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
<공략자들 142화>
타오르듯 솟구친 오러는 순간적으로 공간을 하얀색으로 채색했다. 곧 안개가 걷히듯 빛이 개자, 격변한 필드의 풍경이 드러났다.
지반은 푹 가라앉아 분지와 같은 형태가 되어 버렸다. 그마저도 위태롭게 갈라지고 있어서 언제 다시 붕괴되어 다른 형태의 지형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울창하던 나무와 풀들은 흔적도 남지 않고 가루가 되어 버렸고, 암석들도 마력에 의해 갈려져 작은 입자의 모래나 자갈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분지의 가장 깊숙한 곳.
인한의 기술이 집중된 그곳에 아테리너스가 있었다.
그녀의 한쪽 다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고, 온몸에서 피가 철철 흘러나오고 있었다.
“쿨럭!”
무표정한 채로 피를 토한 그녀는 입가를 스윽 닦아 내고는 손등에 묻은 피를 바라보았다. 온몸 가득한 피 때문에 어떤 피가 입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여간 이 몸은 마음에 안 든다니까.”
아테리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녀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더니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인한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건 그렇고, 너도 참 무모한 짓을 하네. 나야 뭐 이 몸 따위야 부서져 봤자 큰 손해는 없는데…….”
아테리너스만큼이나 인한의 상태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오리하르콘 슈트 위로도 보일 만큼, 인한의 오른팔은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공격을 뻗은 팔이 너덜너덜해져서 축 늘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끈적끈적한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는 아니잖아? 아무리 몸이 강하더라도 버틸 수 있는 게 있고 아닌 게 있지. 그런 무지막지한 기술을 어쩌자고 펼친 거야? 이제 그 팔, 영영 못 쓰게 될 거라고?”
아테리너스가 쿡쿡 웃었다.
인한이 펼친 기술, 코로나 임팩트.
온갖 것을 다 태워 버리는 불길과 같은 그 기술은, 무시무시한 위력에 비해 그리 복잡한 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력의 운용부터 기술 자체의 기법도 해태 길드의 간부 정도 되면 하루 만에 익힐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걸 실제로 펼칠 수 있느냐의 얘기로 가면 문제가 달라진다.
인한의 기술은 미사일이 바로 옆에서 터져도, 총알에 쏘여도, 몬스터에게 얻어맞아도 상처 입지 않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 펼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지난 3년간, 인한은 평범한 사람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기술들을 만들어 냈다.
인간이란, 아니, 어떤 종족이더라도 지닌 바 힘이 100이 있다고 해서 100을 전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을 상처 입힐 수 있는 힘이란 즉, 자기 자신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자신의 힘에도 상처 입지 않을 불굴의 육체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생각에서부터 모든 게 시작됐다.
겐지나 이정환, 레오와 같은 기교파 헌터에 비해, 인한은 자신이 천부적인 재능이나 센스가 부족한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굳이 그들처럼 기교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인한은 자잘한 기술을 찍어 누를 수 있는 방대한 힘과 그 힘을 감당할 수 있는 강건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기교를 버렸다.
복잡한 기술이나 난해한 움직임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맞는 간단한 기술들로 돌아갔다.
남들은 기초라고 말할지도 모르는 기술들이지만, 거기에 불굴의 육체를 기반으로 펼쳐 내는 거대한 힘을 담아냈다.
인한 정도의 육체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어쭙잖게 따라 하면 마력에 의해 온몸이 풍선처럼 터지고, 뼈가 박살나고, 근육이 녹아내릴 정도의 위험성을 가진 기술들이지만, 인한은 할 수 있었다.
코로나 임팩트는, 아니, 인한이 3년간 자신에게 맞춰 만들어 낸 모든 기술들은 그렇게 탄생했다.
인한은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팔을 보면서,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직 몸이 안 따라 주는군.”
도저히 한쪽 팔을 잃은 사람이 할 법한 대사가 아니었다.
실제로, 잃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었다.
“……!”
아테리너스가 경악했다.
뿌드득!
고무가 뒤틀리는 듯한 기이한 소음과 함께 인한의 팔이 빠르게 재생되고 있었다.
거품이 솟아나듯 팔의 상처 곳곳에서 새살이 돋아났다.
부러진 뼈들이 이어지고, 찢어진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팔의 상처를 회복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10초도 안 됐다.
아테리너스가 멍하니 눈을 껌뻑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이런 상황이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말이야.”
그녀의 웃음이 잠잠해졌을 때, 인한이 뚜벅뚜벅 아테리너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동안에도 아테리너스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넌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야. 어때,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계약을 하자. 난 네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걸 줄 수 있어. 돈, 명예, 권력…… 네가 그토록 원하는 힘까지! 너, 되게 마음에 들었거든. 네가 할 일은 단순해. 그저 필요한 순간에 나를 대신해 작은 일을 하나 해 주면 되는 거야.”
그러면서 아테리너스는 두 눈을 빛냈다.
인한은 무표정한 채로 아테리너스의 앞에 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절한다.”
“흐으음, 그럴 줄 알았어.”
아테리너스가 천천히 일어섰다.
인한은, 이미 다 회복된 주먹을 그러쥐었다.
“나는 한번 갖고자 한 걸 놓아 주지 않아. 내가 널 보고 있을 거야. 꼭 널 내 것으로 해 주지.”
집념까지 느껴지는 아테리너스의 말에, 인한은 대답하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꾸웅!
주변의 공기가 훅 달아오르고, 오러를 휘감은 인한의 주먹이 아테리너스에게 떨어졌다.
“아아, 근데…… 이제 더 이상 여기서 즐길 수 없는 게 아쉽네.”
안타깝다는 듯이 웃는 아테리너스의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몸은 오러에 타올라 사라졌다.
인한은 탈진하듯 지면에 주저앉았다.
“후우…….”
절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영영 팔을 못 쓰게 될 상처도 금세 회복해 버리는 신체인지라 피곤함을 느낄 리도 없을 텐데,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인한은 팔을 들고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꽉 움켜쥐었다.
‘드디어 왕들에게 한 방 먹여 줬군.’
그건 실로 통쾌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절망감마저 느꼈다.
‘대체 저들을…… 어떻게 이겨야 하는 거지?’
이번 승리는 압도적이었다.
인한은 전투를 시종일관 주도했다.
그렇다고 인한이 그녀를 이긴 것은 아니다.
단순히 리시피르만 보아도, 그는 온전한 상태로 세상에 나타난 것이 아님에도 마나 스킬 8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도대체 8단계에 도달하면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었다.
만약 9단계, 10단계, 혹은 그보다 위가 존재한다면…….
이번에 만난 아테리너스는 8단계에 버금가는 마력량으로 전투에 임했다.
하지만 그걸 어떤 방식으로도 가공하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를 사용했을 뿐이다.
‘아니, 아니다. 내가 나보다 강한 상대를 만난 적이 처음도 아니고. 좌절할 필요는 없지.’
인한이 피식 웃었다.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인한은 언제나 닿을 수 없는 것을 바라보며 무작정 달려드는 천둥벌거숭이 같은 존재였다.
‘해 보자.’
아직 인한에겐 시간이 있다.
더 강해질 수 있는 조건도 있다.
애초에 회귀 후에도 인한은 자신이 이토록 강해질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다면 미래도 마찬가지다.
자신은 더욱더 강해질 것이다.
인한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미소를 지었다.
* * *
35층 필드 레지스.
북부의 히든 던전 ‘왕들의 쉼터’에서 박철환이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히든 던전답게 수많은 몬스터가 곳곳에 숨을 쉬고 있었지만, 단 한 마리도 박철환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두려워하며 덜덜 떨 뿐이었다.
그때였다.
박철환의 눈빛이 기묘하게 흔들렸다.
“전쟁의 왕이 잡혔다?”
그의 눈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터인가? 아니면 이셴? 아무리 유희용 육체라지만 아테리너스를 잡아내다니…….”
놀란 말투였지만, 박철환의 어조는 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다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왕의 씨앗은 아닌가. 그렇다면 어떻게 잡혔단 거지?”
박철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세계는 유난히 변수가 많군. 역시 최하위 위계이기 때문인가. 그도 아니면…….”
박철환의 말이 계속될수록, 몬스터들의 떨림이 더욱 강해졌다.
박철환이 곧 짧게 혀를 찼다.
“이곳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없군.”
그리고 한순간.
박철환의 등에 날개가 돋아났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순백의 날개.
네 쌍의 거대한 날개가 하늘을 덮을 듯이 크게 솟아났다.
화악!
한 번의 날갯짓에 박철환의 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박철환의 몸이 흐릿해지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 * *
인한은 빠르게 달려서 물가로 향했다.
주술을 걸어 둔 결계가 곧 효과가 다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오, 오셨다!”
물가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인한을 알아보고 화색을 띠었다.
물가 주위에는 호랑이를 닮은 거대한 몬스터가 이빨을 드러내고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주술의 효과가 끊긴 것은 아닌지, 투명한 막이 몬스터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콰앙!
인한은 몬스터들을 단번에 처리했다.
그와 동시에 주술의 효과가 끝나 버렸다.
“일단 치료부터 하시죠. 이동하는 건 그 이후입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유찬웅이 고개를 연신 숙이며 말했다.
인한의 존재는 극도의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
달의 검 팀의 헌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휴식을 취하거나 부상을 치료했다.
-모두 구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상당한 수의 피해자가 나왔습니다.
인한은 드루이드의 인형에 대고 말했다.
그러자 작은 나무토막 너머에서 답신이 들려왔다.
-감사합니다. 바로 대통령님께 보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전에 각 탑에 119를 대기시켜 주십시오. 부상자가 상당히 많습니다.
-바로 실행하겠습니다.
인한은 말을 끝내고, 드루이드의 인형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방금 인한이 연락을 취한 이는 탑 관리부 소속의 공무원이었다.
그와 동시에, 탑과 관련된 일에 인한이 연루되었을 때 자잘한 일을 처리해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인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한쪽으로 향했다.
곳곳에서 인한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한은 일일이 인사를 받으며 유찬웅의 옆으로 향했다.
그곳에 하영이 있었다.
마음을 다 털어 냈을 텐데, 사람 마음이란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눈을 감고 기절해 있는 하영을 보는 순간 가슴에 짙은 고동이 울렸다.
“무슨……?”
유찬웅이 의아한 눈으로 인한을 바라보았다.
인한이 힘겹게 입을 뗐다.
“제가 어느 정도 치료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아 왔습니다.”
인한이 하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찬웅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한은 하영의 옆에 앉아 인벤토리에서 작은 단약을 꺼냈다.
단약을 손바닥 사이에 끼고 부스러뜨린 인한이 물병에 넣었다.
곧 녹차처럼 변한 물을, 인한은 마력으로 붙잡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하영의 입으로 흘려 넣었다.
“허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유찬웅이 탄성을 내질렀다.
마력으로 물체를 붙잡고, 그걸 또 이동시키려면 대체 어느 정도의 마나 스킬과 숙련도가 필요한 것인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인한은 곧 하영의 손목을 잡았다.
새하얀 마력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아, 누구…….”
마력이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꼈음일까.
하영이 흐릿한 눈으로 인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곧 다시 눈을 감으며 잠에 빠졌다.
인한은 씁쓸하게 웃으며 손을 천천히 뗐다.
“탑의 입구에 119를 대기시켜 놨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유찬웅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하, 하지만…… 대체 왜? 그리고 하영이에게 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거지?’
인한은 자리에서 일어서 어딘가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유찬웅은 걸음을 옮기는 넓은 인한의 등을 보며, 방금 전 인한이 하영을 바라보며 보였던 눈빛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