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
<공략자들 154화>
꿈을 꿨다.
머나먼 과거의 일이었다.
그곳에는 탑이 있었고, 세상은 몬스터 웨이브에 의해 몇 번이나 멸망의 위기에 밀어 넣어졌다.
많은 사람이 탑을 올랐다.
한 층 한 층, 오르면 오를수록 사망자는 늘어 갔다.
그러다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하면 그 사망자의 수백 수천 배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다.
그게 몇 번이고 반복되고, 끝내 남은 사람이 그 혼자가 되었다.
그때, 그의 눈앞에 순백의 새가 내려왔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네 쌍의 날개가 그를 감쌌다.
-다시 시작해 보지 않겠나?
그를 구원하기 위해 내려온 천사인 걸까.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모든 게 시작됐다.
박철환은 천천히 눈을 떴다.
등이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했다.
박철환이 충혈된 눈을 비볐다. 피곤함을 풀고자 잠에 든 것이었는데, 도리어 더 피곤해진 느낌이었다.
“쯧.”
박철환은 혀를 차며 축축하게 젖은 윗옷을 갈아입었다.
안전지대 바깥으로 가자, 35층 특유의 고풍스러운 유적지 곳곳에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지겨울 정도로 익숙한 풍경이었다.
박철환이 검을 뽑아 들었다.
위이이이이잉!
거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오러가 구원의 검에 휘감겼다.
뻗어 나간 일격에 사방이 초토화가 됐다.
포탄이라도 떨어진 듯 박살 나 버린 필드의 풍경을 노려본 박철환은 다시 한 번 혀를 차며 검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 * *
1층 푸른 물의 마을.
탑이 개척되기 시작하며 1층의 마을도 4개에서 6개로 수가 늘어났다.
그중 푸른 물의 마을은 필드의 가장 북쪽에 있는, 넓은 강을 낀 곳이었다.
풍광이 좋고 마을 주변의 몬스터 수도 꽤나 적기 때문에 푸른 물의 마을은 초보 헌터나 튜토리얼만 끝낸 관광객이 많은 곳이었다.
손때 묻지 않은 울창한 필드의 자연 환경 속, 현대식 건물이 솟아 있는 마을의 모습은 제법 멋들어지게 보였다.
그런 푸른 물의 마을, 서쪽 거리의 골목길.
정말 손님이 찾아오기는 하는 걸까 걱정될 정도로 깊숙한 곳에 있는 작은 주점의 문이 열렸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주점의 카운터에서 얼굴에 칼자국이 있는 한 프랑스인 사내가 말했다.
장 플뢰르, 헬 하운드의 간부였다.
그리고 그가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사내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명뿐.
“술은 됐으니까 물이나 가져와.”
“예, 알겠습니다.”
새하얀 피부에 새빨간 입술이 도드라지는 사내, 레오 뒤보아였다.
레오는 푹신한 소파에 털썩 앉았다.
곧 크리스털 잔에 얼음물을 담아 온 장이 레오의 앞에 공손한 자세로 섰다.
“요즘은 어떻지?”
“나쁘지 않습니다. 암암리에 조직의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현 랭킹 2위인 주인님의 이름이 주효했습니다.”
조직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갔던 헬 하운드였지만, 그들은 곧 회생에 성공했다.
조직의 구조를 바꾼 덕분이다.
헬 하운드는 뭉쳐 있는 것을 버리고 점조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헬 하운드라는 이름 자체도 소수의 조직원과 간부들만 알 뿐이고, 조직의 이름조차 블랙 스네이크, 건맨, 블러드 크립 등의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 덕에 조직적인 힘 자체는 떨어지지만, 탑의 전역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추세였다.
“퇴역 군인, 용병들이나 원래 킬러를 하고 있던 자들도 영입하는 중입니다. 조금 규모를 키운다면 유럽권을 벗어나서 움직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약 쪽 사업도 꽤 만족스러운 수준까지 올라간 상황입니다.”
사실 헬 하운드의 주 무대는 검은 탑보다는 탑의 외부였다.
아무리 검은 탑이라는 위험이 세상에 존재한다 한들, 인간들 간의 분쟁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치, 경제, 종교적인 분쟁은 몬스터 웨이브로 인해 몇 개의 국가가 무너지는 상황 속에서도 벌어졌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탑이 개척되며 평화로워진 세상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 명 한 명이 엄청난 전술적 가치를 가지는 헌터들을 원하는 곳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전쟁 지역은 물론이거니와 요인 경호와 심지어는 암살까지.
아직 조직 규모를 키우고 있는 중이었지만, 앞으로 2년만 있으면 ‘이쪽’ 사업은 독점할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이 될 정도였다.
“그런데 주인님, 주인님께선 대체…… 무엇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레오는 공식적으로는 조직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뗀 상태였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몇 가지 일을 장을 통해 시키고 있었다.
그 일의 종류가 상당히 통일성이 없기에 의문만 가증되어 갔다.
“생각보다 더…….”
레오가 얼음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탑이란 곳은, 재밌더군.”
“……예?”
레오는 더 이상의 말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발터와 자신, 그리고 최인한이란 사내 정도가 별종이라고 생각했거늘, 박철환이란 놈도 괴물이었다.
4년 전, 레오는 박철환과 클라우스와 부딪혔다.
결과는 자신의 패배.
무명의 헌터라고 여겼던 박철환은 생각 이상으로 강했고, 그의 옆에는 클라우스까지 붙어 있었다.
반나절간 접전에 접전을 이어 갔지만, 마력량과 머릿수로 우세를 점한 박철환에게 이길 수는 없었다.
‘금제(禁制)라…….’
박철환은 레오를 제압하고 레오의 마력원에 자신의 마력을 집어넣었다.
박철환은 그것을 금제라고 표현했다.
억지로 제거하려고 하거나, 그의 의지에 반하면 바로 터뜨려 버리겠다고 했다.
육체가 다치면 재생하면 될 뿐이었지만, 마력원이 무너진 후에 그것이 회복될지는 미지수였다.
사실 별로 상관없지만, 레오는 박철환을 따르기로 했다.
이유는 별거 없다.
단지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맞았다.
박철환을 따라다니는 것은 생각보다도 굉장히 재밌었다.
그는 기이할 정도로 탑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마치 이전까지는 일부러 약한 상태를 유지하기라도 한 듯 경이적인 속도로 강해져 갔다.
‘재밌어. 아주.’
레오는 미소를 지었다.
발터 에스키엘, 최인한, 박철환…….
그 외에도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는 괴물 같은 놈들.
이 탑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이 흥미로운 곳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조사를 부탁할 게 있다.”
“말씀하십시오.”
“길드 하나를 알아보고 싶어.”
“길드…… 말씀이십니까?”
장이 조심스럽게 묻자, 레오가 미소 띤 열굴로 대답했다.
“해태 길드. 그들에 대해 알아 와.”
* * *
루한은 인한과 이별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는 거니까 뭐라도 선물로 주는 게 맞겠지.”
“예?”
“정령술 잘 쓰고 싶잖아?”
“네, 그렇습니다만.”
“조금 위험할 수도 있는 방법이기는 한데, 원래 강한 힘을 가지는 데는 그만큼 위험이 따르는 법이잖아? 어때, 해 볼래?”
인한은 눈을 빛냈다.
강해지는 데 위험이 동반되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인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루한은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고는 인한의 미간을 툭 건드렸다.
“너무 힘들다고 후회하지 마라.”
강해지는 건데 후회할 리가 없다.
인한은 굳은 눈을 하고 다짐을 새로 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콰아아아아!
인한은 몰아치는 속성력의 파도에 힘겹게 저항했다.
지금 인한의 의식은 현실에서 한 발자국 벗어난 상태였다.
인한이 있는 곳은 정령들만 인식하고, 정령들만 있을 수 있는 세계였다.
-이자가…….
-우리는…….
수많은 정령들의 사념이 인한의 내부로 들어왔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그 정령들이 느끼는 모든 감각이 날것 그대로 느껴졌고, 극도로 순수한 존재인 정령들이 느끼는 감각은 인한에게 고통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어떻게 빠져나가란 거야!’
인한은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루한은 인한에게, 이곳에서 탈출하라는 말만 한 후에 사라졌다.
다만 그 전에 했던 말이 있기는 했다.
루한은 목숨을 담보로 한 이 게임에서 성공한다면, 속성력을 다루는 방식이 눈에 띄게 늘어날 것이라 했다.
또한 정령의 사념을 온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정령과의 친화력도 증폭될 것이란 것이라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었다.
‘크윽…… 이건…….’
슬슬 한계에 도달하는 기분이었다.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며, 방출해 내던 속성력의 힘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정신 똑바로 잡거라.
목소리보다는 의식을 그대로 보내는 듯한 느낌.
실리암이었다.
실리암도 정령인 바, 흘러들어 오는 사념 속에 그가 있었던 것이다.
-그저 버티기만 하면 답이 없다. 왜 인간들은 이렇게 어리석은지 모르겠군. 고작 그 작은 몸과 정신으로 그 많은 자연의 힘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가?
실리암의 목소리는 곧 수많은 정령들의 사념에 파묻혔다.
하지만.
-그냥 휩쓸려라. 흘려보내면 되는 것이다..
그 말은 똑똑히 들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눈앞에 태풍이 몰아치는데 거기에 휩쓸리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인한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 어디 해 보자!’
인한은 휘몰아치는 속성력에 몸을 실었다.
* * *
“헉!”
인한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두컴컴한 방이었다.
익숙한 풍경에 인한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여긴 집이잖아?’
엘프 특유의 생목 안에 지은 집이라는 것을 깨달은 인한이 눈을 껌뻑였다.
끼익!
그때,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여성의 실루엣을 하고 있었다.
‘일란?’
어두컴컴했지만, 인한의 눈이 이 정도 어둠에 사람을 착각할 정도로 어두운 것은 아니었다.
일란이 풀을 엮어 만든 바구니에 각종 과일을 넣은 것을 들고서 안으로 들어섰다.
“일란……?”
“일어나셨군요.”
“제가 왜 여기에?”
“공터에 쓰러져 계시기에 이쪽으로 데려왔습니다. 몸에는 문제가 없으셨는데, 피곤하셨나 보군요.”
“예? 아, 네.”
인한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정신이 깨어나는 기분이었다.
‘성공했나?’
적어도 죽지는 않았으니 성공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한은 몸의 내부에 흐르는 속성력의 흐름에 집중했다.
마력로를 통해 흐르는 마력과는 다르게, 속성력은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헉!’
인한은 흠칫 놀랐다.
원래 운용하던 양보다 훨씬 많은 양의 속성력이 쌓여 있었다.
이 정도면 샐러와 실리암 정도의 정령을 한 마리 더 사역해도 넘칠 정도였다.
인한은 내친김에 실리암과 샐러와 교감을 시도했다.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어지간히 어수룩한 계약자로군.
인한이 흠칫 놀랐다.
명확한 실리암의 의식이 전해져 왔다.
‘샐러는?’
-…….
샐러의 것처럼 느껴지는 의식이 있기는 했지만, 실리암처럼 확연한 자아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나는 창조주께서 불어넣어 주신 속성력이 일부 남아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직 이 아이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계약자여, 당신이라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인한이 놀라 하는 동안, 일란이 인한이 누워 있던 침대 옆에 다소곳이 앉았다.
일란이 인한의 눈을 직시하며 물어 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