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공략자들 147화>
“예언 말씀이십니까?”
“여기서 이렇게 일어서서 할 얘기는 아니군. 일단 이쪽으로.”
드반은 인한을 마을 내부로 안내했다.
엘프 마을의 풍경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아니, 애초에 다크 엘프들이 아니면 웬만한 엘프 마을의 풍경은 다 비슷비슷했다.
-은인이여, 여기는 어디지? 설마 엘프의 마을인가?
그때, 위그라노아의 의념이 인한에게 흘러들어 왔다.
‘아, 그래. 맞아. 그런데 어떻게 엘프를 알고 있었지?’
-나도 한때는 탑을 올랐던 자였다. 우리는 엘프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었지.
위그라노아는 어딘가 씁쓸한 듯한 어조로 말했다.
확실히 위그드라실의 생명체와 엘프들을 상당히 궁합이 잘 맞아 보였다.
세계수의 존재도 그렇고, 생명체가 세계수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점도 그랬다.
위그드라실의 생명체와 엘프는 상당히 비슷한 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아니, 네가 볼 때는 비슷하다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엘프의 세계수와 나는 상당히 다르다.
본인이 세계수가 되었기 때문일까.
위그라노아는 언제부턴가 세계수를 말할 때 1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엘프들은 위그드라실의 생명체처럼 세계수로서 의식과 감정을 모두 공유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간처럼 각각의 자아가 확실하게 존재하지.
그러고 보니 엘프들은 각각의 성격과 취향이 달랐다.
-그들에게 세계수란 힘의 원천이자, 종족 번성을 위한 장치이며,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할 뿐이다. 세계수가 없다면 종족을 유지하는 데 상당히 힘들긴 하겠지만, 멸종의 위기까지 오지는 않을 것이다.
‘잠깐. 종족 유지?’
그 말에 인한이 놀라자 위그라노아는 오히려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몰랐나? 엘프들의 몸은 원래 상당히 연약하다. 여성 엘프는 아마 세계수가 없다면 출산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병균에도 상당히 취약하기에 간단한 병에도 쉽게 죽겠지. 과격한 운동을 하면 내장이 버티지 못할 것이고.
‘뭐?’
인한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엘프는 몸이 약하기로 유명한 종족이기는 했다.
물론 그것도 ‘아인종치고는’이라는 전제가 있었을 때였고, 인간보다는 훨씬 뛰어난 육체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졌었다.
그런데 설마 운동하는 것만으로 육체가 버티지 못할 정도였다니.
그런 인한에게, 위그라노아는 덧붙여 알려 주었다.
-하지만 세계수의 일부를 몸에 이식함으로 그것을 보완할 수 있다. 또한 정령술과 마력 친화력마저 얻을 수 있지.
“동지여, 자네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군. 혹시 그것은 영혼의 벗인 것이오?”
위그라노아의 기척을 느낀 것일까.
드반의 말에 인한이 할 말을 잃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일순간이었지만 인한의 당혹스러운 표정을 본 드반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는 대답하지 않아도 좋소. 그저 궁금했을 뿐이니.”
그 말을 끝으로, 인한은 드반과 함께 다시 말없이 이동했다.
마을의 외곽이 아닌 안쪽으로 들어오자, 거주지의 전경이 인한의 눈에 들어왔다.
사실상 거주지라는 표현보다는 숲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웃자란 나무들에 엘프들이 지내고 있고, 곳곳에 신기한 풀과 꽃들이 널려 있었다.
어린 엘프들이 나무와 나무를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이 인한의 눈에 들어왔다.
배가 고팠는지, 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엘프도 있었다.
“……?”
-쿠오오…….
그때, 인한이 발을 내디디려 한 지면이 확 뒤집혔다.
급히 걸음을 멈춘 인한의 앞에 흙이 점점 모여 들더니 인한의 덩치만 한 크기의 사람의 형상을 취했다.
“땅의 정령이군. 벗을 반기는 모양입니다.”
땅의 정령은 지면의 위를 빙판처럼 미끄러지듯 이동하며 인한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쉬익?
-샤아!
-후웅!
땅의 정령을 시작으로, 각양각색의 정령들이 인한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불의 정령, 바람의 정령, 땅의 정령, 물의 정령의 기본 4대 정령부터 시작해서, 나무나 돌의 정령 등의 하급 정령들까지 인한의 주변을 이리저리 맴돌았다.
드반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허어. 이토록 많은 속성이 따르다니. 이건 정말…….”
인한도 당황해했다.
아무리 정령사라지만 기본 4대 정령을 포함한 모든 정령을 사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령사와 정령간 에도 궁합이란 것도 있어서, 아무리 정령석이 있더라도 모든 정령과 계약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억지로 정령석을 이용해 반정령들에게 강제로 속성을 입힌 후 계약을 행하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정령은 격이 현저히 낮아졌다.
“역시 예언의 사람이었군. 이쪽이오. 여기가 내 집이오.”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머무는 거처로 드반이 손짓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인한은 힘겹게 정령들을 비집고 나와 드반의 뒤를 따랐다.
힐끗 바라본 뒤쪽에는 많은 정령들이 인한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인한이 집에 들어오자, 드반이 나무를 깎아 만든 잔과 병, 그리고 지구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의 특이한 과일을 가져왔다.
“힘든 길을 오느라 수고했네. 시원한 음료수라도 마시게.”
멀리서 봤을 때는 투박한 나무잔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나무 공예품처럼 세밀하게 조각이 되어 있는 아름다운 잔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드반이 병을 기울였다.
그런데 떨어지는 액체의 색이 기묘했다.
은색에 광택까지 있었다.
그 파격적인 비주얼에 잠시 천문을 확인할까 고민한 인한이었지만, 드반에게 예의가 아닐 듯싶어 눈을 질끈 감고 목 뒤로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어?”
인한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잔을 바라보았다.
달짝지근한 느낌의 음료수였다. 과일향 같은 달콤함은 인한이 지금껏 마셔 본 어떤 음료수와도 달랐다.
넘어가는 감각은 탄산음료와 비슷하면서, 조금은 다른 느낌.
목 뒤로 넘기는 순간, 입가와 식도에 시원한 기운이 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음료수를 다 마신 상태였다.
드반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상당히 마음에 들었나 보군. 다행이야.”
“마, 맛있네요.”
인한은 저도 모르게 입가를 닦았다.
“달의 꿀이라고 하는 음료수이지. 중요한 손님이 왔을 때만 대접하는 물건이라네. 어디, 한 잔 더 하겠는가?”
인한의 잔에 또 한 번 은색의 액체, 달의 꿀이 담겼다.
달의 꿀도, 과일도 상당히 맛있었다.
36층 필드를 지나오며 받았던 온갖 스트레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인한이 달의 꿀을 세 번째로 마셨을 때였다.
드반이 입을 열었다.
“그럼 슬슬 이야기를 해 볼까. 자네는 우리에게 용건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 용건은 무엇인가?”
“음, 구하고 싶은 약초들을 거래했으면 합니다. 마력초와 열매도 구하고 싶습니다.”
“어떤 걸 원하지?”
“드비리라 풀, 엘렉 열매, 트란의 꽃…….”
인한이 기억을 되짚으며 몇 가지 약초들의 이름을 읊었다.
그 모든 게 다 회귀 전에는 고가에 거래되던 아이템들이었다.
오죽하면 검은 탑에도 심마니가 있다는 말이 돌 정도로 희귀해서, 무지막지한 고가로 팔려나갔다.
하지만 드반은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외에도 몇 가지가 있는데, 곧 리스트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간단한 부탁이군. 걱정 말게. 바로 준비해 주지.”
상당히 귀한 약초일 텐데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드반을 보며, 인한은 저도 모르게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5층에서 아주 저급한 영약을 만들었을 때, 아이템을 모으기 위해서 몇 억 원짜리 의뢰를 넣었던 것이 생각나서였다.
“대가는 어떤 것으로 해 드릴까요?”
“음…… 혹시 철로 만든 물건들을 가지고 있는가?”
“철이요?”
“그렇다네. 우리 엘프들은 언제나 철이 부족한 편이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엘프들은 광산 기술이 없었다.
활에 쓰이는 화살촉도 주술이나 마법을 새겨 넣은 돌을 사용하거나, 철을 사용하더라도 질 나쁜 사철을 사용했다.
“마침 잘됐네요. 철이라면 많이 있습니다. 아, 다만 철괴가 아니라 철 조각들입니다. 괜찮습니까?”
“괜찮네. 녹여서 사용하면 되니까.”
인한은 이곳으로 오기 전, 혹시 몰라서 35층에서 나이트 아머들의 갑옷 파편들을 조금 모아 왔었다.
탑의 밖이었다면 푼돈을 주고 팔았어야 했는데,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끝인가?”
그런데 드반은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인한에게 미소를 지었다.
인한은 잠시 표정을 굳히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니요. 사실 본론은 따로 있습니다.”
인한이 잠시 머릿속으로 말을 골랐다.
“왕과 아발론…… 아십니까?”
드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잠시 눈을 감았던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건 내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대는 알 것이네.”
“그것에 대해 알고 싶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이 검은 탑, 그동안 수도 없이 많은 세계를 멸망시켜 온 괴물이라는 사실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몬스터들 중의 일부는 그 다른 세계의 주민이라는 것도 말이죠.”
검은 탑은 세계의 정수를 갈취하고, 그 세계를 멸망에 빠뜨린다.
그리고 멸망한 세계의 주민 중, 탑에 걸맞다고 생각되는 몬스터들은 검은 탑에 이주시킨다.
하지만 거기엔 의아한 점이 있었다.
탑에는 몬스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주민, 즉, 아인종도 존재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세릴의 할아버지였던 카를과의 대화에서 유추해 보았을 때, ‘아발론’은 그들의 고향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아발론에 대한 것은 입에 담지 못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줄 수 없네. 그것이 대체 왜 궁금한 것인가?”
“그건…… 앞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궁금한 것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궁금하기에 알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그저 인한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블러드 워커. 놈을 공략하려면 아인종에 대해 알아야 해.’
인한은 지금 당장을 사는 것보다, 앞으로의 일을 대비해야 했다.
90층 구간에 진입하는 헌터들을 죽음의 늪에 빠뜨린 탑의 원주민, 투귀 블러드 워커.
탑 전역에 내려진 4차 클래스 업그레이드 퀘스트의 성공 조건이자, 모든 헌터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며 헌터들을 죽이기 위해 힘을 휘둘렀던 아인종.
헌터들은 비록 놈을 죽이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승리와 패배로 나눈다면 그것은 인간의 패배였다.
놈은 50명에 달하는 상위 랭커와 그 수백 배에 달하는 헌터들을 길동무로 데려갔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가 있는 것이군. 하지만 나는 알려 줄 수 없네. 그런 규칙이지. 하지만…… 그대가 정말 예언의 사람이라면 알게 할 수는 있겠지.”
수수께끼와 같은 말이었다.
드반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오늘은 일단 푹 쉬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말일세. 이곳에서 한동안 지내도록 하게. 어차피 약초도 거래해야 하지 않나?”
드반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인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잠시 신세를 져도 되겠습니까? 주위를 둘러보고도 싶고…….”
“물론이지. 어디든 돌아다니도록 하게나. 우리는 동지를 반긴다네.”
드반의 말에 인한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어차피 다급하게 한다고 알 수 있는 건 아니야. 그건 그렇고…….’
인한이 눈을 빛내며 창문 너머로 보이는 엘프 마을의 전경을 바라보았다.
‘엘프의 마을에 왔으면, 역시 거길 가 봐야겠지?’
인한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