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공략자들 141화>
인한과 맞서고 있는 여성.
다름 아닌 전쟁의 왕, 아테리너스였다.
결국 라스틴은 몇 가지 조건을 내거는 대신 왕들이 탑에 개입하는 것을 허락했다.
조건은 이러했다.
오직 유희용 신체만 사용할 것.
도전자들에게 어떠한 종류의 도움도 주지 말 것.
탑의 구조에 영향을 끼칠 만한 짓을 하지 말 것.
마지막으로, 레갈리아를 사용하지 말 것.
일방적이다 못해 팔다리를 잘라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계약이었다.
아무리 급했다지만 ‘노예’나 마찬가지인 라스틴의 요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지혜의 왕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아테리너스는 오히려 만족했다.
적당히 즐기기 위해선 이 정도가 좋았다.
아무리 변수가 있다지만 고작 최하위 위계의 존재들이었다.
지혜의 왕, 그놈은 이번 일을 꽤나 심각하게 여기는 모양이었지만, 아테리너스에게 이번 일은 그저 오랜 무료함과 권태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오락에 불과했다.
그건 인한과 전투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랬다.
분명…… 그럴 터였다.
‘도대체 저 녀석은 뭐지?’
아테리너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콰앙! 콰앙!
생각과 동시에 하늘 위로 떠오른 아테리너스는 지상에 있는 인한을 향해 마력의 포탄을 쏘아 냈다.
마법이나 오러를 통해 마력의 성질을 변환시킨다거나 효율을 높인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다.
그저 한없이 순수한 마력을 압축시켜 그대로 쏘아 내기만 했다.
지극히 비효율적인 방법.
굳이 비유하자면, 보유하고 있는 막대한 화약을 대포나 미사일로 만들어 사용하지 않고, 그저 꾹꾹 압축시킨 화약 뭉치를 만들어 터뜨린 격이었다.
그뿐 아니라 아무리 마력이 넘쳐 나는 사람이라도 이렇게 소모적으로 사용한다면 금세 다 쓸 것이 분명했다.
만약,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은, 다른 어떤 존재도 아닌 왕이었다.
왕들은 세계의 중심, 마나의 축복을 받는 자들.
애초에 마력을 다루는 기관조차 갖추지 않은 그들은 그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하물며 한계조차 없이 마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그들은 굳이 효율성을 추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콰아아아앙!
그녀가 가볍게 손을 까딱할 때마다 지상은 쑥대밭이 되었다.
이미 울창하던 숲은 그 형체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숲이 있었던 자리엔 엄청난 넓이의 황무지와 그곳을 가득한 크레이터만이 있을 뿐이었다.
자욱하게 피어오른 모래먼지를 보며, 아테리너스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도대체 저 녀석은 뭐지?’
의아했다.
이토록 일방적으로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런데, 어째서.
단 일격도 인한에게 직격시키지 못한 것일까.
투확!
그때, 모래 먼지를 걷어내며 인한이 솟구쳤다.
발끝으로 오러를 폭약처럼 터뜨리며 그 반동으로 하늘을 난 것이었다.
정상인이었다면 발이 너덜너덜해지고 피투성이가 됐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공격이었건만, 인한의 발은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이 꽉 물어라.”
순식간에 아테리너스의 코앞까지 도달한 인한이 주먹을 끌어당겼다.
“싫은데?”
아테리너스가 킥킥 웃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콰아아아아아앙!
인한의 코앞에서 응축된 마력이 폭발했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천지가 흔들렸다.
산 하나는 간단하게 무너뜨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이었다.
폭발의 힘에 공기가 증발하며 수증기가 안개처럼 확 퍼져 나갔다.
“정신 좀 들어?”
아테리너스가 킥킥 웃었다.
하지만 그 순간.
화악!
갑자기 수증기가 걷히며 그 속에서 인한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러쥔 주먹의 힘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아테리너스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와, 말도 안 돼.”
콰가가가가!
인한이 휘두른 일격에 유희용 육체를 방어하기 위해 둘러 두었던 마력 장벽이 모조리 쓸려 나갔다.
콰앙!
그 위로 정령술로 펼친 바람의 칼날 수십 개가 아테리너스의 몸을 난도질했다.
‘박살을 내 주지.’
포탄을 장전하듯, 인한이 주먹을 크게 뒤로 젖혔다.
그때.
몰아치는 돌풍을 뚫고 아테리너스의 손이 쭉 뻗어졌다.
오싹!
인한은 흠칫 놀라 공격을 이어 가지 못하고 몸을 뒤로 뺐다.
그와 함께 잠잠했던 미드 코어가 미친 듯이 위험을 알려 왔다.
“아쉽네.”
아테리너스는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씨익 웃었다.
그녀의 새빨간 입술에 핏방울이 잔뜩 맺혀 있었다.
“흐음, 제대로 즐기고 싶어도 유희용 육체는 내구도가 낮단 말이야.”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군. 느낌이 안 좋다.
위그라노아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인한은 지상으로 추락하지 않게끔 바람을 몸에 휘감아 허공에 고정시켰다. 그리고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아테리너스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눈빛만은 깊게 가라앉았다.
“너, 두 명이구나?”
인한은 그녀의 눈빛에 순간 오싹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역시, 들켰나.
인한은 다소 당황했지만, 위그라노아는 그리 놀라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쪽은 아무리 봐도 네 힘의 원천은 아니야. 으음, 이해가 안 돼. 너 정말 인간 맞아?”
아테리너스는 여전히 눈은 웃지 않은 채 입꼬리만 위로 말아 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도무지 이 상황이 황당하다 못해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처음 인한을 봤을 때는 마력량만 놓고 보면 ‘상위 용족급’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마력량만 놓고 봤을 때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마법과 비슷한 정체 모를 비술, 정령술, 상당한 경지에 오른 체술까지.
모든 요소를 다 합친다면 상위 용족이 아니라…….
‘거의 드래곤 아닌가, 이거? 어, 그러고 보니까 진짜 드래곤 같네?’
불굴의 육체.
마법과 비슷한 힘.
고도의 속성력.
상당한 양의 마력까지.
드래곤을 대표하는 요소들이 전부 들어가 있었다.
아테리너스가 점점 더 생각에 잠기려던 때였다.
인한이 천천히 입을 뗐다.
“미안하지만.”
살기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아테리너스를 노려보며, 인한이 씹어 먹듯 한 단어 한 단어를 내뱉었다.
“난 네놈 같은 사이코 정신병자와 달리, 정상적인 한 사람의 인간이다.”
그토록 많은 비극이 세계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
그토록 많은 죽음이 세계를 고통에 빠뜨렸다.
그런데…… 그것이 다 저들의 유희에 불과했던 것이다.
“흐음.”
인한의 악의를 정면에서 받으면서도, 아테리너스는 오히려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너, 점점 더 마음에 드는걸. 후후! 어쩔 수 없지. 그냥 내가 알아보는 수밖에. 딴짓한다고 잔소리 좀 들을 거 같긴 하지만…… 뭐 어때?”
아테리너스가 눈을 빛냈다.
선공은 아테리너스였다.
아테리너스가 땅을 가볍게 툭 찼다.
그 순간, 아테리너스가 인한의 코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신기하지?”
인한은 흠칫 놀라며 양손을 들어 방어 자세를 취했다.
콰앙! 콰앙! 콰앙!
가공할 마력을 양손에 머금은 아테리너스가 주먹을 휘둘러 왔다.
단타로 끊어서 뻗어 내는 권투의 잽과도 같은 공격이었건만, 한 방 한 방에 터져 나가는 마력이 그 여파만으로 인한이 전력으로 펼친 오러에 버금갈 정도였다.
그렇다.
인한 자신의 전력 정도밖에 안됐다.
“…….”
인한이 들었던 손을 내렸다.
3년간 그토록 수련했는데, 정작 실전에서의 습관이 잘 배지 않았다.
방어에 마력을 사용하는 건 낭비였다.
콰앙!
그 순간, 아테리너스의 주먹이 인한의 안면을 후려쳤다.
폭음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인한의 몸이 지면이 뒤집어지며 튀어나왔던 거대한 암석 몇 개를 부서뜨리며 수십 미터나 뒤로 날아가 버렸다.
얼마나 위력적인 일격이었던지, 잔여 마력만으로도 지축이 흔들릴 정도였다.
“응?”
갑자기 자신의 공격이 먹혀들자 의아한 아테리너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직격타를 맞은 인한은 돌더미에 파묻혀 버렸다.
안 그래도 불안한 지면에 처박히는 순간 돌이 와르르 무너진 탓이었다.
“흐음…….”
그 돌더미 사이에서, 인한은 태평한 콧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인한의 육체는 고작해야 1, 2톤 정도의 돌덩이에 깔리는 것으로는 아프지도 않았다.
뚝뚝 고개를 꺾은 인한이 씨익 웃었다.
“생각보다 맞을 만하군.”
인한은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의 힘은 대단했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그저 강한 힘뿐이라면 인한이 이기지 못할 것도 없다.
“어디 그럼 한번, 부서질 때까지 두드려 볼까?”
아테리너스가 그렇게 말하며 땅을 박찼다.
직후, 그녀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또?’
인한이 또다시 흠칫 놀랐다.
첫 번째로 조우했을 때, 그리고 아테리너스가 선공을 펼칠 때와 같은 현상이었다.
공간이 움직이는 것도, 마력이 움직이는 것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새 아테리너스가 코앞에 나타났다.
후욱! 쾅!
바람이 빠지는 것과 같은 소리의 뒤로 폭음이 울렸다.
아테리너스의 주먹이 인한의 육체 곳곳을 무자비하게 강타했다.
아테리너스는 주먹을 휘두르면서도 아연해했다.
생명체의 육체가 아닌, 쇠나 돌덩이를 치는 기분이었다.
특별히 몸에 마력을 두른 것 같지도 않건만, 대체 어떻게 되먹은 육체인지 작은 산을 무너뜨릴 정도의 일격을 연달아 얻어맞아도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아테리너스가 신경질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은 턱에 일직선으로 꽂혔다.
아무리 외부를 단련할 수는 있어도 내부는 약할 게 분명했다. 뇌에 충격을 줘서 일단 쓰러뜨리고 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턱!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신색의 인한이, 자신의 턱에 꽂힌 아테리너스의 팔목을 그러쥐었다.
그리고, 인한의 주먹이 기어코 아테리너스에게 휘둘러졌다.
‘으윽!’
휘익! 콰앙!
아테리너스의 몸이 맹렬한 속도로 튕겨져 나갔다.
경로상에 있는 암석 더미들이 부서지며 돌가루가 사방에 튀었다.
물론, 돌가루라 하더라도 족히 수백 킬로그램은 되는 어마어마한 암석들이었다.
처음에 인한이 튕겨 나갔을 때처럼, 아테리너스도 돌더미에 처박혔다.
“이렇게 되면 이건 불공평한 싸움인걸? 나는 이런 허접한 몸밖에 못 쓰는데…….”
아테리너스가 자신의 몸을 드러내듯 팔을 양옆으로 벌리며 말했다.
공격을 맞기 직전에 마력을 휘둘러 충격을 상쇄시킨 아테리너스였지만, 마력이 인한의 공격을 전부 막아내진 못했다.
그 탓에 온몸이 피투성이나 마찬가지였다.
“쯧…….”
자신의 모습을 한 차례 살펴본 아테리너스가 달려오는 인한을 눈치채고는 살짝 혀를 차며 뒤로 몸을 날렸다.
아테리너스는 거리를 벌리면서도 인한이 달려오는 방향에 수백 개의 마력 폭탄을 흩뿌렸다.
콰가가가가강!
마력과 마력이 연쇄적으로 폭발을 일으키며 공간을 휩쓸었다.
어느새 울창했던 숲에서 불모지로 변해 버린 지면이 또 한 번 콰르릉하는 소음과 함께 흔들렸다.
폭발의 힘이 집중된 곳엔 여전히 마력의 찌꺼기가 남아 자잘한 폭발을 일으키고 있었다.
아테리너스도 고작 이 정도로 인한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래도 주춤하기는 하겠지. 몸을 회복할 시간만 벌면 돼.’
아테리너스는 유희용 육체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던 아테리너스가 흠칫 놀라며 폭심지(爆心地)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나지막한 인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코로나 임팩트.”
3년간 수련의 성과.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한이 스스로를 위해 만든 기술.
부우우우웅!
새하얀 오러가 불길처럼 치솟았다.
쏟아져 나온 엄청난 오러가 넓게 퍼지며 주변을 집어삼켰다.
직선적이었던 그동안의 공격 방식과는 확연히 다른, 말 그대로 불길처럼 사방을 잠식하는 기술이었다.
아테리너스가 몸을 빼려고 했지만, 금세 사방이 오러로 가로막혔다.
“……!”
한순간, 사방이 빛으로 뒤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