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
<공략자들 156화>
인한은 세계수 앞에 섰다.
몸과 정신의 피곤함이 엄청났지만, 이대로 쉴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세계수에 접속하면 반쯤 잠에 든 상태로 정신만 유지된다.
적당한 위치에 자리를 잡은 인한은 심호흡을 하고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러자 밖으로 돌출되어 있는 세계수의 뿌리를 통해 인한의 마력이 스며들었다.
우웅!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인한은 새까만 공간에 있었다.
[스페셜 던전 ‘세계수 넬레바나’의 입장 조건을 충족하셨습니다.]
[세계수 넬레바나에 접속하셨습니다.]
[제한 시간 : 48시간]
인한은 숨을 훅 내뱉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저 검기만 하던 세상이 수많은 색으로 채색되기 시작했다.
넓은 대지가 생겨나고, 풀들과 돌들이 자리를 잡았다.
우뚝 솟은 나무들이 무수히 자라나자 그곳엔 숲이 생겨났다.
인한은 묵묵히 눈을 돌렸다.
정면에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나체의 여성이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이 아니다.
아발론의 일곱 군주 중 하나.
인한의 표정이 굳어졌다.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의 그녀가 마력을 휘두르며 인한의 앞에 서 있었다.
인한은 그녀와 과거의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되짚어 보자.’
인한이 긴 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 기억에서 얻은 소득은 없었다.
무언가가 새롭게 떠오르지도 않았다.
왕은 인한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고, 인한도 임기응변으로 모르는 척을 했기에 한정된 정보만이 오갔을 뿐이었다.
인한은 다시 눈을 감았다.
도화지에 검은색 페인트를 부어 버린 듯, 다시금 세상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그다음으로 다시금 새까만 세상에 수많은 사물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갈색이 맴도는 낡은 벽돌 벽이, 그다음에는 벽에 붙어 있는 횃불들이 나타났고, 눅눅한 냄새가 훅 차올랐다.
이제는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공간.
5층의 히든 던전, 왕가의 비도.
세계수는 접속한 자의 뇌에 있는 정보를 구현시켜 준다. 인한은 왕가의 비도를 머릿속으로 떠올린 것이었다.
“크으윽!”
인한은 보스 몬스터에 잡혀 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채찍에 몸이 속박된 상태였고, 지속적인 전투로 체력과 마력이 한계에 달해 있던 상태였다.
인한은 천천히 보스 몬스터와 그 몬스터에게 묶여 있는 과거의 자신의 뒤를 따랐다.
곧 분지 형태의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고, 진 보스 몬스터와 불길한 기운을 풍기는 제단이 나타났다.
인한이 도망치려는 순간, 제단에서 마력의 소용돌이가 몰아쳤고, 그것이 나타났다.
악마의 왕 리시피르.
인한은 굳은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았다.
저 때의 인한은 아직 아무것도 몰랐을 무렵이었고, 이어진 전투의 피로와 전신의 마력을 착취당한 여파 때문에 정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리시피르와의 대화는 상당 부분 기억하고 있지만,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리시피르와 과거의 자신이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한순간, 리시피르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렇다면 걱정 마라. 나는 이런 놈들과 격이 다르다. 거기다 나를 포함해 이 세계에 방문한 어떤 존재들도 네게 피해를 입힐 수가 없다. 그런 규칙이다.
기억하고 있던 내용이었다.
하지만 다시금 들으니 의아했다.
‘나에게 피해를 입힐 수 없어. 그런데 그때 그 왕은?’
최근에 부딪힌 왕은 인한에게 상처를 입혔다.
본체가 아니라, 분신이라면 가능한 걸까?
그다음에 이어진 대화는 계약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 이야기를 되새기던 인한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 * *
해태 길드는 공략을 재개했다.
굳이 공략에 참여하도록 강제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격변의 날에 의한 여파가 두려운 길드원이 몇 명 불참 의사를 표했다.
사실 길드원이 두려워해서라기보다는 가족들의 만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탈한 것이었다.
‘괜찮을까.’
이정환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일단 곧장 35층의 필드로 나서는 것은 위험 부담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회의를 통해 30층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자, 시작하자, 아그들아!”
“예, 형님!”
임태호가 담당하고 있는 근거리 공격형 헌터들이 우렁찬 목소리로 사기를 드높였다.
이정환이 그들을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 번 필드 쪽을 바라보며 긴 숨을 내쉬었다.
‘왕들이 이 세계에 찾아왔다는 건, 역시 마왕의 씨앗을 찾기 위해서겠지.’
이정환은 가슴 언저리를 손으로 쓸어 냈다.
빛의 수호자 클래스와 함께 얻은 ‘마왕의 씨앗’.
-걱정이라도 되는 건가?
그때, 이정환의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성의 목소리였지만, 상당한 중저음에 남성의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이정환은 고개를 저었다.
‘전혀. 괜찮습니다.’
-그래요. 괜찮아요. 그리고, 아무리 왕들이더라도 상당히 약체화되어 있을 거예요. 당신의 동료들이라면 충분히 버텨 낼 수 있을 겁니다.
같은 목소리였지만, 높은 목소리 톤에 부드러운 어조였다.
그때,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여성의 어조인지 남성의 어조인지 알 수 없는 중성적이고 딱딱한 목소리였다.
-계약을 잊지 말라. 우리의 미래만이 걸린 것이 아니다.
이정환은 조금 굳은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걱정 마십시오. 절박하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해태 길드는 격변의 날 이후 처음으로 필드에 진입했다.
그런 해태 길드를 마을의 어귀에서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눈을 빛냈다.
* * *
인한은 리시피르를 바라보았다.
그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인한은 고개를 돌려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지칠 대로 지쳐서 그런지 눈동자는 크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리시피르와 정면에서 마주 보고도 굴하지 않는 자신을 보며 대견한 감정까지 들었다.
과거의 자신이 물었다.
“……왜 이런 계약을 들이미는 거지?”
인한의 눈이 서서히 커다래졌다.
잊고 있던 기억이 서서히 수면 위로 상승했다.
씨앗의 정체.
그건…….
“군주 중 하나가 마왕을 죽이려고 만든 방법이지. 씨앗이라는 웃기지도 않는 이름을 붙인 것도 놈이고.”
마왕을 죽이기 위해 만든 수단.
그동안 끊임없이 혼란스럽게 했던 의문의 열쇠가, 드디어 맞춰졌다.
“많이 늦어져서 반쯤 포기했었는데 설마 여기에 칼로 쓸 만한 재목이 있을 줄이야. 이런 최하위 차원 같은 곳에.”
이제야 이 의문 가득했던 말들의 의미가 이해됐다.
왕은 왕만이 죽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계의 존재들은 왕들을 어떻게 죽였단 말인가.
그러다 불현듯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
‘옛 왕들은 죽지 않았어!’
인한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렇기에 왕들은 마왕들을 무시하면서도, 혹시 모를 일에 걱정을 품고 있는 것이다.
리시피르의 말이 이어졌다.
“굳이 말하면 내 기운을 심어 두는 거다. ……그 씨앗이 열매를 맺었을 때, 너는 내가 하지 못하는 사소한 일 하나 해결해 주면 된다.”
최근에 만났던 왕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씨앗은 힘의 꽃봉오리다.
그렇다면, 그 꽃봉오리에 완벽히 꽃이 핀다면?
마왕을 죽이기 위해 만든 수단으로 만든 씨앗이라면, 그 씨앗이 바로 열쇠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차피 씨앗이 심어진 존재는 왕이 아니야. 그럼 어떻게 씨앗을 심은 자들로 왕을 잡으려는 거냐.’
무언가가 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시스템을 만들어 냈을 리가 없다.
왕들이 그저 유희만을 위해 탑을 세웠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더 많은 비밀이 이 탑에 숨겨져 있었다.
인한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마을의 일을 처리하고, 세계수에서 수련을 하고, 정령술의 수업을 받는 일과는 계속해서 진행됐다.
‘벌써 한 달째인가.’
그 세 가지 일과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여기에 일주일 전부터 한 가지 일과가 추가됐다.
영약 제조였다.
삼 주째 되는 날, 필요한 재료가 모두 준비되었다.
그때부터 인한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며 영약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번 영약은 몇 시간 만에 만들어지는 양산형이 아니라, 며칠에 달하는 시간이 걸리는 고급품이었기에 인한은 충분히 여유를 두고 영약 제조를 해 갔다.
그러던 중이었다.
“킁킁! 이게 무슨 냄새지?”
비싼 재료가 듬뿍 들어갔기 때문인지, 비주얼도 그렇고 냄새도 상당히 괜찮았다.
마을을 돌아다니던 엘프 아이들 몇 명이 냄새에 이끌려 왔다가 마을 외곽에서 인한을 발견하고, 어른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다.
마을의 어른들은 궁금증에 인한의 곁으로 다가왔고, 눈을 빛냈다.
“오호? 이건 또 재밌는 방식이군. 만드라고라를 중탕시켜서 물을 뽑아낸다?”
엘프들은 약초와 마력초 제조에 있어서는 최고의 실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인간의 과학력도 우습게 볼 게 아니었다.
최신 기술로 연구한 인간들의 영약 제조 기법들은 엘프들에게 있어 신세계나 다름없었다.
색다른 재료 손질 방법과 조합법을 본 엘프들은 상당히 흥미로워하며 인한이 영약을 제조하는 과정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 유리잔은 뭔가?”
“비, 비이커? 뭐?”
“스포이드? 허어, 저렇게 계량하면 정확하겠군!”
“거기서 중탕이라!”
“이게 뭐라고? 에탄…… 뭐? 킁킁! 이건 술이 아닌가! 허어, 잠깐. 손에 닿으니 바로 기화하는군?”
어느 순간부터 마을에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마을 외곽에서 제조하는 것이 의미가 없게 되어 버렸다.
엘프 마을에서 약초와 마력초에 일가견 있다는 원로 엘프들이 인한을 둘러싸고 이것저것 물어 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저도 도와도 되겠습니까?”
그러던 중, 일란이 인한에게 그렇게 말해 왔다.
그걸 시작으로, 마을의 많은 원로들이 인한의 영약 제조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있는 레시피와 엘프들의 기술까지 합쳐지자 점점 더 일의 규모가 커져 갔다.
회귀 전에 팔면 그야말로 억 소리가 나는 전설 속의 약초들도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쯤 지나자, 인한이 큼직한 방향만 제시하고 사실상 엘프들이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전설 속의 넥타르가 만들어지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전설 속의 영약.
그 맛은 천상의 술과 같고, 한 번 마시면 영생을 살 수 있다는, 엘릭서와 동급으로 치부되는 아이템이었다.
회귀 전에는 특별한 퀘스트를 클리어해 낸 헌터 하나가 세상에 공개하며 알려졌었다.
그 퀘스트의 보상인 넥타르가 바로 엘프들이 만든 영약이었다.
‘불 조절은 불의 정령에, 들어가는 물은 물의 정령이고…… 이거 무슨…….’
그뿐 아니라 마력초 손질에는 마법까지 들어갔다.
이쯤 되니 인한도 대체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돼 버렸다.
“아아! 자네는 이제 필요 없어! 우리가 나머지 작업을 해 두겠네!”
“자자! 거기 잡담 그만하고 드라반의 뿔이나 갈아!”
“자, 집중합시다!”
결국 인한은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우울한 표정의 인한을 보며 일란이 살짝 멈칫했지만, 인한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그러면서 슬쩍 뒤를 한 번 돌아본 인한은 이내 엘프 마을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며 걸음을 옮겼다.
쿵!
그때, 갑자기 멀리서 진동이 울려 퍼졌다.
몬스터와 몬스터가 부딪치기라도 한 걸까.
가끔 저런 소리가 나기 때문에 인한은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쿠웅!
기이한 진동은 다시 한 번 났다.
상당히 먼 곳에서 울리는 진동이었다.
인한은 눈가를 찌푸리며 마력을 퍼뜨렸다.
콰아아앙!
또 한 번의 진동.
인한이 눈을 빛냈다.
‘마력이다!’
그때, 옆쪽에 있던 나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반자여.
“저도 느꼈습니다.”
-북쪽 결계라네. 자네와 같은 여행자가 찾아왔다네. 이미 그자에게 한 번 경고를 했지만, 아랑곳 않고 몬스터들과 함께 숲을 부수고 있네!
인한이 고개를 끄덕이고 땅을 박찼다.
콰앙! 콰앙!
진동은 점점 더 크게 느껴졌다.
인한의 표정이 그에 따라 더욱 굳었다.
‘또 만나다니.’
이 진동의 정체를, 인한은 알고 있었다.
‘발터 에스키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