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공략자들 146화>
36층, 이드 그라드.
탑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숲의 형태를 하고 있는 필드인 이드 그라드는, 필드의 중앙을 관통하는 거대한 강과 그 강에서 나무처럼 뻗어 나온 수많은 지류가 필드 전역에 퍼져 있는 것이 특징인 필드였다.
강의 이름은 이드.
회귀 전에 밝혀진 바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세계의 요소가 다량 함유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동식물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모양이었다.
여담으로는, 이드 강 추출물이 탑 외부에서 상당히 수요가 높았다.
사실은 아무런 효과도 없고, 오히려 복통만 유발시켰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키를 키워 준다는 소문이 돌아 인기가 높았던 것이다.
인한은 그런 이드 강의 본류를 따라 뚜벅뚜벅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위이이이잉! 위잉!
“끄응…….”
인한은 귓가에 울리는 소음에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숲과 그늘, 그리고 강가.
세 가지 요소가 합쳐지면 꼭 나타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벌레였다.
위이이잉!
인한을 휘감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수많은 벌레들이 날아다녔다.
생김새는 모기와 비슷한데 덩치는 거의 열 배는 큰 벌레가 보인 게 시작이었다.
인한의 머리통만 한 바퀴, 벌 떼처럼 붕붕거리며 모여 다니는 사마귀 떼, 하늘이 뿌옇게 보일 정도로 모여서 날아다니는 날파리들, 날개 달린 지네까지.
“……기분 나빠.”
귓가에 미친 듯이 울리는 소음에 인한의 인상은 펴질 줄을 몰랐다.
강가여서 그런지 물비린내도 엄청나고, 공기도 습했다.
지면은 질퍽하거나 끈적거렸고, 하필이면 벌레형 몬스터가 날아다니니 불쾌지수가 미친 듯이 솟구쳐 올랐다.
인한은 그저 ‘뜨겁다’라는 사실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지만, 날씨도 상당히 후덥지근한 편이었다.
열대 지방 정도는 아니지만 한국의 한여름 기온 정도는 됐다.
만약 인한이 화상 면역 스킬이 없었다면 더위에 습기에 벌레 떼까지……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위이잉! 위이이잉!
“…….”
인한은 필드 초입까지는 그 벌레 떼들을 일일이 다 처리하며 걸어갔다.
엘프들은 숲을 상당히 중요시 여기기 때문에 큰 기술을 난발하지는 못했지만, 적당히 힘 조절을 하며 사냥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몬스터들에 비해 이놈들은 단순하게 달라붙었다.
그래서 처리하기도 쉬웠고, 떼를 지어서 몰려다녀서 한 번에 다수의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아무리 경험치를 준다고 해도 이건 아니었다.
100마리를 죽일 시간에 200마리가 달라붙었다.
거기다 그중에서는 몬스터가 아닌, 그냥 평범한 벌레들도 절반 이상 있었다.
곧 인한은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계속해서 마력이나 정령술을 운용해 전신에 두르기로 했다.
다가오면 죽는 거고, 안 다가오면 그냥 보내 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문제가 생겼다.
그래도 명색에 36층의 몬스터이다 보니, 맷집이 상당했다.
그놈들을 떨어뜨리려면 일정량 이상의 마력이나 속성력을 소모해야 했는데…….
아무리 인한이라도 몇 시간째 상당량의 마력과 속성력을 소모하다 보니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피로함이 몰려왔다.
“으득, 모기약 가져왔어야 했어.”
그게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인한은 씹어 먹듯 중얼거렸다.
마력을 사용함과 동시에 상당량을 회수하고, 어떤 기술을 펼치는 게 아니라 그저 방출할 뿐이기에 그렇게 마력이 빨리 닳지는 않았다.
하지만 피로감의 문제였다.
마력을 사용하려면 어찌 됐든 계속 신경을 써야 했다.
안 그래도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 때문에 짜증 나는 상황에서 그건 너무 가혹했다!
웨에엥! 웨에엥!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자 인한은 그냥 무시하기로 하고 반쯤 포기한 채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 지점까지만 가면 벌레들은 알아서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온갖 벌레들을 휘감고 걸음을 옮기는 인한의 모습은 가히 벌 떼를 휘감고 있는 양봉장의 장인 같은 모습이었다.
위잉! 위잉!
벌레 몇 마리가 휘적거리다가 콧구멍과 귓구멍에 쑤욱 들어왔다.
결국 폭발한 인한이 손을 휘저었다.
“그만 꺼져!”
퍽! 퍼버벅!
수박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벌레들의 몸이 터져 나갔다.
벌레의 몸에서 나온 끈적끈적한 점액질과 특유의 광택 섞인 껍질이 손에 묻었다.
인한은 얼굴을 와락 찌푸리며 이를 갈았다.
위이이잉! 위이이잉!
과거, 여성 헌터들이 기피했던 필드 부동의 1순위 이드 그라드다웠다.
“후욱, 후욱.”
인한이 우뚝 선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표정을 일그러뜨린 인한이 주먹을 끌어당겼다.
우우우우우웅!
불길처럼 타오르는 마력이 인한의 주먹에 휘감겼다.
체력 분배, 마력 보존, 엘프들과의 관계…….
‘그딴 거 다 필요 없어!’
인한의 주먹에 숲 하나 정도는 간단히 날려 버릴 수 있는 거력이 스며들었다.
그때.
-잠깐!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가!
옆에 있던 버드나무에서 다급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무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인한은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귀한 엘프께서 저를 주시해 주시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만.”
그 목소리의 주인.
그것은 자연의 대변자라 불리는 존재, 다름 아닌 엘프였다.
* * *
자연의 대변자, 자연의 친구, 미(美)의 화신.
엘프는 그 아름다운 외모와 종족 자체가 갖는 특유의 신비로운 느낌 때문에 뭇 사람들의 관심을 받은 종족이었다.
-어떻게……?
나무가 부르르 떨렸다.
인한은 주먹에 서린 마력을 휘두르는 것을 그만두고 분수처럼 작은 마력덩이를 분출해서 주위에 몰려든 벌레들만 처리했다.
그러면서 인한이 말했다.
“엘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언제부터 저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입니까?”
-그대의 강대한 영혼의 벗을 감지했기에 의식을 보낸 것이네.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
영혼의 벗이란, 인한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엘프들이 정령을 부를 때 지칭하는 단어였다.
-나는 넬레바나의 쉰 세 번째 수호자, 녹색의 알라냐의 두 번째 아들 드반. 자연의 동반자여, 그대가 품은 자유함과 따스함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고 있다. 우리의 마을로 와 주겠는가?
인한이 눈을 빛냈다.
엘프들은 일단 인정받고 나면 상당히 개방적으로 교류하는 종족이었지만, 인정받기 전까지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방인을 대하는 종족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은 처음 이방인을 만났을 때는 ‘여행자’, 인정했을 때 보통 ‘친구’라고 부른다.
그리고 지금 드반이 말한 자연의 동반자라는 칭호는 마을의 일원이나 극도의 친분을 가졌을 때만 주고받을 수 있는 칭호였다.
위이잉!
그 순간, 다시 사방에서 벌레들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인한이 팍 인상을 찌푸린 채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동반자여. 그런데…… 일단 길 좀 안내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 그러면 또다시 폭주해서 숲을 날려 버릴 것만 같았다.
* * *
드반의 안내 덕에 인한은 지름길과 샛길을 통해 빠르게 엘프의 마을로 진입할 수 있었다.
원래라면 이드 강 본류를 통해 필드 깊숙이까지 들어간 다음, 빙 돌아서 마력의 흐름이 뒤틀린 곳을 찾을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시간을 벌었다.
엘프의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은 기둥처럼 우뚝 솟아오른 수많은 나무들이 가득했다.
주위에 몬스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음으로 인한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우우웅!
그런데 어느 순간, 인한은 얇은 점성의 막을 통과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계를 통과했군.’
인한이 눈을 빛냈다.
농밀한 마력이 인한이 걸어온 지점에 퍼져 있었다.
내부에서 출입의 허가를 받은 인한은 그저 얇은 막을 통과하는 듯한 기분만 들었을 뿐이었지만, 만약 허가받지 않은 존재라면 상당히 험한 꼴을 겪을지도 몰랐다.
마을을 지키는 결계를 통과한 인한은 공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습한 공기가 순식간에 상쾌하게 변했다.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에서는 청량감마저 느껴졌다.
인한은 울창하게 펼쳐진 곳곳의 나무에서 엘프 궁수들의 기척을 느꼈다.
아무리 초대를 받았다지만, 생판 모르는 외부인이 들어왔는데 경계하기는커녕 친근하게 인한을 향해 눈인사까지 보냈다.
인간인 인한은 이해할 수 없지만, 그게 엘프였다.
“여전히 아름답군.”
인한은 묵묵히 안쪽으로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슬슬 마을의 외곽에 도달하자 주거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거주 공간은 이미 나무의 내부를 파서 만들어진다.
거주 공간이 부족할 수 있지만, 엘프들에게는 사실 집이라는 개념이 희박했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걸어 들어갈수록 나무에 지어진 집들이 더욱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굉장히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그뿐 아니라, 엘프의 마을 곳곳에 아름다운 풀이 자라고 있었다.
유리처럼 투명한 꽃, 무지개 같은 빛을 발하는 꽃, 마력을 품고 있는 꽃도 있었다.
그야말로 엘프의 마을다운,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익숙해지지가 않군.’
회귀 전에도 몇 번이나 본 광경이지만, 볼 때마다 신비로움을 느끼는 광경이기도 했다.
그렇게 놀라움을 느끼며 들어가고 있는데, 안쪽에서 한 사내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백옥 같은 피부에 비단 같은 금색 머리카락.
엘프들을 표현할 때 자주 쓰는 표현이지만, 그에게는 정말 그 표현이 잘 어울렸다.
길게 자란 머리카락은 움직일 때마다 찰랑거렸고, 잡티 하나 없는 피부는 투명할 것만 같았다.
그 머리카락 위에는 마치 왕관과 같은 얇은 나뭇가지가 씌어져 있었다.
아니, 자라 있었다.
저것은 엘프들이 지키는 세계수의 가지다.
엘프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계수의 일부가 몸에서 자라난다.
“안녕하시오, 자연의 동반자여. 내가 바로 드반이라 하오.”
생긴 것은 인한과 별로 나이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 드반은 상당히 중후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저렇게 생겼어도 한 2, 300살은 됐겠지.’
엘프는 장수하는 것으로 유명한 종족이었다.
드반은 지구의 커트시와 비슷한 자세를 지으며 자세를 낮췄다.
한쪽 손은 허리 뒤에, 한쪽 손은 허리 앞에 가져다 댔다.
인한도 똑같은 자세로 몸을 낮췄다.
그러자 드반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놀라 했다.
“어떻게 동반자의 인사를?”
“말했다시피, 그냥 좀 알고 있습니다. 엘프에 대해.”
과거, 회귀 전에도 인한은 엘프의 마을에 몇 번이나 들락날락했다.
자연히 이 자세 또한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드반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정말 놀랍군. 그렇다면 자연의 어머니조차 알고 있는 것인가?”
“넬레바나를 말하는 것이라면 알고 있습니다. 이 마을의 이름이자 엘프들의 세계수이지요?”
드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알고 있군.”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전 아직 여기에 들어온 지 고작 10분도 안 된 이방인입니다. 제가 나쁜 마음을 먹으려고 하면 어쩔 생각입니까?”
위그드라실의 세계수나 엘프들의 세계수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둘 모두 세계수에 종족의 명운이 걸려 있다는 점이었다.
드반은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자네는 영혼의 벗을 두 명이나 가지고 있지. 자연의 선택을 받은 그대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네. 그리고 자네의 속에 품은 강맹한 힘을 나는 알고 있지. 만약 하고자 한다면, 이미 이 안에 들어온 순간 우리 종족은 멸망한 것이 아닌가?”
매우 덤덤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의 말에 인한은 또 한 번 괴리감을 느꼈다.
엘프들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잊고 있었지만, 이들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종족이었다.
아무리 알고 있어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이거늘,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납득하고 있었다.
“그래도, 믿어 준다니 감사하군요. 사실 제가 온 것은 용건이 있어서입니다.”
“그런가? 잘된 일이군. 용건은 우리에게도 있다네.”
“네? 그렇습니까?”
“예언이 있었지.”
드반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