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153화 (153/266)

# 153

<공략자들 153화>

잠시 대화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루한은 실리암과 자잘한 대화를 나눴다.

인한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주위가 조용해졌을 때 입을 열었다.

“그럼 탑의 원주민들은 전부 왕에 대해 알고 있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야. 부족의 족장들만 알고 있지. 부족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이 어째서 탑에 있는 건지, 탑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을 것이다. 거기다 알고 있어도 말할 수 없게 영혼이 붙잡혀 있겠지.”

그때 문득 세릴이 떠오른 인한이었다.

탑의 원주민이면서도 계약을 이어 낸 씨앗 보유자.

“묘족에게 씨앗이라. 어지간히 특이한 왕도 있었나 보군. 아마 뿔이 솟은 이유도 탑의 원주민이기 때문일 것이다. 네 마력이 내부를 휘저어 놓았기 때문에…… 완전히 몬스터가 되지 않고 살아난 것이겠지.”

또 생각을 읽어 낸 루한의 말에 인한이 눈을 빛냈다.

“씨앗이 무엇인지 알고 계시는군요.”

“그래, 알고 있다.”

“그럼…… 씨앗을 가진 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십니까? 그토록 절대적인 힘을 갖게 된 왕들이 대체 씨앗을 사람들에게 심어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그건 예전부터 계속되어 온 의문이었다.

씨앗은 힘의 꽃봉오리다.

천문의 격을 높여 원래라면 접촉할 수 없는 아발론에 대한 것들을 알게 해 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계약에 따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힘마저 얻게 해 준다.

그런데 왜 굳이 절대적인 존재인 왕들이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는 걸까?

“나도 모른다. 그것이 무슨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놈들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도 예상조차 가질 않아. 애초에 그런 정신병자 같은 놈들의 생각을 짐작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비웃음을 띤 채 말하는 루한이었지만, 인한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루한도 모르는 일이라니.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아직 물어봐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라.”

“이 탑, 대체 뭐 하는 곳입니까?”

인한의 말에 루한이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뭐 하는 곳이냐는 말은?”

“차원과 차원을 연결할 수 있으며, 세계의 정수를 갈취할 수 있고, 몬스터들을 거주하게도 하다니…… 대체 이게 뭐기에 그런 것이 가능한 겁니까?”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왕에 대한 궁금증만큼이나 탑에 대한 궁금증이 늘어만 갔다.

이 정도의 공간이 그저 유희를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일까?

왕들조차 차원 간의 이동을 하려면 엄청난 손해를 보는 것 같았다.

리시피르의 경우엔 직접 그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으며, 아르테너스는 본체로 오지 못하고 분신으로 왔다.

그런데 어떻게 이 탑은 그런 제약을 뛰어넘는 것일까.

“흐음, 아주 제대로 된 질문을 해 왔군.”

루한이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하지만 모든 걸 말해 줄 수는 없다. 내가 전부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니 아는 것만,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말해 주지.”

루한이 인한을 잠시 바라보며 말해 줄 내용을 고르는 동안, 인한은 긴장한 채 루한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루한이 입을 열었다.

“왕은 세계에 의해 예정된 자가, 왕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한 뒤에 될 수 있다.”

“그건 이미…….”

이미 들은 내용이었다.

인한이 반박하려는 순간, 루한이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왕으로서의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이곳, 검은 탑이다.”

* * *

루한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엘프들의 곁을 지나가도 아무도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누구도 낯선 존재인 루한에게 말을 걸지도, 제지하지도 않았다.

하물며 루한이 걸어가는 쪽을 가로막고 있던 남자 엘프는 무의식중에 길을 비켜섰고, 루한의 뒤쪽으로 돌진해 오던 어린 엘프는 자연스레 다른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들은 갑작스러운 자신의 행동에 의아함조차 느끼지 않았다.

마치 귀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루한은 엘프들의 의식에서 멀어져 있었다.

‘쯧.’

루한은 혀를 찼다.

자신의 자식에게 외면당하는 부모라.

자식에게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셨습니까.”

그중 유일하게 루한을 알아보는 자가 있었다.

드반이었다.

그는 세계수의 앞에서 공손히 손을 모은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고한다.”

“아닙니다. 그저…… 죄송할 따름입니다.”

루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고, 드반이 천천히 물었다.

“거기서 보는 이곳의 모습은 어떠십니까?”

드반이 물었다.

루한이 피식 웃었다.

“뭐가 어때. 다 똑같지.”

루한을 중심으로 일정 부위의 세계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주변 풍경과 비슷하지만, 조금 더 녹음이 짙었고 나무의 크기도 컸다.

루한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세계의 일부가 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드반이 있는 곳과도 다른 공간.

분명 비슷한 풍경이지만,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채 긴 시간이 흐른 듯해, 원래의 모습과는 약간 이질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이쪽에 침입하기 위해선 공간을 일시적으로 이어 붙이는 방법밖에 없었다. 미안하지만 이쪽에 내가 영향을 줄 수 있는 게 한정된 이유기도 하지. 에잉, 빌어먹을.”

드반이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듯 입을 뻐끔댔지만, 곧 입을 꾹 닫았다.

그 모습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지켜보던 루한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내가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 알 텐데.”

“아…….”

“왜, 내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

루한의 말에 드반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상관없다. 뭐…… 궁금할 만하지.”

“그, 그것이 아니라. 그저 제가 어릴 적 뵈었을 때와는 너무 달라지셔서…….”

드반은 오래전 루한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름답고도 신비한 외모와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물론 그 외적으로 비춰지는 모습은 지금도 여전하다.

하지만 당시 루한의 주위에서는 불어오던 바람도 잠시 쉬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현명한 숲의 아버지.

루한은 한 종족의 왕보다는 그런 식으로 여겨졌던 존재였다.

“그건……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구나. 그 도마뱀 놈과 모든 것을 공유할 때 성격도 일부분 뒤섞인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새에 이따위…… 크흠! 이렇게 말투가 바뀌어 있었다.”

“아, 그렇군요.”

드반은 옛 비사(祕史)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이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납득할 수 있었다.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흘렀다.

말없이 가만히 있던 루한이 천천히 세계수 넬레바나에게 다가가 그 기둥 같은 줄기를 쓰다듬었다.

“이게 내가 열네 번째로 심은 세계수였는데 말이야. 참 많이도 컸어.”

“그렇습니까?”

“엘프들은 가장 많이 나를 닮았지만, 동시에 육체적으로는 나와 너무 달랐지. 마력이나 정령과의 친화력은 뛰어났지만 몸이 종잇장이었어. 생명체로서 답이 없을 정도였다. 그 대책을 강구하다 생각해 낸 것이 이 세계수였어.”

“예, 선대에게 들었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선대라…….”

루한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너, 이게 몇 번째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생각이 다 보이는군. 벌써 백 번도 넘었다고?”

“…….”

드반이 입을 꾹 닫았다.

“검은 탑은 세계를 집어삼킬 때마다 내부의 모든 걸 처음으로 되돌리지. 그리고 그건 몬스터가 아닌 존재도 마찬가지야.”

루한은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마쳤다.

“다만, 부족의 관리자는 기억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었지.”

어느새 드반의 표정이 고통스럽게 굳어 있었다.

루한이 드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역시, 수고가 많았다.”

드반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또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루한은 이어 붙인 공간의 접합면이 점점 줄어드는 걸 느꼈다.

“시간이 다 됐군.”

“벌써 가십니까?”

“그래, 나도 어쩔 수가 없다. 이것도 꽤 무리를 한 거라서 말이야.”

루한은 공간의 단면을 바라보았다.

색을 덧칠하듯 루한이 서 있는 녹음이 짙은 공간이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루한은 굳은 표정의 드반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

“너무 걱정 마라.”

“예?”

“솔직히 그 도마뱀의 끄나풀인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놈은 물건이다. 헛된 희망을 주기는 싫지만 확실한 건, 지금까지와는 다를 거라는 사실이다. 그놈에게 힘을 실어 주거라.”

“……예, 알겠습니다.”

드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새 공간은 점점 더 줄어들어, 루한의 몸만 보이게 될 정도였다.

“아, 그리고, 내가 뭘 좀 해 뒀으니까 지금은 그놈을 건들지 말거라.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해라. 아니, 이 수고하라는 말만 몇 번째 하는 거야?”

“하하! 감사합니다, 왕이시여.”

드반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루한은 싱긋 웃으며, 모습을 감췄다.

* * *

인한은 몰아치는 속성력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4대 정령을 비롯한 수많은 정령들이 인한의 주위를 정신없이 휘몰아쳤다.

‘크으윽!’

-여기야!

-나를 가져가!

-나랑 놀자!

-흥! 부족한 것들!

수많은 의식이 인한의 몸에 들어왔다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상황을 주도하기는커녕 의식의 흐름에 버티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잠깐 집중을 풀면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아, 정신을 잃으면 그걸로 끝이니까 알아 두거라. 그 정도 패널티는 있어야지?

루한의 말을 떠올리며 인한은 이를 악물었다.

인한의 내부에서 속성력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버텨 낸다!’

인한은 부들부들 떨면서도 덮쳐 오는 의식의 파도에 힘껏 저항했다.

* * *

35층 필드, 레지스.

비가 내리기라도 할 것인지 35층 필드의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그때, 달빛도 별빛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무언가가 하늘에서 움직였다.

화악!

어둠 속에서 한줄기 폭풍과 같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그러자 하늘을 가리고 있던 먹구름이 순식간에 걷히며 밤하늘이 드러났다.

달과 별의 빛에 세상이 밝아지자, 먹구름을 걷어 낸 존재의 모습이 드러났다.

네 쌍의 날개를 가진 순백의 괴조.

날갯짓을 하는 것만으로 먹구름을 걷어 낼 정도로 거대한 크기의 괴조가, 하늘을 유영하듯 날아다니다 천천히 지면에 내려앉았다.

콰르릉!

그러자 수많은 유적이 산산조각 나며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괴조는 필드가 무너지는 것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리고 그 거대한 파괴의 현장, 괴조가 내려앉은 바로 앞에 한 사내가 있었다.

준수한 외모에 날카로운 눈빛이 인상적인 사내.

박철환이었다.

“아르테너스를 처리한 자의 정체는 찾았나.”

괴조, 아니, 지혜의 왕의 질문에 박철환이 고개를 숙였다.

“현재 찾는 중입니다.”

“생각보다 굼뜨군. 기대했는데 말이야.”

“……죄송합니다.”

박철환은 고개를 숙인 채, 바득 이를 갈았다.

‘조금만…… 조금만 참으면 된다.’

꽉 쥔 박철환의 주먹에 피가 고였다.

그 모습을 내려다본 지혜의 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래를 잊지 마라. 난 네가 원하는 것을 이미 주었다.”

“예, 알고 있습니다.”

“네가 찾아낸 변수들은 전부 다른 왕의 씨앗이거나, 씨앗조차 없는 자에 불과했다. 아무리 마왕의 씨앗이 숨겨져 있다 한들, 그 정도도 찾아내지 못하는 건가? 이번에도 실패하고 싶은 것인가?”

그 말에 박철환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하지만 곧 눈빛을 바로한 채 고개를 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후후, 시간이라. 왜 그러지? 네가 시간에 대해 말하니 굉장히 재미있게 느껴지는군.”

“…….”

“네가 아니더라도 나의 씨앗은 많이 있다. 너를 내가 눈여겨보고 있는 것은 그저 가장 특이한 개체이기 때문이야.”

괴조는 거기까지 말을 마치고는 날개를 펼쳤다.

“잊지 마라, 거래는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세계를 지키고 싶다면 그만큼 내가 만족할 만한 것을 준비해야 할 것이야.”

괴조는 그 말을 끝으로 모습을 감췄다.

다시금 찾아온 칠흑의 어둠 속.

엷은 달빛을 받으며, 박철환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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