…….”
나불나불 떠들어 대는 이창훈을 보며 인한이 피식 웃었다.
그런 인한을 본 이창훈의 눈이 토끼눈처럼 변했다.
“응?”
“왜?”
“형님, 좀 변하셨습니다? 뭐라고 해야 하냐, 거…….”
이창훈이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강해 보이기만 했는데, 지금 보면 약해져 보인다고 해야 하나…… 아니, 유해 보인다? 부드러운 건가? 무거워 보이기도 하고…… 뭡니까?”
마나 스킬의 숙련도만 따지면 해태 길드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천재가 이창훈이었다.
그런 이창훈이기에 인한의 기세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냥, 기연이 있었다.”
“그렇습니까?”
이창훈이 눈이 커다래졌다.
그러고는 씨익 웃으며 천천히 다가와 인한의 귀에 귓속말을 했다.
“좋은 정보 있으면 좀 가르쳐 주시죠? 저, 이창훈. 형님의 영원한 아우! 기억하시죠!”
“됐어, 인마.”
“흐흐! 그런데, 그냥 강해지신 거를 떠나서 사람이 좀 달라진 것 같아요. 여유가 생기신 거 같은데? 원래는 조금 초조해 보이셨거든요.”
이창훈의 말에 인한이 입을 꾹 닫았다.
초조해 보였다라.
그게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인한아.”
그때, 뒤쪽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임태호가 씨익 웃은 채 우뚝 서 있었다.
“형님?”
인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