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
<공략자들 145화>
라스틴은 미간을 찌푸리며 천문을 확인했다.
‘힘으로 찢고 탑에 침입했다고?’
검은 탑은 모든 차원과 차원을 연결하는 왕들의 비보다.
왕들조차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아이템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완벽히 파악하고 있지 않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아이템이 바로 검은 탑이다.
한데 그런 검은 탑을 힘으로 찢고 침입하는 존재라니?
‘그런 존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이 최하위 위계 외에 다른 세계가 살아 있던가?’
검은 탑이 파악한 수많은 위계의 수많은 세계가 그의 손에 의해 멸망했다.
그 수많은 세계의 정수가, 지금 이 검은 탑에 잠자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탑을 찢고 침입했단 말인가.
“으득!”
라스틴이 이를 갈았다.
과거의 기억을 뺏기기 전의 자신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왕들은 그의 힘과 인격과 지식 등 모든 걸 속박했다.
어떤 기억이 없어졌고 어떤 인격이 바뀌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이런 일은 계약에도 없던 일이었다. 굳이 내가 해결할 필요는 없다. 내게 해가 될 일이라면…… 그때 해결하면 될 뿐. 찬탈자 놈들에게 해가 된다면 그것은 바라던 바다.’
라스틴은 끊임없이 떠오르는 천문을 휙 넘겨 버렸다.
* * *
인한은 35층 메인 던전으로 들어섰다.
인한은 굳이 몬스터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아무리 도움이 안 되는 층이더라도 성장을 위해 몬스터들을 상대하며 던전을 진행했던 그동안과는 확실히 다른 모습이었다.
‘어차피 본방은 이쪽이니까.’
인한은 바로 보스존 앞에 섰다.
35층의 보스존, ‘왕궁의 지하 미궁.’
음침하고 음산한 기운이 맴도는 공간이었다.
땅바닥에는 해골이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쇳조각과 옷 조각이 굴러다녔고, 녹슨 칼이나 화살이 벽면에 박혀 있기도 했다.
35층의 보스존은 대부분의 던전들처럼 작은 범위에 펼쳐져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왕궁의 보스존은 그 이름에 걸맞게 미로처럼 되어 있는 상당한 규모를 가진 개방된 보스존이었다.
물론, 이곳에도 입구가 존재하고 보스존과 던전을 구분하는 경계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상당한 규모의 보스존이었다.
곧 인한은 미로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착했다.
수많은 미로의 통로가 한곳으로 연결된 곳이었다.
상당히 넓은 그 공간의 중앙에는 작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인한은 그곳에서 묘한 기척을 느꼈다.
-하, 찮은 민중……들이여…….
기척을 느끼고 바라본 그곳에 금과 은, 백금과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갑옷이 삐걱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날카로운 롱 소드가 예리한 빛을 토해 냈다.
-짐의…… 분, 노를…… 느껴라……
킹스 아머는 움직이는 갑옷이다.
갑옷 주인의 사념, 그리고 내부에 꽉꽉 차오른 마력에 의해 움직이는 일종의 언데드 몬스터였다.
언데드이기에 본체인 갑옷이 산산조각이 나는 경우만 아니라면 금세 회복했고, 고도의 검술과 마력까지 다루는 놈이었다.
사실 킹스 아머 자체는 그리 어려운 몬스터가 아니었다.
랭커가 다수 포함된 길드라면 눈 깜짝할 새에 처리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킹스 아머에게는 히든 스킬이 하나 있었다.
S급 스킬 <증원(增援)>.
킹스 아머는 일정 시간 전투가 계속되면 이 증원이란 스킬로 ‘나이트 아머’라고 불리는 몬스터를 소환해 낸다.
그런데 이 나이트 아머 때문에 공략의 난이도가 순식간에 상승하게 된다.
나이트 아머는 킹스 아머보다 약하긴 하지만 거의 비등한 힘을 가진 데다가, 무려 30초에 두 배씩 분열됐다.
처음에는 한 마리였다가, 30초 후에는 두 마리가 되고, 1분 후에는 네 마리가 되고…….
그렇게 전투가 길어지게 되면 수천 마리까지 늘어나며 결국에는 하나의 군단이 되었다.
그뿐 아니라, 보스존 ‘왕궁의 지하 미궁’ 자체에도 수많은 함정과 패턴이 존재하기 존재했다.
때문에 35층 보스존은 회귀 전에도 수많은 헌터들이 애먹은 던전 중 하나였다.
‘공략법은 간단하지. 어차피 나이트 아머는 아무리 잡아도 공략에 도움이 안 되니까, 킹스 아머를 집중 공격해서 빠르게 녹이는 것.’
이게 정공법이었고, 다들 그렇게 도전했다.
물론 인한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방법이었다.
인한은 굳이 킹스 아머만 녹일 생각이 없었다.
인한이 생각한 대로만 된다면, 이 보스존은 노다지나 다름 없었다.
화악! 화악!
킹스 아머가 인한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롭고 위력적인 검세였다.
검에 서려 있는 마력은 족히 마나 스킬 3단계는 되어 보였고, 검술 자체도 수준급이었다.
인한은 굳이 마주 서지 않고 거리를 벌리며 이리저리 도망쳤다.
콰앙!
그러다 가끔씩 함정을 건들기도 했다.
그러면 갑자기 벽면에서 화살이나 칼을 포함한 각종 마법들도 튀어나와 인한을 노렸다.
챙! 챙그랑!
물론, 인한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마력을 쓸 필요도 없었다.
화살은 튕겨 나가고, 검이나 창은 부러졌다.
독, 화염, 빙결계 마법들은 10레벨이 넘어도 아득히 넘은 각종 면역 스킬을 뚫지 못했다.
그러던 중, 킹스 아머가 갑자기 검을 치켜들었다.
-크오오…… 나, 의…… 기사들이여…….
[증원이 발동되었습니다.]
[나이트 아머가 출현합니다.]
-크어어어어…….
처음에는 한 마리.
인한이 눈을 빛냈다.
킹스 아머까지 두 마리가 되었다고 달라질 건 없다.
[증원이 발동되었습니다.]
[나이트 아머가 분열합니다.]
-왕국을, 위하여…….
-충성을…….
나이트 아머가 두 마리가 되었다.
킹스 아머와 나이트 아머는 이동 속도가 그렇게 빠른 편이 아니었다.
인한이 툭툭 땅을 박차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몇 미터씩 거리가 벌어졌다.
철컥!
인한이 땅에 착지한 순간, 땅이 갑자기 푹 꺼지며 함정이 발동했다.
뒤쪽에서 거대한 쇠공이 인한을 향해 굴러 왔다.
그냥 피하면 될 일이었지만…….
‘이대로면 몬스터들이 다친다!’
인한은 오히려 자신을 따라오는 갑옷 집단을 걱정하며 굴러오는 거대한 쇠공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제로 어택!”
인한이 만들어 낸 기술 중 하나.
새하얀 마력이 주먹을 통해 뻗어 나가고, 쇠공으로 흡수되듯 빨려 들어갔다.
쿠구궁!
그러자 굴러오던 쇠공이 급정거를 했다.
그 외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쿠오오오!
뒤에서는 여전히 갑옷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인한은 길을 막고 있는 쇠공을 툭 건드렸다.
콰가가가가!
쇠공이 순식간에 수백 조각으로 갈라지며 지면을 뒹굴었다.
인한은 다시 땅을 박찼다.
그런 일들이 반복됐다.
인한은 오히려 보스존의 함정으로부터 몬스터들을 보호하며 나이트 아머의 숫자를 늘려 갔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보스존에는 갑옷이 가득 찼다.
‘이쯤이면 충분하군.’
인한은 도망치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섰다.
미궁을 가득 채운 갑옷의 쇠 냄새 때문에 코가 맹맹할 지경이었다.
-크, 어. 크…….
-저놈을…… 잡아라……!
가장 후방에 있는 킹스 아머와 그 명령을 받고 인한에게 들이닥치는 나이트 아머.
마치 해일처럼 인한을 향해 수많은 나이트 아머가 달려들었다.
인한은 씨익 웃으며 주먹을 뚝뚝 꺾으며 여유롭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리고 한순간, 자세를 취하며 주먹을 크게 끌어당겼다.
“자, 그럼…… 수확해 볼까?”
콰앙! 콰아아앙!
폭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나이트 아머가 사방으로 튕겨 나가고, 박살이 나고, 우그러졌다.
수백 마리가 넘는 나이트 아머와 그것을 상대하는 인한.
그런데 오히려 밀리는 것은 수백 마리의 나이트 아머 쪽이었다.
“에어 캐논!”
콰아아앙!
인한이 마치 포탄을 뻗듯 주먹을 뻗은 순간, 공기 중에 새하얀 마력이 동심원(同心圓)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그 일격에 거대한 파동이 나이트 아머를 휩쓸었다.
콰자자자자장!
쇠가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수십 마리의 나이트 아머가 박살 났다.
일당백, 일기당천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광경이었다.
끝내 나이트 아머가 모조리 쓰러졌다.
인한이 나이트 아머를 모두 쓰러뜨릴 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0분도 채 안 됐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
순식간에 레벨이 12이나 상승했다.
아무리 분열체라도 경험치는 주어졌다.
그런 데다 수백 마리나 단숨에 처리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 기사들이…….
킹스 아머의 안쪽은 텅 비어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상당히 당황한 듯 몸을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인한은 뚜벅뚜벅 킹스 아머를 향해 걸어갔다.
-쿠오오오!
화악!
킹스 아머가 발악하며 검을 휘둘러 인한을 베었다.
“헉!”
인한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뒤로 뺐다.
지형을 바꿔 버릴 정도의 폭발을 보였던 왕의 공격에도 몸에 흠집 하나 나지 않았던 인한이 고작(?) 보스 몬스터의 검격에 몸을 피한 것이었다.
‘아이템 흠집 날 뻔했다!’
그렇다.
인한이 걱정한 것은 자신의 몸이 아닌 아이템 쪽이었다.
킹스 아머와 나이트 아머는 갑옷을 모조리 부서뜨려야만 잡을 수 있는 몬스터다.
즉, 얻을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부러진 쇳조각인데, 그마저도 사냥을 끝내면 언데드 특유의 음기(陰氣)를 띤 마력 때문에 순식간에 녹슬어 버린다.
하지만 녹슬지 않고 원 형태를 가지고 있는 아이템이 있었으니, 바로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무기였다.
나이트 아머의 장비는 대부분 최저 D+등급에서 상태만 좋으면 B-등급까지 되었다.
게다가 킹스 아머가 들고 있는 롱 소드인 ‘고대왕의 검’은 A등급의 보스 아이템이었다.
“자, 그럼 아이템은 일단 저쪽으로 치우고.”
인한은 아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킹스 아머에게 손을 뻗었다.
마치 친구에게 어깨동무라도 하는 듯한 친근한 몸짓이었지만, 킹스 아머는 꼼짝도 못하고 인한에게 검을 빼앗기고 말았다.
챙그랑!
이렇게 장비를 빼앗았더라도, 그것이 사라지지 않고 보상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인한에게는 사기급 칭호 <시작하는 자>가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저 장비는 인한에게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크, 쿠오오…… 감히 짐에게…….
“시끄러워.”
인한은 주먹을 치켜들었다.
콰자자장!
킹스 아머는 순식간에 박살 나 사라져 버렸다.
* * *
인한은 바로 36층으로 향했다.
35층에서는 이동 시간을 제외하면 전투에는 거의 시간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지치지도 않았다.
‘길드가 올 수 있으니까 땅의 돌은 활성화시켜 둬야겠군.’
땅의 돌을 활성화시킨 인한은 바로 필드로 나섰다.
굳이 급하게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어차피 별로 힘들지도 않은데 느리게 공략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36층에는 엘프들이 있었나.’
아인종 중 하나, 엘프.
아인종에도 사실 종류가 많이 있었다.
그중 세릴과 같은 동물과 사람이 섞여 있는 듯한 원주민은 수인종이라고 불렀다.
또, 엘프나 드워프처럼 인간에서 조금 다른 모습을 취하고 있는 것은 그냥 그대로 아인종이라고 불렸다.
‘들러 볼까.’
엘프의 마을은 일단 가게 되면 얻을 게 많은 곳이다.
특히 인한의 경우엔 약초나 식물을 사용해 아이템을 제작할 줄 알기 때문에 얻을 게 상당했다.
누가 뭐라 해도 자연과 관련된 아이템은 엘프들이 가장 많이 지니고 있었다.
거기다 묘족과는 달리, 엘프들은 외부와 교류하는 것을 그리 거부하지 않는 종족이기도 했다.
‘어차피 탑의 원주민을 한번 만나고 싶었다. 가 보자.’
인한이 눈을 빛냈다.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