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7
<공략자들 167화>
인한은 일단 메인 던전으로 진입하지 않고 필드를 맴돌았다.
뭐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바로 메인 던전으로 진행해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몽마왕을 꺼리는 마음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인한은 당장이라도 보스존으로 달려가서 몽마왕을 쓰러뜨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다.
‘분명, 있는데. 있어, 여기에…….’
딱 이런 기분이었다.
여행을 가거나 할 때, 분명 필요한 것들을 다 챙겼는데 묘하게 찝찝한 기분. 혹은 하품과 재채기가 나오다 마는 기분.
그런 느낌 때문에 여기서 떠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런데 왜 그런 느낌이 드는지를 알 수 없어서 답답했다.
콰앙! 콰앙!
인한은 어지러운 속을 조금 정리하고자 무작정 필드의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돌아다녔다.
지능은 높지만 대화를 할 수 없는 몬스터들은 단번에 처리하고, 드라코니언처럼 대화를 할 수 있는 용족은 일단 잡아 놓고 정보를 캤다.
하지만 여전히 필요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까 유적 근처로는 가지도 않았네.’
2차 클래스 업그레이드를 바로 할 생각이 없었기에 그동안 유적지 근방으로는 가지 않았던 인한이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그곳이라면 무언가 얻을 수 있는 게 있을지도 몰랐다.
고개를 끄덕인 인한은 유적지로 향했다.
유적지는 5층보다는 사방이 유적지로 되어 있던 35층의 모습에 가까웠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곳의 유적지는 지구에선 볼 수 없는 특이한 건축 양식과 화려한 조각들이 곳곳에 가득했다.
[클래스 ‘검사’의 2차 클래스 업그레이드…….]
[클래스 ‘궁사’의 2차 클래스 업그레이드…….]
……
[해당 클래스를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자, 유적 하나하나에 클래스 업그레이드 퀘스트가 떠 있는 게 보였다.
하지만 찾는 것은 없었다.
인한이 한숨을 쉬었다.
‘역시 이곳이 아닌가.’
인한이 머리를 긁적였다.
40층 드라칸 산맥은 규모만 봐도 남한의 절반 이상에 달한다.
아무리 인한이라도 다 돌아다니기엔 너무 넓은 공간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인한은 일단 끝까지 찾아보기로 하고 유적지의 깊숙한 곳으로 더욱더 걸어 들어갔다.
그러던 인한은 멀지 않은 곳에서 다수의 기척을 감지했다.
‘헌터일 리는 없고…… 드라코니언인가?’
40층에 있는 용인은 드라코니언뿐이었기에, 인한은 느긋하게 인기척이 느껴진 쪽으로 이동했다.
“건방지게 이곳에 침입해 오다니! 우매한 자로군! 네놈은 누구냐!”
붉은 꼬리와 날개를 가진 남성 드라코니언 한 마리가 인한의 앞에 나타났다.
그것을 시작으로, 족히 열 마리는 되는 드라코니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어, 잠깐. 뿔이 없어?’
인한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용을 상징하는 뿔은 있다.
하지만, 그 뿔과 뿔 사이에 흉측하게 돋아나 있어야 할 각석은 없었다.
“잠깐만! 너희들 뭐야! 몬스터가 아닌 건가?”
“뭐? 그게 무슨 소리냐!”
“뿔이 달리지 않은 드라코니언이 있다는 건…….”
“흥! 우리는 그런 하등한 놈들과 다르다. 감히 그런 놈들과 비교를 하다니!”
“아, 아니, 이야기를 좀…….”
인한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드라코니언이 마력을 끌어냈다.
천지가 요동치며 수십 개의 마법진이 사방에 그려졌다.
“젠장! 이야기 좀 하자니까!”
인한은 짜증을 내면서도 마력을 끌어 올렸다.
* * *
“쯧, 강하군.”
열 명의 드라코니언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엘프만큼 잘생겼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얼굴의 선이 굵은 미남형이기는 했다.
인한은 자신을 습격한 드라코니언들을 모조리 제압해서 땅에 꿇리고 생각에 잠겼다.
‘엘프나 묘족 같은 건가?’
인한은 드라코니언들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다짜고짜 공격해 온 이유는 뭡니까.”
“하등한 존재가 우리의 공간에 침입해 왔다.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한가?”
“…….”
이젠 짜증 날 기력도 안 생겼다.
차라리 몬스터 쪽이 대화하기 편할 지경이었다.
인한의 털끝도 스치지 못해 놓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압적인 말투를 고수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센 종족인 모양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인한이 한숨을 푹 쉬고는 중얼거렸다.
“이걸 보면 그런 말투 못할 텐데…….”
하지만 그 말에도 드라고니언은 콧방귀만 뀌었다.
“흥! 네놈이 뭘 보여 주든…….”
하지만 드라고니언은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인한이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용왕의 이빨을 꺼냈기 때문이다.
“……!”
드라코니언의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어떻게 인간인 네가 그것을?”
드라코니언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런데 그를 제외한 드라코니언들은 멀뚱멀뚱하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을 이끌었던 대장격의 드라코니언만 눈가에 핏대를 세우며 인한을 노려보았다.
“그것을, 그것을 내놔라. 그것만 있다면 우리는……!”
우드득!
마력으로 움직임을 봉쇄해 놨건만, 드라코니언은 몸에 상처를 입는 것도 개의치 않고 인한에게 달려들려 했다.
퍼억!
인한은 굳은 표정으로 드라코니언의 턱에 주먹을 뻗었다.
그러자 드라코니언이 허물어지듯 쓰러지며 정신을 잃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도 있겠군.’
인한은 이들과 대화를 나눌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드라코니언들의 수장이 지금처럼 광기에 가까운 집념을 보이기만 한다면 대화는커녕 말 한마디 나누기도 어려울 터다.
인한은 나머지 열 명의 드라코니언들을 바라보고 손가락을 튕겼다.
우득! 뿌득!
드라코니언의 내부에 있던 마력이 격발하며 전원이 정신을 잃고 땅바닥에 쓰러졌다.
인한은 오러를 길게 뽑아 그들을 통나무 묶음처럼 만들어 질질 끌며 이동했다.
어차피 용족은 인간들보다 몸의 내구도가 한참 좋다.
이 정도로는 다칠 일이 없을 게 분명했다.
유적들 중에서 지붕과 벽이 있는 곳에 들어간 인한은 아무렇게나 용족들을 던져 놓았다.
혹시 일어나서 또 발광할지 모르기에, 마력으로 꼼꼼히 제어를 가해 놓고, 주술과 두꺼운 쇠사슬로 전신을 묶어 놓았다.
그리고 10분 정도 지났을 무렵, 용족이 정신을 차렸다.
“여긴……?”
먼저 일어난 것은 빨간 날개와 꼬리를 가지고 있었던, 드라코니언들의 대장격으로 보였던 놈이었다.
“네놈은!”
“그래, 내가 데려왔다.”
“그것! 그것을 내놔라! 그건 고작 인간 따위가 가지고 있어도 될 물건이 아니야!”
드라코니언이 당장이라도 인한에게 달려갈 듯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아무리 용족이라 하더라도 마력이 봉인된 데다, 힘을 쓰지 못하게 전신의 관절을 묶어 둔 상태였다.
드라코니언은 단 10센티미터도 움직이지 못하고 꿈틀댈 뿐이었다.
“이걸 어디다 쓸지 가르쳐 주면, 생각해 보지.”
“내가 가르쳐 줄 것 같으냐! 하등한 버러지 같은 주제에!”
인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대화를 나누기는 해야겠지만, 이대로는 아니었다.
“이 새끼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인데…….”
인한이 뚜벅뚜벅 다가가 드라코니언의 목을 그러쥐었다.
“큭! 크륵!”
“너 지금 나한테 목숨 저당 잡힌 거야. 설설 기면서 부탁해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계속 고압적이게 나오면 어떻게 될까?”
뿌득!
인한의 악력은 현재 고압 프레스 못지않은 힘을 발휘한다.
그 악력에 그대로 노출된 드라코니언의 목에서 섬뜩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드라코니언의 얼굴색이 점점 파리해지자, 인한은 손을 놓고 혀를 차며 일어섰다.
“그럼 다시 해 보지. 잘 생각해 봐. 내 도움을 받든지, 아니면 여기서 죽든지.”
“……그건 열쇠다.”
드라코니언이 부들부들 떨며, 씹어먹듯 말했다.
“저주받은 현재를 극복하기 위한…… 열쇠.”
* * *
대장격으로 보였던 드라코니언, 코린은 인한을 드라코니언의 마을로 안내했다.
‘이게 마을?’
유적지 깊은 곳으로 이동하며, 인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코린이 마을이라고 소개한 곳은, 유적지 자체였다.
그들은 지붕이 있는 유적지를 보수한 후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는 엘프나 묘족 마을과는 달리 외부의 침입을 막는 결계 같은 것이 보이질 않았다
유적지에서 생활을 하는 것도 몬스터의 침입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함인 것 같았다.
최강종이라 불리는 용족, 그중에서도 높은 지능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드라코니언들이 고작 이렇게 생활을 하고 있었다니.
현재 그들의 모습 또한 상당히 피폐해 보여 인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내가 40층에 도착했을 때쯤에는 드라코니언의 마을 같은 건 없었어.’
아마 그때는 이미 드라코니언이 멸망한 이후였을지 모른다.
코린은 마을 중앙에 있는 집으로 인한을 안내했다.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
코린이 회한에 찬 목소리로 말을 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잃는 동족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지금에 와서는 서른 명 남짓한 동족만이 남았을 뿐이다.”
원래는 백 명이 넘었던 마을이었지만, 수많은 드라코니언이 이탈하고, 끝내 마을을 유지할 수도 없게 되어 유적지로 도망치듯 들어온 모양이었다.
“그거랑 용왕의 이빨이 필요한 이유는 뭐지?”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
코린이 눈을 빛냈다.
“그분에게 용서를 구할 것이다. 과거의 우리는 멍청했고, 용족답지 않았다고…… 그렇게 용서를 구할 것이다. 왕이시라면 분명 우릴 도와줄 게 분명해!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거다. 인간, 너라면 이 말을 알아듣겠지?”
코린이 인한의 눈을 직시했다.
인한은 코린에게서 푸른 숲 부족의 카를과 넬레바나의 드반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분명 청년에 불과한 외모인 코린이지만, 그 어깨에 무언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분이라…….’
인한은 코린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그토록 자존심 많은 용족이 극존칭을 사용하는 상대라면 하나뿐일 것이다.
‘용왕.’
인한이 눈을 빛냈다.
“하지만 어떻게 만날 생각이지?”
“……던전이 있다. 원래는 포기하고 있었건만, 설마 그분의 무구(武具)를 몸에 지닌 자가 나타날 줄이야. 정말이지 이것은 그분의 보살핌이나 마찬가지다!”
인한은 코린을 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어째서인지 알 수 없지만, 그에게서 거부감을 느꼈다.
인한은 굳은 표정으로 코린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정 설명을 끝내자마자 코린은 인한을 데리고 유적지 근처의 숲속으로 들어갔다.
대접을 받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닦달하면서 이동하게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기에 인한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숲속을 얼마쯤 걸었을까. 코린은 정신병자처럼 사방을 힐끗힐끗 바라보다가, 흠칫 놀라기까지 했다.
도저히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건…….’
코린의 뒤를 쫓아갈수록, 무언가 점점 마력이 들끓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마력원과 마력로 전체가 들끓었다.
우웅!
급기야 용왕의 이빨마저 진동하며 무언가 신호를 보내왔다.
아니, 신호를 보내온다기보다는, 그동안 느껴 왔던 무언가와 연결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이것을 발견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한참을 걸었을 무렵, 코린이 멈춰 섰다.
코린의 앞에 있는 것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우우우웅!
공기가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때문일까. 안쪽에서 귀신의 울음소리와 같은 소리가 울렸다.
가로 세로 10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입구의 동굴이었다.
아무리 안쪽이 어둡더라도 보통은 입구에서 몇 미터까지는 내부가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동굴은 빛을 모조리 흡수하기라도 한 듯, 그저 새까맣기만 했다.
“이곳에 들어갈 것이다.”
코린이 그렇게 말하고 인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인한이 고개를 갸웃하자, 코린이 말했다.
“약속했던 이빨을 말하는 것이다. 이게 있어야 이곳에 들어갈 수 있어.”
“아, 그런 거였나? 하지만 이건 나만이 장착할 수 있는 아이템이다. 상관없나?”
“상관없다. 장착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래?”
인한은 용왕의 이빨을 벗어 한쪽만 코린에게 넘겼다.
코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한쪽이지?”
“나도 들어가야 할 것 아닌가?”
“……네가?”
무언가 말을 하려던 코린이었지만,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다면 해 보거라.”
코린은 볼일을 다 봤다는 듯 몸을 획 돌리고 동굴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악!
코린의 모습이 허공에서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인한이 마력을 흘려 보내 안쪽의 기척을 살폈지만, 마치 무저갱을 더듬는 것처럼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인한은 한숨을 푹 내쉬고, 동굴의 안쪽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