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
<공략자들 151화>
인한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비수가 겨눠진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어. 아니, 지금도……!’
인간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 외모의 사내.
인한은 사내가 다가오기까지,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지금도 사내에 대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껏 만난 수많은 존재들 가운데 이런 자는 처음이었다.
리시피르와 아테리너스와 마주했을 때조차 어느 정도의 격차를 파악할 수 있었건만, 사내에 대해서는 전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자신의 코앞에 있음에도, 거대한 심연을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아득한 기분.
그뿐만이 아니었다.
주위 경관이 변해 있었다.
인한이 있는 곳은 더 이상 볕 좋은 네레바나의 공터가 아니었다.
대신 짙은 녹음이 가득한 숲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인한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굴린다. 뭘 그렇게 긴장해? 내가 한 대 치기라도 할까 봐?”
사내는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거친 말투로 툭 내뱉었다.
“……누구십니까.”
악의로 다가온 건지, 선의로 다가온 건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기운도, 기세도, 기도도.
어느 것 하나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기척도 없이 다가온 자가 좋은 의도를 품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인한은 뒤로 빠르게 뛰어올라 사내를 경계했다.
“허! 이것 봐라?”
사내가 재밌다는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너는 상당한 바보군. 아니면 성가실 정도로 진지한 놈이던지.”
“……!”
후욱!
바람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 든 순간, 사내가 코앞에 나타났다.
빠르게 움직여 거리를 좁히거나, 공간을 이동하는 종류의 이동 방식이 아니었다.
인한은 이런 특이한 이동 기술을 경험해 본 적이 있었다.
하영을 구했던 그때, 처음으로 부딪힌 왕이 사용한 이동 기술이었다.
“큭!”
인한이 다급히 몸을 틀었다.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거론 부족하지.”
사내의 주먹이 휘둘러졌다.
마력이 휘감긴 것도, 오러를 두른 것도, 마법으로 강화한 것도 아닌, 흔하디흔한 어퍼컷이었다.
인한은 다급히 최고 출력으로 올린 오러를 양팔에 휘감아 뻗었다.
그러나.
우드드드득!
인한의 양팔에서 소름 돋는 소음이 흘러나왔다.
팔에 두른 오러는 너무나도 간단하게 뚫려 버렸고, 극체술로 강화된 육체는 사내의 일격을 버텨 내지 못했다.
인한이 축구공처럼 튕겨져 나가 긴 호선을 그리며 지면에 처박혔다.
“끄으으윽!”
꽉 깨문 인한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인한의 팔이 기형적으로 뒤틀린 채 축 늘어졌다.
평생 팔을 쓰지 못할 정도로 박살이 난 팔에서 새빨간 선혈이 울컥울컥 흘러나왔다.
우웅!
인한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고통 속에서도, 본능적으로 마력을 운용해 팔에 집중했다.
극체술이 빠르게 발동되며 심각한 손상을 입은 인한의 팔을 치료해 갔다.
“의외로 약골이군. 버틸 줄 알고 친 건데.”
사내는 실망했다는 듯 중얼거렸다.
인한으로서는 울화통이 터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왕의 공격마저 버텼던 육체를 붕괴시켜 놓고 하는 말이 저거라니!
얼마 지나지 않아 팔을 회복한 인한은 비틀대며 일어섰다.
마력이 환부에 파고든 것도, 사내가 추가타를 날리고자 다가온 것도 아니기에 회복이 빨랐다.
인한은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심호흡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체 당신은 누구기에 저를 찾아온 겁니까?”
오히려 격차를 알고 나니 편안해졌다.
상대가 언제라도 자신을 죽일 수 있는 힘을 가졌음을 느끼자, 오히려 경계하는 데에 심력을 소모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런데 사내는 고개를 한 번 갸웃거리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먼저 물어봤을 텐데? 너, 뭐냐고.”
아무리 들어도 적응되지 않는 말투였다.
인한은 다시 한 번 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말했다.
“최인한이라 합니다.”
“아니, 이름을 물은 게 아니라…… 하아, 이해를 못하는 건가?”
“예?”
인한은 사내의 질문이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여전히 멀뚱거리는 인한을 보며, 사내가 짜증 섞인 말을 내뱉었다.
“기껏 쓸 만한 재목을 찾았다고 생각해서 예언도 내리고, 상황도 맞추느라 고생에 고생을 다 했는데…… 정작 만나고 보니 그 도마뱀 자식의 입김이 닿아 있는 놈이라니. 그런 주제에 내 아이들의 마을에 온 건 무슨 배짱이지?”
인한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목? 도마뱀 자식? 아이들의 마을?
인한의 표정을 읽은 것일까. 사내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 설마 아무것도 몰라? 그럴 리가 없는데?”
인한을 노려보듯 바라본 사내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말 모르는군. 내 알 바는 아니다만, 대체 그 도마뱀 자식…… 무슨 생각이지?”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인한에게 입을 열었다.
“나의 이름은 루한, 루한 아르페리어. 세계수의 화신이자, 뭇 요정들의 왕이라 칭해지는 자다.”
* * *
박철환은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성된 자리에 내려앉았다.
“여긴가.”
일전에 인한과 아테리너스가 전투를 벌였던 장소.
그곳에 도착한 박철환은 지면에 새겨진 파괴의 흔적들을 살펴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발터인 줄 알았지만…… 아니군.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
흔적들을 되짚으며 걸음을 옮기던 박철환이 어느 순간, 한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건데 말이야.”
마치 넘실대는 파도가 스쳐 지나가기라도 하듯, 지면에 새겨진 기이한 상흔을 보며 박철환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변수가 있군. 하지만 마왕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아…….”
그러다 박철환은 주위를 한 번 둘러본 후,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자가 누군지 알 수 없지만, 한번 찾아 봐야겠군. 만약 알아낸 다음 처리할 수만 있으면…… 꽤 만족스러운 점수를 얻을 수 있겠군. 고맙게도 말이야.”
박철환은 다시 한 번 날개를 펼쳤다.
일곱 군주, 그중 지혜의 왕과 너무나도 닮은 네 쌍의 날개를.
* * *
“왕……?”
인한의 표정이 급속도로 굳었다.
요정들의 왕이든 무슨 왕이든, 인한에게 왕이란 그리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쯧, 그런 반쪽짜리들과 비교하지 마라. 애초에 나는 왕의 좌를 얻지도 않았다.”
인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는 것일까.
루한은 아까 전부터 인한이 말을 하기도 전에 선수를 치고 들어왔다.
“눈치도 느리군. 그렇다.”
“예?”
“생각을 읽는 것을 말하지 않았나? 그래, 네 생각을 읽었지.”
“……!”
놀라 하는 인한을 바라보며 루한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걱정하지 말도록. 난 네놈이 생각하는 왕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그와 비슷한 존재인 것을 부정하진 않겠지만, 그 일곱과는 다른 존재다.”
일단 믿기로 했다.
미드 코어는 별다른 위험을 알리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한은 루한에게서 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동질감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루한 탓에 확실치 않았다. 그저 애매모호한 감에 가까웠다.
“동질감이라…… 그래, 아주 둔감한 건 아닌 모양이군.”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네가 내게 동질감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나?”
인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런 것, 알 수 있을 리 없다.
“정말 그럴까?”
루한의 목소리가 뇌리에 파고들었다.
인한의 눈이 서서히 커다래졌다.
머릿속에 걸려 있는 자물쇠의 일부가 루한의 소리에 반응하여 풀어진 것이다.
머나먼 과거, 전설이라 칭해지는 신화의 시대.
삼대 종족의 정점들이 모여, 원래라면 이루어질 리 없던 힘의 이론을 만들어 냈다.
인간의 영웅과 용의 왕과 요정의 왕이 서로의 것을 공개하고 공유했다.
용의 압도적인 마법의 힘을.
요정의 신비로운 자연의 힘을.
인간의 처절한 삶의 염원을 담은 힘을.
세 가지 힘이 한곳에 모이자, 세계의 이치로는 만들어질 수 없었던 거대한 특이점이 발생했다.
‘그 힘의 이름이…….’
트리아스 액셀.
처음에는 단순한 내기에서 시작했지만, 세계의 규칙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진 힘의 이론.
인한의 눈이 서서히 커다래졌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인한을 보며, 루한이 유쾌하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정답이다.”
루한, 그가 바로 트리아스 액셀의 창시자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인한은 그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낀 것이었다.
“흐음, 그건 그렇고 머릿속에 재밌는 장난질을 해 놓았군. 일정한 키워드, 혹은 정해진 상황에 맞춰서 해제되는 구조인가. 나조차도 알아보기 힘들다니……. 아! 그렇군, 아리아인가.”
인한은 루한을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인한의 눈이 루한의 주위를 맴도는 실리암에게로 향했다.
실리암은 마치 잃어버린 주인에게 돌아가기라도 한 듯 루한에게 극도의 친근함을 표현했다.
루한이 피식 웃었다.
“쪼잔한 놈. 질투라도 하는 것이냐? 아무리 계약을 했더라도 이건 어쩔 수 없다. 난 이 아이의 창조자이자 옛 주인이니 말이야.”
인한의 눈이 커다래졌다.
“당신이 실리암의 창조자란 말씀입니까?”
“그래. 그런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왜 이렇게 힘이 약해졌지?”
루한이 실리암에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인한의 숨이 턱 막혔다.
루한에게서 거대한 힘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와 사위에 퍼져 나나간 것이다.
‘속성력만으로?’
속성력은 마력에 비해 외부에 작용하는 힘의 영향이 적다.
그 대신 정령술이 동반되어야만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통은 속성력이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적었다.
그런데 루한은 속성력을 방출하는 것만으로 세상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우우우우웅!
실리암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사방에 돌풍이 몰아쳤다.
그리고 그 돌풍 속에서, 루한의 것도 인한의 것도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조주시여, 실로……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짙은 현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인한은 그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계약을 할 당시 들었던 실리암의 목소리였다.
“그래, 오랜만이다. 잘 지냈느냐?”
-예, 왕이시여.
실리암의 목소리에서 짙은 반가움과 애틋함이 느껴졌다.
“네 새 주인은 상당히 까다로운 자로구나. 고생이 많겠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왕께서 주셨던 것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음? 내가 주었던 것?”
-그와 함께하면, 자유롭습니다.
“하하! 그렇다니 다행이구나. 어떻게 널 꼬드겼나 했더니, 그런 걸로 구슬린 것이었어?”
실리암이 인한을 바라보았다.
인한은 순간 움찔했지만, 실리암은 짙은 애정 섞인 눈으로 인한을 바라보았다.
“좋군. 흐음, 원래라면 후계자도 못 구했겠다, 그냥 돌아가려 했더니만……. 이거 상이라도 하나 줘야겠군. 내 자식을 돌봐 줬으니 말이야.”
루한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인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가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는 권한을 네게 상으로 주도록 하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그 선 안에서라면 무엇이든 대답해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