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공략자들 150화>
“모든 속성에 다 자질을 보인다니…… 이게 대체.”
일란은 당황한 표정으로 인한이 벌여 놓은 일을 확인했다.
불, 물, 바람, 땅의 기본 4대 정령부터 시작해서 돌, 번개 등의 하위 정령들까지.
‘이런 건 본 적이 없어.’
일란은 큰 혼란을 느꼈다.
딱히 많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정령사로서의 자질이 뛰어나다는 것은 아니지만, 4대 정령 모두와 계약할 수 있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유구한 세월을 사는 엘프의 역사 속에서, 그런 정령사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재능이나 노력, 가능하거나 불가능하거나를 따지기 이전에, 정령술에 있어서 당연하게 여겨지는 불변의 법칙 중 하나였다.
인한의 주위를 둥둥 떠다니는 정령들을 바라보던 일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건 나무의 정령?’
인한의 옆에 온몸이 딱딱한 나무껍질로 되어 있는, 소년 요정의 형상을 한 정령이 있었다.
세계수를 신체에 이식한 엘프만이 계약할 수 있는 정령인 나무의 정령이 인한에 의해 소환된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
보고도 믿겨지지가 않았다.
‘설마…….’
일란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녀의 머릿속에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는 오래된 역사서에 적혀 있던 내용이 떠올랐다.
아니, 역사서라기보다는 신화나 전설에 가까운 책이었다.
“저…… 이건 대체 무슨 일이죠?”
한편, 인한이 일란을 바라보며 물었다.
정령술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는 인한으로서도 이게 정상적인 일이 아니란 건 알 수 있었다.
일란이 급히 표정을 수습했다.
하지만 놀란 목소리까지는 숨길 수 없었는지, 다소 높게 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도 처음 겪는 일입니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군요.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죠. 저는 급히 가 봐야 할 곳이 생겨서 그러니, 인한 씨는 계약한 벗들과 교감하는 일을 계속해 주세요.”
“예? 아, 알겠습니다.”
일란은 그렇게 말하고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인한은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정령들이 사라질 때까지 그들을 구경하다, 샐러와 실리암을 소환했다.
* * *
일란은 엘프들의 비술과 넬레바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서고로 향했다.
서고는 세계수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벽돌로 지은 건물이었다.
원래 넬레바나의 모든 건물은 살아 있는 나무를 통해 만들지만, 그랬다가는 벌레들 때문에 책이 모두 상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예외적으로 땅의 정령을 통해 제작한 건물이었다.
“분명…….”
일란은 서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릴 적, 그녀는 숲을 뛰어놀거나 나무를 타는 것보다 서고에 앉아 책을 잃는 것을 더 좋아했다.
책 속에 담겨져 있는 지식은 그녀를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 주었다.
마을의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아인종의 다른 찾아 돌아다니며 책을 모으기도 했었다.
‘……뭐?’
일란이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인종의 다른 종족들이라니.
그녀는 태어나서 지금껏 36층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너무 놀라서 착각이라도 한 모양이야.’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한이 보여 준 것은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일란은 몇 개의 양피지와 나무껍질로 만든 책들을 뒤적였지만, 원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 책은 찾지 못했다.
족히 백 수십 년 전에 읽었던 내용이기에 정확히 어떤 형태의 책에 적혀 있는지도 가물가물했다.
‘아.’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책장을 뒤지던 그녀는 이윽고 커다란 가죽 양장본을 하나 찾아냈다.
거짓말 조금 보탠다면 화살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두꺼운 책이었다.
그 책은 다른 책들과는 달리 좀이 먹거나, 곰팡이가 슬거나, 색이 바라지 않았다.
먼지가 조금 쌓이긴 했지만 새 책처럼 깔끔했다.
“콜록! 콜록!”
책장을 펼치자 위에 쌓여 있던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 책은 삼대 종족에 관한 이야기였다.
용족, 요정족, 인족.
용족은 강인한 육체, 태어날 때부터 타고나는 높은 마력량, 고도로 발달한 마법을 바탕으로 최강종이라 일컬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의 수호자였다.
요정족은 자연의 친구이며, 일부였다.
그들은 조화와 평화를 추구하며 자연을 가꾸고 보호했다.
자연의 힘의 일부를 다룰 뿐인 용족과 인족과는 달리, 요정족들은 자연과 일체화가 되어 그 힘을 다뤘다.
그 환상적인 모습에 다른 이들은 그들을 환상종이라 불렀다.
마지막으로, 인족은 가장 연약한 종족이었다.
삶의 길이도, 가진 힘의 크기도 작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들은 어떤 종족보다 눈부신 발전을 이뤄 냈다.
짧은 삶이기에 누구보다 처절히 노력했고, 자신의 생명을 불태웠다.
그들은 모두 사람의 형상을 취하고 있었기에 아인족이라 불렸다.
‘다 아는 이야기야.’
일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책장을 넘긴 순간, 챕터가 바뀌었다.
설명조로 진행되던 문장이, 옛 이야기를 하듯 서술로 달라져 있었다.
새로운 내용에서는 아직 아인족이 삼대 종족 중 하나가 아니었을 무렵의 일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그 머나먼 과거, 용족과 요정족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용왕과 요정왕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
힘을 추구하며 세계의 이치를 탐구하는 것에 집중하는 용왕과 조화를 추구하며 세계를 가꾸는 요정왕은 성질부터 크게 달랐다.
그들의 힘은 성질이 달랐고, 그렇기에 누구도 우위에 설 수 없었다.
두 왕은 유구한 세월 동안 싸우고 또 싸웠지만, 언제나 무승부가 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인족, 그중에서도 인간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연약한 육체와 빈약한 마력에 의해 대륙의 주권에서 아득히 멀어져 있던 그들이 고작 몇 백 년 사이에 용족과 요정족보다 더 많은 숫자가 되었다.
용왕과 요정왕은 그 이유가 궁금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우위에 서기 위해 알고 싶었던 것이다.
일란은 거기까지 읽고 손을 멈췄다.
‘왕이라고? 용족과 요정족의?’
일란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거다.
이것이 그녀가 찾고 있던 내용이었다.
* * *
마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던 드반은 일을 끝내고 느긋하게 마을을 산책하고 있었다.
인한이 온 후로 마을에 가득했던 일거리가 하나둘 줄어들며 마을은 한층 더 보기 좋게 변해 있었다.
‘고마운 사람이야.’
드반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중심부, 우뚝 솟은 세계수까지 그의 걸음이 향했다.
수많은 나무가 한데 엮인 듯한 거대한 나무.
가까이 다가가자 농밀한 마나가 부드럽게 그의 몸을 감싸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였다.
드반은 시야가 일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눈에 들어오는 세계의 모습이 점점 이질적으로 뒤바뀌고, 끝내는 익숙한 마을의 풍경에서 낯선 나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아!’
드반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나무에서 천천히 한 사내가 걸어왔다.
사내는 무언가 특이했다.
후광, 이라고 말하면 조금 이상할 지도 모르지만, 사내의 주변만 다른 공기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사내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 말 외에 사내를 표현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성이라고 말해도 믿을 법한 새하얀 피부에 선이 가는 이목구비, 백금으로 짜낸 비단 같은 머릿결에 투명한 푸른 눈동자.
그런 모습의 사내가 천천히 드반의 앞에 다가왔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랄 맞군. 또 이 빌어먹을 탑이야?”
신비롭고 아름다운 사내.
그런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 외로 상당히 거칠었다.
* * *
용정왕과 용왕.
그들은 두 종족의 정점이었다.
요정왕은 모든 세계수의 중심이었고, 모든 정령들의 주인이었다.
4대 정령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것이 그의 힘이 되었다.
용왕은 세계의 이치에 가장 깊숙이 파고든 존재였다.
마법을 극한으로 익힌 그는 세계의 규칙마저 뒤틀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 맞아. 요정왕.’
그제야 떠올랐다.
4대 정령을 모두 사역했다는 전설의 존재.
때때로 마을의 원로분들이 옛 이야기를 할 때 가끔씩 나오는 존재기도 했다.
일란은 다음 장으로 넘겼다.
두 왕은 인간에게 발현된 새로운 힘을 발견했다.
오러.
오직 인간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마력의 정화.
오러는 인간에게 병마에 이겨 낼 힘을 주었고, 몬스터와 짐승의 이빨을 꺾을 힘을 주었다.
두 왕은 그 힘의 비밀을 알고자 인간 중 가장 뛰어난 존재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두 왕은 동시에 인간에게 도달했고, 다시 한 번 다툼이 일어났다.
그때 인간이 한 가지 꾀를 냈다.
용왕과 요정왕이 인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인간이 말했다.
내기를 하자.
내기의 내용은 이러했다.
서로의 것을 서로에게 공유한 후, 새로운 기술을 만들자.
어차피 지금껏 서로의 힘을 사용해 다퉜을 때는 승패가 나지 않았으니, 새로운 조건을 만들어 겨루도록 해라.
용왕이 반문했다.
서로가 서로의 것을 공유해 봤자, 누군가 우위에 설 일은 없을 것이다.
용왕과 요정왕은 기나긴 시간 동안 겨뤄 왔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서로의 것을 얻고, 오러를 얻어 봤자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러자 인간이 말했다.
그렇다면 서로의 후예를 들인 후, 그들이 겨루도록 만들자.
그것이 최종적으로 결론지어진 내기의 내용이었다.
수많은 세계, 수많은 시간 속.
자신들의 후계자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을 싸움의 결판을 내자.
그것이 두 종족의 왕이 승리자와 패배자를 결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
일란은 거기까지만 읽고 책을 닫았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내용이라니.’
애초에 요정왕과 용왕은 옛날이야기에나 나오는 전설 같은 존재다.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그 용족이 누군가를 섬길 일도 없을 것이며,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세계의 근원에 닿아 있는 요정들이 왕을 섬길 일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면, 궁금하다.
어째서 인한은 4대 정령을 모두 다룰 수 있었는가.
그토록 긴 시간 동안, 단 한 명의 엘프도 다루지 못한 4대 정령을…… 어째서 인간이 다룰 수 있단 말인가?
* * *
인한은 눈을 감고 집중해 들어갔다.
샐러와 실리암.
둘과 교감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느 시점부터는 단순한 의지를 교환할 뿐 아니라 분명한 생각을 공유하기도 했다.
정령은 감정도 있고, 생각도 있는 존재였다.
주인인 인한의 변화에 따라 분노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했다.
‘엘프들이 표현은 참 잘했군.’
그야말로 영혼의 벗이다.
언젠가 정령들과 친화력이 짙어진다면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 않을까.
-쉬이익!
그때였다.
실리암이 크게 동요하는 것을 느꼈다.
‘왜 그래?’
인한이 의지를 보냈지만, 실리암은 인한의 의지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크릉?
뒤를 이어 샐러조차 인한의 의지를 벗어났다.
샐러와 실리암이 갑자기 힘을 흩뿌리며 사방에 흩어져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정령이 인한의 통제를 벗어난 것은 처음이었다.
인한은 당황해하며 샐러와 실리암에게 속성력을 써서 억제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호오, 실리암 이 자식. 이 녀석한테 간 거였냐?”
양아치처럼 거친 어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한이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 한 사내가 인한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