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
<공략자들 149화>
“하압!”
콰앙!
인한이 짧은 기합성과 함께 주먹을 뻗었다.
그러자 새하얀 마력이 터져 나가며, 엘프 마을의 길을 막고 있던 나무의 잔해가 모래성처럼 부스러졌다.
“호오, 대단한 기술이군.”
“마력을 저렇게 사용하다니. 저런 식으로 잘게 부스러지면 거름이 될 수도 있겠어.”
“나의 벗으로는 한참이 걸릴 일이었는데, 이거 참 편리한 기술이군.”
그걸 구경하고 있던 엘프 남성들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은 아무래도 살아 있는 나무 안에서 살다 보니, 나무가 수명이 다해 죽으면 쓰러지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보통 그렇게 되면 죽은 나무가 썩으면서 악취를 풍기거나 길을 막는 일이 발생한다.
거기다 무게와 두께가 상당해서, 엘프들은 처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자, 자! 인한이 거의 다 해 놨으니, 이젠 우리 차례일세!”
“알았소!”
“족히 일주일은 걸릴 줄 알았건만, 다행이군!”
엘프 남성들이 각자 정령을 소환해 나무의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엘프 마을에 들어온 지 사흘째.
인한은 이틀 전부터 밥값이라도 할 생각으로 마을의 자잘한 일을 돕기 시작했다.
인구수가 상당한 마을이다 보니 힘쓸 일이 많은 데 비해, 엘프들은 그런 쪽으로는 영 시원치 않았다.
인한이 한 시간이면 해낼 일을, 엘프들은 수십 명이서 모여 하루 이틀에 걸쳐 처리했다.
그래서 인한은 이런 일들을 위주로 돕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자, 그럼 다음 걸로 갈까?”
쉴 틈 없는 인한을 본 한 엘프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다음은…… 서쪽 거주지라네. 여기서 가깝군. 그런데 괜찮겠나? 힘들지 않겠어?”
“이 정도는 지치지도 않으니까 걱정 마. 그것보다 얼른 가자.”
“역시 대단한데. 큰 도움이 된다.”
“뭐 밥값 하는 거지.”
“음, 정말 고맙다.”
인한은 마을에 큰 도움이 되고 있었고, 엘프들도 모두 인한에게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엘프들은 인한을 손님처럼 극진하게 대접을 하면서도, 친구를 대하듯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 뒤로 나무를 해체하는 작업을 몇 개 정도 더 진행한 인한은 근처 그루터기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후우, 시원하네.”
인한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닦아 냈다.
풀 냄새 섞인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혔다.
인한은 엘프 마을의 풍경을 바라보며 휴식을 취했다.
그때, 긴 금발의 머리를 뒤로 땋은 아름다운 엘프 여성이 인한에게 다가왔다.
“저…… 인한 씨.”
“아, 엘라 씨, 안녕하세요.”
엘라는 가끔 인한이 일을 하고 있으면 찾아와 마실 거리나 수건을 주고 가는 여성이었다.
“수, 수고하셨어요. 더우실 텐데 목이라도 축이시라고…….”
엘라가 얼굴을 붉히며 다가와 나무로 만들어진 물병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인한은 눈을 빛내며 물병의 뚜껑을 열었다.
상쾌한 향이 확 퍼졌다.
인한의 눈에 기대감이 서렸다.
‘역시! 새벽의 이슬이다.’
인한이 밝은 표정으로 파란색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마신 순간 온몸에 산뜻함이 퍼져 나갔다.
달의 꿀이 그 이름처럼 달달한 맛의 음료라면, 새벽의 이슬은 상큼한 맛의 음료였다.
노동 후에 마시는 새벽의 이슬의 맛은 그야말로 천상의 음료나 마찬가지였다.
인한은 진지하게 엘프들의 기술로 음료수를 제작해 판매하면, 전 세계 음료 시장을 재패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응?’
그렇게 새벽의 이슬을 마시던 인한은 옆에서 시선을 느꼈다.
엘라가 묘하게 열기 띤 눈으로 인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엘라 씨?”
“쓰읍! 네, 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아, 그냥 계속 바라보시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말입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입에 맞으시나 싶어서…….”
“물론이죠. 매번 감사합니다.”
“벼, 별것도 아닌 걸요.”
인한의 감사 인사에 엘라가 볼을 빨갛게 밝히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어이! 인한! 여기도 잠깐 도와줄 수 있겠나!”
“그래! 곧 갈게!”
인한이 병에 남은 새벽의 이슬을 단번에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 마셨습니다. 고마워요, 엘라 씨.”
인한은 엘라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일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엘라는 그런 인한의 뒷모습을 보며 녹아내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 남자다워!’
인한은 모르고 있지만, 현재 엘프 마을 처자들의 가장 큰 화두는 다름 아닌 인한이었다.
기본적으로 부드럽고 섬세한 외모와 성격을 지닌 엘프 남성들과는 다르게, 인한은 다부진 몸매에, 거친 성격을 지닌 것처럼 비춰졌다.
물론 그것은 엘프의 기준이었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그런 인한의 모습은 엘프 처자들에게 상당히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물 마시는 것도 어쩜 그렇게 남자다울까.’
그 정도쯤 되니, 사실 그리 잘생겼다고는 할 수 없는 인한의 외모조차 마을의 처녀들에게는 남성적인 매력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
일터를 향해 나아가던 인한은 갑자기 움찔 몸을 떨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인한은 곧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충 해야 할 일을 끝낸 인한은 다시 세계수로 향했다.
넬레바나에서 인한의 일과는 상당히 단순했다.
아침 일찍부터 낮까지 일을 돕고 나면, 바로 세계수로 향해서 가상의 전투를 벌였다.
브라이언 그레임스, 레오 뒤보아 등의 부딪힌 적이 있는 헌터들부터 시작해서, 각종 보스 몬스터와 극복하기 힘들었던 상황들까지 설정해 전투를 벌였다.
현실의 몇 배에 달하는 시간을 세계수의 스페셜 던전 속에서 보내며, 인한은 나날이 기술을 가다듬었다.
“후우…….”
오늘도 마찬가지로 수련을 끝낸 인한이 식은땀을 흘렸다.
세계수에 접속했던 감각이 빠르게 제자리를 찾았다.
‘아직 부족하군.’
인한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수련은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을 동반한다. 하지만, 인한은 자신을 채찍질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한 발자국씩 꾸준히 나아갔다.
‘자, 그럼 다시 한 번…….’
인한은 또 한 번 세계수에 접속했다.
이번에 인한의 앞에 나타난 것은, 임태호와 겐지와 아나스타샤였다.
형형한 기세를 뿌려 대는 셋을 마주하고, 인한이 눈을 빛냈다.
* * *
“자, 발터리안의 꽃이라네. 반딘의 뿌리는 아직 조금 시간이 걸리겠군. 몰리 나무의 껍질은 아직 숙성이 덜 됐네.”
일이 끝난 후, 드반이 인한에게 커다란 바구니를 건네며 말했다.
매 보름마다 마력을 흡수하는 효과가 있는 발터리안의 꽃, 육 년 동안 양기(陽氣)가 가득한 곳에만 자란다는 반딘의 뿌리, 내상에 큰 효과를 가지고 있는 몰리 나무의 껍질 등등.
회귀 전에도 구하기 힘들었던 약초와 마력초들이 바구니 안에 가득했다.
“리스트의 절반 정도는 다 됐군요.”
“나머지 절반도 이틀 정도면 다 준비될 것 같네.”
“숙성이나 손질도 맡겨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런 쪽은 누가 뭐래도 엘프가 최고니까요.”
“허허! 걱정 말게. 이건 어디까지나 거래지 않은가? 그리고 그 약초들은 우리들에게 그리 큰 가치가 없다네.”
인한은 35층에서 얻은 쇠붙이를 미리 다 넘겨주었다.
상당한 양에, 당시 드반은 화들짝 놀랐었다.
“그런데 이 정도 양의 약초와 마력초들로 뭘 하려는 생각인가?”
“아, 영약을 만들 셈입니다.”
“영약? 마력 증가를 위한 것인가?”
“예, 그리고 몇 가지 실험해 볼 것도 있고요.”
시작과 끝의 신전에서의 일 이후로 수련과 사냥을 반복하며 기어코 마력 스테이터스 3천 포인트가 넘은 인한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부족함을 느꼈다.
‘과거에 박철환이 밝힌 바로는 마나 스킬 6단계에 도달했을 때가 4천 스테이터스였으니까…… 최소한 그 정도는 되어야겠지.’
마나 스킬 6단계는 인한으로서도 경험해 본 적 없는 경지이기에, 뭐라고 판단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직접 보거나 들은 바로는, 다량의 오러를 소모하는 기술인 경우가 많았다.
오러가 마력을 상당히 많이 잡아먹는 기술인 만큼, 마력을 한 번 쌓아 놓을 필요가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인한은 고개를 돌려 드반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렇고…… 저번에 말씀하셨던 건 언제가 되면 알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예언이라는 건?”
인한의 질문에 드반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나도 알 수 없네. 그분은 꽤 변덕스러운 분이시니까.”
“그분?”
드반은 다시 입을 닫았다.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인한이 깔끔하게 포기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슬슬 시작하죠.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한은 보통 점심을 먹은 후 드반에게 정령술을 배우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드반이 고개를 저었다.
“아, 오늘은 일이 있어 내가 함께하지 못하네. 대신 일란이 그대를 가르칠 걸세. 이미 연락을 해 뒀으니 곧 올게야.”
인한이 눈을 빛냈다.
일란이라면, 일전에 나무 정령을 이용해 집을 짓는 것을 보여 준 젊은 여성 엘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집 바깥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윽고, 문을 열고 연두색 기조의 드레스를 입은 엘프 여성이 들어왔다.
족히 170cm는 되어 보이는 큰 키에, 연한 녹색의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아름다운 외모의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외모만큼이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멋들어진 자세로 인한에게 엘프들의 인사를 건네며 입을 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연의 동반자여. 일란이라고 합니다.”
일란은 물, 바람, 불, 그리고 나무까지 총 네 개의 정령과 계약한 정령사였다.
그녀는 인한을 마을 외곽의 공터에 데려간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님께 배운 것에 대해서는 이미 전해 들었습니다. 벗과의 교감에 대해 배우셨다고요.”
드반은 인한에게 정령술의 위력이나 효율을 높이는 훈련은 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대화를 하고, 의식을 나누고, 공감을 하는, 그런 식의 훈련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하는 훈련은 벗들과 친밀감을 쌓는 데에 좋은 훈련입니다. 하지만 벗과의 교감은 하루 이틀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녀의 어조와 목소리는 잔잔하고, 가르침 또한 직관적이어서 귀에 쏙쏙 들어왔다.
“교감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들어 본 바, 인한 씨께서는 아직 자신의 성질을 파악하지 못한 것 같더군요.”
“성질이라고요?”
“본래라면 벗과의 계약 이전에, 자신의 성질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벗과 계약을 맞는 것이 수순입니다.”
요는 이러했다.
아무리 뛰어난 정령사라도 특정 속성에 친화력을 갖고 있기 마련이고, 그것을 성질이라고 표현하는 모양이었다.
일란이 기본 4대 정령 중 하나인 땅의 정령과는 계약을 하지 못한 이유도 그 성질 때문이었다.
“그럼 그 성질을 깨닫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미 정령술을 어느 정도 깨우치셨으니 성질을 파악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반정령을 불러내는 요령과 비슷합니다.”
“예?”
반정령을 불러내다니?
인한은 할 줄 모르는 일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인한이었지만, 일란은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마력을 사용하듯 속성력을 약하게 방출하며 자연의 마나에 흘려 넣어 보세요. 그러면 자연스레 반정령이 나타날 것입니다.”
인한은 시키는 대로 바로 실행에 옮겼다.
공터에 앉은 인한이 눈을 살며시 감고 집중했다.
우웅!
마력과 속성력을 방출해 마나에 스며들게 했다.
미드 코어를 통해 펼치는 기술과 비슷한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삐걱거렸지만, 인한은 곧 요령을 알아냈다.
우웅!
그리고 한순간, 인한의 주위로 새하얀 알갱이 같은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반정령들이었다.
일란의 눈이 놀란 듯 살짝 커다래졌다.
“습득하시는 게 굉장히 빠르시군요.”
인한이 멋쩍게 웃었다.
“가르쳐 주시는 게 알아듣기 쉬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한번 방법을 깨닫자, 인한은 금세 집중하지 않고도 반정령들을 불러낼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그다음은 성질을 알아내는 방법입니다. 소환해 낸 반정령들 중에서 인한 씨의 속성력을 더욱 잘 흡수하는 반정령이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반정령들에게 마력과 속성력을 동시에 흘려 보내는 것을 반복하면, 곧 자신의 성질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인한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눈을 감으며 집중했다.
자신을 감싼 수많은 반정령을 느껴졌다.
인한은 그 반정령들에게 속성력을 흘렸다. 하지만 곧 미간을 찌푸렸다.
방식이 잘못된 것일까.
반정령들은 특별히 누가 더 잘 받아들이는 것 없이 전부 균등하게 인한의 속성력을 흡수했다.
“끄응…….”
인한이 침음성을 흘리며 속성력의 강도를 조금 더 높였다.
“이게 대체……?”
그때, 일란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고도로 집중을 하느라 인한은 일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채 계속해서 속성력과 반정령에 몰두했다.
불과, 물과, 바람과, 대지.
나무와, 번개와, 철…….
수많은 자연의 기운이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이제 한계군.’
반정령의 수는 수도 없이 많은데, 인한의 속성력은 한정되어 있었다.
속성력을 전부 사용했는데도 어느 반정령 하나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불과 바람의 기운은 바로 다룰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건 샐러와 실리암의 영향일 게 분명했다.
“후우.”
인한은 길게 숨을 내쉬고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바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연습을 해 봐야겠군요.”
“…….”
그런데 일란이 말없이 인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잔한 호수 같던 그녀의 눈빛에 묘한 파란이 일어났다.
“왜 그러십니까?”
인한이 눈을 껌뻑였다.
하지만 곧, 일란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인한은 주위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쉬익!
-크릉!
-카아!
수도 없이 많은…… 그야말로 셀 수 없는 숫자의 정령들이 인한의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