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
<공략자들 174화>
그 한마디에 수많은 이미지들이 플래시백됐다.
세상이 죽어 갔다.
하늘이 떨어져 내렸고, 지각은 먼지가 되어 스러졌다.
살아 있는 것은 병들어 죽어 갔고, 살아 있지 않은 것들은 화마(火魔)에 삼켜져 잿더미가 됐다.
낭떠러지와 같은 지각의 끝자락에, 그녀가 서 있었다.
먼지 한 톨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끝자락이 그녀의 뒤로 까마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인한이 있었다.
아리아가 미소를 지으며 인한에게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그 손짓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인한이 천천히 아리아를 향해 다가갔다.
천천히, 인한의 주먹에 ‘푸른색 오러’가 맺혔다.
그 순간…….
* * *
인한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입이 텁텁하고,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끄윽…….”
두통 탓에 절로 이가 꽉 물어졌다.
머리에 커다란 혹이 달려서 심장처럼 두근두근 뛰어오르는 기분이었다.
통증에 익숙해진 인한도, 이런 종류의 감각에는 절로 표정이 찡그러졌다.
두통이 조금 진정되자, 인한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는 까마득한 어둠이 가득했다.
공기가 들어와 천장에 맴돌며 후웅, 하는 소리를 냈다.
거대한 동굴의 내부인 것 같았다.
볼카누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와의 만남이 한순간의 꿈이라도 된 것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아리아는, 네 손에 죽었다.
그 말이, 홀연히 머릿속에 떠올랐다.
볼카누스가 그답지 않게 조심스레 말을 고르며 마지막으로 남긴 얘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녀가 취한 방법은 미래를 잇기 위한 방법이었다. 죄책감을 갖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였다.
인한 표정이 일그러졌다.
‘내가…… 아리아를 죽였다고?’
떠오른 기억은 처음과 끝이 뚝 잘려 있는 상태였다.
그 세계의 종말과 같은 공간은 무엇인지, 왜 인한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오러를 피워 올렸는지, 그 뒤에 인한은 그 오러로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인한은 두통을 감내하면서 기억을 떠올리려 했지만,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그 이상의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볼카누스가 거짓말을 했을 리가 없었다.
인한은 아리아를 죽인 게 분명했다.
‘내가…… 어째서?’
단편적인 기억들 속에서 아리아에 대한 것들은 인한에게 그리움과 따스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인한이 사이코가 아닌 이상에야 자신이 죽인 상대를 그렇게 여길 리가 없다.
그뿐이 아니다.
인한은 그녀가 준비한 안배를 뒤따라 탑을 오르고 있었다.
볼카누스는 그것이 미래를 잇기 위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대체 그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또다시 두통이 몰려왔다.
인한은 어둠 속에 웅크린 채 이를 악물었다.
* * *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인한이 고개를 들었다.
<액티브 스킬>
[트리아스 액셀<5단계>]
[등급 : EX]
[숙련도 : Lv.1(00.0퍼센트)]
인한은 트리아스 액셀의 천문을 확인하며, 엷게 미소를 지었다.
천문의 내용이 싹 바뀌었다.
원래 단계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았는데 추가되어 있었다. 그 덕에 숙련도가 초기화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기술까지.’
볼카누스의 마지막 작별 선물이었던 것일까.
힘의 방출 방식부터 시작하여, 트리아스 액셀의 힘에 최적화되어 있는 기술의 모든 게 머릿속에 주입되어 있었다.
‘내가 만든 것과 비슷해. 아니…… 내가 만든 걸 완성시킨 건가.’
제로 어택, 파공탄 등 인한이 만들어 낸 기술들은 세세한 부분의 완성도가 부족했다.
큰 틀과 뼈대의 완성도는 뛰어났지만, 아직 만들어진 지 3년도 채 되지 않은 데다, 이런 종류의 작업을 처음 해 본 인한이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술의 수가 적었다.
그런데 머릿속에 떠오른 기술들은 그런 부분이 완벽히 보완되어 있었다.
이건 볼카누스의 작품이었다.
트리아스 액셀상의 기술과 인한이 만들어 낸 기술들을 한데 합치고, 인한의 현 상태에 걸맞게 기술들을 만들어 낸 것이 분명했다.
‘감사합니다.’
인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공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지만, 그래도 큰 발전을 이뤘다.
볼카누스, 인한의 스승.
비록 그에 대해 전부 잊어버린 불초 제자였지만, 그는 잊지 않고 인한을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볼카누스는 잠시 서 있다가, 피식 웃었다.
“웃기는 놈이군.”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놈이지만, 그 성격만은 마음에 들었다.
어떤 고통을 당해도, 어떤 시련이 닥쳐도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
그런 마음가짐은 용족도, 요정족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짧은 삶을 지녔으며, 그 짧은 삶을 불태울 기세로 나아가는 인족에게만 있는 특성이었다.
‘제자를 잘 뒀군.’
분명 인한은 열 걸음을 한 번에 걷는 재능은 없을지 모른다.
둔하고, 부족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는다.
‘아리아, 너의 눈이 확실할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가능성을, 어쩐지 저 아이는 뚫어 낼 것 같구나.’
볼카누스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이제 이 저주받을 탑에서 벗어날 시간이었다.
그는 이곳에 오기 위해, 검은 탑의 차원 장벽을 뚫고, 억지로 그의 레어와 탑을 연결했었다.
라스틴이 개입해 오지 못하도록 세계 그 자체의 이목을 속였지만, 역시 긴 시간 유지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때였다.
“크아악!”
드라코니언 한 마리가 그의 공간으로 진입해 왔다.
코린이었다.
한쪽 손에 꽉 움켜쥔 용왕의 이빨이 있었다.
볼카누스가 눈을 일그러뜨렸다.
‘이 빌어먹을 제자 놈. 내가 직접 나의 이빨을 가지고 만들어 낸 아이템을 저런 하찮은 것에게 넘겨?’
순간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가 설치한 길은 천문이 어그러지고 온몸의 감각을 강탈당하는 길이다.
인한조차 의식이 흐려지며 죽을 뻔했건만, 그걸 고작 드라코니언 한 마리가 넘어서다니?
‘그렇군. 광기인가.’
볼카누스의 혜안(慧眼)이 코린의 본질을 꿰뚫었다.
의식이 흐려지고, 감각이 무뎌졌으나, 광기가 코린의 육체를 지배해 전진하게 한 것이었다.
“와, 왕이시여……!”
코린이 바짝 엎드리며 볼카누스에게 외쳤다.
“제, 제발 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린 결코 당신을 배신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서서히 제어를 잃고 괴물이 되어가고 있습…….”
코린이 구구절절 수없이 많은 언어를 쏟아 냈다.
볼카누스의 눈이 차갑게 식었다.
“쓰레기 같은 자식.”
빠각!
볼카누스가 손을 휙 흔들자, 코린의 머리가 터져 버렸다. 코린은 그의 입을 더 이상 떠들지 못했다.
“용족의 긍지를 잃어버린 놈. 죽지는 못할망정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다니. 그러고는 이제 와서 나에게 도움을 구해?”
용왕 볼카누스.
그는 요정왕 루한과 달랐다.
그의 눈에 탑에 있는 존재란, 자신들의 세계를 포기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한 매국노와 같은 존재였다.
화악!
볼카누스가 손을 흔들어 용왕의 이빨을 손에 쥐었다.
괘씸해서라도 인한이 가지고 있는 나머지 용왕의 이빨마저 사용할 수 없게끔 만들고 싶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제자라는 생각에 꾹 눌러 참았다.
“쯧! 탑과 천문을 어그러뜨리는 게 얼마나 많은 손해를 봐야 하는 일인지도 모르고!”
하여간 손이 많은 제자다.
볼카누스가 손을 허공에 휙 저었다.
그 순간, 천문과는 다른, 그러나 천문과 한없이 비슷한 창들이 볼카누스의 코앞에 끊임없이 떠올랐다.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합니다.]
[지혜의 왕의 권한을 침범합니다.]
[비정상적인 접근입니다.]
[비정상적인…… ]
……
[접근이 허용됐습니다.]
용왕의 이빨의 나머지 한쪽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눈에 띄게 지친 표정이 된 볼카누스가 식은땀을 스윽 닦으며 혀를 찼다.
“다음에 만나면 죽을 줄 알아라.”
볼카누스의 그 말과 함께, 그의 공간이 끝내 소멸됐다.
머나먼 곳, 어느 공간.
네 쌍의 날개를 지닌 순백의 괴조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용왕?”
지혜의 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곧 눈을 빛냈다.
“꼬리를 드러냈군. 공간을 도약해 무언가를 남긴 모양인데…….”
괴조의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눈을 빛냈다.
“잡았다. 극멸기의 그릇.”
* * *
인한이 밖으로 나왔을 때, 동굴의 입구는 사라져 있었다.
번뜩 코린에게 넘겨준 용왕의 이빨이 떠오른 인한의 표정에 낭패감이 서렸다.
‘제기랄.’
혹시 모를 생각에 용인들의 마을로 돌아가 보았지만, 코린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얘기만 들었다.
우웅!
막연히 동굴의 입구가 있던 부위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갑자기 묘한 진동이 느껴졌다.
‘지진인가?’
인한은 그 생각을 떠올렸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지진과는 다르다.
조금 더 깊숙한 곳, 세상 자체가 흔들리는 기분이다.
그러던 찰나, 공간이 어그러졌다.
한 중심점을 기준으로 공간이 밀려 나오는 기분이었다.
‘큭!’
멀미와 같은 구토감에 인한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 순간.
툭!
공간의 어그러짐이 사라지고, 지면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용왕의 이빨, 나머지 한쪽이었다.
인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음에 만나면 죽을 줄 알아라
볼카누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한은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고는 도망가듯 자리를 떴다. 혹시 마법이라도 날아올까 싶어서.
아무리 볼카누스가 천문을 무시하라고 했고, 트리아스 액셀의 진수를 얻으며 순식간에 강해졌다지만, 얻을 건 얻어야 했다.
인한은 2차 클래스 업그레이드를 했다.
퀘스트 조건은 지성을 가진 용족 100마리를 처리하는 것이었다.
[히든 클래스 ‘스트라이커’의 2차 클래스를 업그레이드에 성공했습니다.]
[히든 클래스 ‘스트라이커’가 히든 클래스 ‘워리어’로 상승합니다.]
[히든 클래스 ‘워리어’]
……
[2차 클래스 업그레이드 획득 특전이 주어집니다.]
1. 방어를 하지 않을 시, 모든 피해량이 200퍼센트 증가합니다.
<패시브 스킬>
[실드 디피스]
[등급 : A]
[숙련도 : 없음]
[효과]
1. 크리티컬 적용 시, 상대의 방어력을 75퍼센트 무시합니다.
2. B등급 이하의 방어구에 크리티컬 적중 시, 내구도를 0으로 만듭니다.
원래라면 2차 클래스 업그레이드의 액티브 스킬로 주어져야 할 ‘아이언 크래시’가 있지만, 이미 인한이 익혔기에 주어지지 않았다.
인한은 40층의 보스존으로 향했다.
전투를 진행하던 인한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비약적으로 강해진 건 아닌 모양이네.’
느낌상으로는 왕조차 대적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실 인한에게 변화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볼카누스에게 받은 것이라고는, 완성된 기술들과 트리아스 액셀의 육체뿐이니까 말이다.
트리아스 액셀의 기술의 경우는, 아직 인한이 연습할 시간이 없었다.
거기다 원래 인한이 가지고 있던 기술을 완전하게 만든 정도이기에, 갑작스러운 힘의 증가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육체 개조는 인한을 트리아스 액셀을 사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기반을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사실상 정령술과 용언의 경지는 그다지 높아지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수월하고 능숙한 이용이 가능해진 정도였다.
“후우!”
역시 최강종은 최강종인 걸까.
심층부부터는 던전의 진행이 늦어졌다.
몬스터의 수도 많았지만, 저마다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에 처리하기가 힘들었다.
‘조급할 건 없다.’
인한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리 몬스터들이 까다로워졌다지만, 놈들이 인한에게 해를 끼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인한은 기어코 그 문에 도달했다.
몽마왕 큐베리아가 있는 곳.
문에 손을 얹은 인한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인한 속의 트라우마, 주저함, 나약함, 그 모든 부정적 감정의 근원.
‘가자.’
인한이 눈을 빛내고, 문을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