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공략자들 136화>
인한은 문의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터널 같은 어두컴컴한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는 좁았다. 기껏해야 사람 두, 세 명이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
인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상당히 어둡군.’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는 좁으면서도 길이가 상당히 길어서 빛이 한 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인한이 샐러를 소환하려 할 때쯤이었다.
‘응?’
어느 순간부터 은은한 빛이 주변에 감돌기 시작했다.
허공에 하얀색 빛의 뭉치가 두둥실 떠다녔다.
반딧불이 같은 그 빛의 뭉치는 지면이나 통로의 벽에서 삐죽 튀어나와 느긋하게 허공을 유영했다.
신비로운 모습이었다.
반딧불이의 무리 속에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인한이 조심스레 빛에 손을 가져다 댔지만, 바람을 만지 듯 아무런 촉감이 없었다.
‘신기해.’
반정령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었지만, 일말의 속성력도 느껴지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저 빛이었다.
덕분에 더 이상 주위는 어둡지 않았다.
아주 밝지는 않았지만, 샐러를 소환할 필요는 없을 정도로 충분한 양의 빛이 통로를 비추고 있었다.
그쯤 통로도 끝을 보이고 있었다.
인한의 눈에 통로의 끝자락이 얼핏 보였다.
그리고 한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
기분 좋은 산들바람에 머리카락이 흔들려 이마를 간질였다.
숲속에 있는 듯한 상쾌한 바람이었다.
지금까지처럼 눅눅하게 고여 있던 먼지 냄새 나는 공기가 아니었다.
곧 통로를 빠져나간 인한은, 입을 쩍 벌린 채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건…….’
지금 있는 곳이 정말 지하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광활한 구(球)형태의 공간이었다.
직경은 족히 2, 300미터는 되어 보였다.
정면에 널빤지를 깔아서 만든 것 같은 형태의 다리가 중심부까지만 되는 곳까지 쭉 뻗어 있었다.
다리의 끝자락에는 작은 집 크기의 구조물이 하나 덩그러니 달려 있었다.
‘저긴가.’
인한이 걸음을 옮겼다.
다리의 끝자락으로 향하며, 인한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런 인한의 눈에 공간의 벽면이 들어왔다.
그저 스치듯이 봤을 때는 흙으로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벽면은 신전처럼 새하얀 암석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구의 건축처럼 시멘트와 같은 것을 바른 게 아니라, 얇은 벽돌 같은 돌판을 촘촘히 박아 넣은 것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 표면에는 다양한 문양을 정교하게 조각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지구와는 다른 문화를 꽃피운 아발론이라는 이세계의 예술이었다.
조각이나 건축에 조예가 없는 인한이 봐도,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를 알 수 있었다.
웅장한 곳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면서도 가볍지 않고, 신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엄숙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곧, 인한은 다리의 끝에 매달려 있는 구조물에 도착했다.
가까이서 보니 작은 집과 같았다.
벽이 있고, 문이 있고, 지붕도 있었다.
인한은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웅장하고 화려한 느낌의 외부와 달리, 건물의 안쪽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실제로 누가 생활을 했었던 것 같은 모습이었다.
책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 푹신해 보이는 침대, 갈색이 맴도는 나무와 의자, 그리고 그 위에 놓여 있는 낡은 곰 인형까지.
벽은 주황색 바탕에 꽃문양이 금으로 세공되어 있었고, 천장에는 반짝이는 샹들리에가 걸려 있었다.
숨겨진 고대의 유적지 같은 외부 풍경과 앙증맞기까지 한 내부의 풍경은 상당히 언밸런스했다.
하지만.
가장 언밸런스한 것은 그 방 한가운데에 있다.
상아(象牙)로 만들어진 작은 관이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온갖 보석이 세공되어 있고, 금으로 곳곳을 치장해 놓은 관.
인한은 조용히 그 관 앞에 섰다.
관 안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굳이 들춰 보지 않아도 인한은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후대의 사람들이 시체가 없는 그녀를 기리고자 주인 없는 관을 이곳에 넣어 둔 것이었다.
[왕의 관(棺)]
[등급 : S]
[종류 : 귀속 아이템]
[소유자 : 최인한]
[효과]
1) 소유자 외에 열 수 없습니다.
천문이 떠올랐다.
인한이 취해야 할 것은 이곳에 있었다.
주인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이것은 관이라고 표현할 만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작은 선물함에 가까웠다.
진정한 의미의 왕의 유산.
인한은 천천히 관의 뚜껑에 손을 얹었다.
그르르릉!
무거운 소리를 내며 관의 문이 열렸다.
그곳에는 검은색 바탕의 얇은 옷 한 벌과 작은 유리병, 그리고 백금으로 만들어진 작은 왕관이 놓여 있었다.
인한이 그 왕관에 손을 얹었다.
* * *
라스틴이 미간을 찌푸리며 새하얀 공간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잔뜩 경직된 그의 표정에서 그의 심경을 엿볼 수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순백의 공간에 작은 균열이 생겨났다.
처음에는 먼지로 오해할 법한 작은 점에 불과했던 균열은, 서서히 그 크기를 키워 갔다.
그리고 한순간.
끼이이이이이익!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니, 정말 그것이 음파의 성질을 띠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세계가 지르는 비명의 울음소리였으며, 결코 나서는 안 될 소리이기도 했다.
후두둑!
수 미터에 달하는 균열에, 결국 공간이 무너져 내렸다.
달걀의 껍질이 떨어지듯 후두두 떨어진 공간의 조각을 바라보며, 라스틴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균열의 크기는 걷잡을 수 없이 거대해져, 끝내는 라스틴의 눈앞에 있는 공간 하나를 전부 가로막을 정도가 되었다.
균열의 너머에 있는 것은 명암(明暗)이 없는 칠흑의 어둠이었다.
콰득!
그리고 그 균열의 너머에서 새의 날개가 쭉 뻗어 나왔다.
네 쌍, 여덟 개의 날개가 공간의 말단을 붙잡았다.
곧이어 균열의 너머에서 어떤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의 제왕, 독수리의 형체를 가진 거대한 새였다.
전설 속의 용암을 먹고 산다는 새가 이렇게 생겼을까.
새하얀 깃털과 새빨간 눈동자, 어떤 강철도 씹어 먹을 듯 단단해 보이는 부리와 세 개의 다리까지.
신조(神鳥)로도, 괴조(怪鳥)로도 보이는 새였다.
“흐음…… 어쩔 수 없다지만, 이 방법은 역시 큰 손해를 보는군. 리시피르 그놈이 앓아누운 이유도 알겠어. 이래선 본체도 큰 피해를 입겠군.”
느긋한 어조로 말하는 그 새를 바라보며, 라스틴이 낮게 이를 갈았다.
‘찬탈자들!’
마음대로 할 수만 있다면, 라스틴은 당장에라도 그 새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눈이 아플 정도로 새하얀 저 깃털을 새빨간 선혈로 물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됐다.
만분의 일, 억분의 일의 확률로 그가 저 새와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할지라도, 저 몸은 ‘지혜의 왕’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수십 개의 유희용 육체 중 하나에 불과했다.
새는 오연한 자세로 천천히 라스틴을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이군.”
라스틴이 씹어 먹듯 말했다.
“계약을 어긴 것을 자수라도 하러 왔나?”
“그게 무슨 말이지?”
“이미 난 네놈들이 이곳에 개입을 해 온 것을 알고 있다. 이토록 많은 버그들이 존재하는데 부정할 생각인가!”
라스틴이 손을 확 펼치자 허공에 몇몇 헌터들의 프로필이 떠올랐다.
천문과 관련된 절대적인 규칙을 무시한 장면이었다.
천문은 자기 자신만 볼 수 있는 것.
자신이 보는 천문을 타인은 볼 수 없는 게 규칙이었건만, 라스틴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이 보는 천문이 보이게끔 펼칠 수 있었다.
“왜, 드디어 마지막 세계가 되니 아까웠나? 이 유희를 더 즐기고 싶기라도 했나? 이 세계의 주민에게 힘을 줘서 내가 계약에 실패하게라도 만들고 싶었나? 하! 웃기는군! 겉으로는 위엄 있는 척하는 네놈들은 역시 찬탈자에 불과하다!”
“무슨 얘기인가 했더니……. 우린 계약을 어기지 않았다.”
“발뺌할 생각인가!”
“대화할 가치도 없는 내용이다. 그렇게 따지면 너도 계약을 어긴 게 되겠지. 네가 코어 스톤에 접속한 것을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나?”
“하! 먼저 어긴 것은 네놈들이다!”
“아니, 우리는 어기지 않았다. 계약의 페널티가 발동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네놈도 마찬가지지. 너나 우리나 계약의 경계선까지 아슬아슬하게 다가갔을 뿐이 아닌가?”
“…….”
라스틴이 입을 꽉 깨물었다.
확실히 그러했다.
계약은 절대적인 법.
계약을 어겼다면, 계약에 의거해 저들은 목숨을 잃었어야 맞았다.
“나는 쓸데없이 그따위 얘기나 하려고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다.”
새는 그렇게 말하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시간이 여유롭지 않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계약을 수정하고 싶다.”
“수정이라니? 계약을?”
라스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와 왕은 계약을 맺었다.
그는 자유를.
왕은 유희를.
그것이 계약의 목적이었다.
그럴 터였다.
새가 천천히 부리를 열었다.
“우리가 이 유희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통로를 만들어라.”
“……하! 무슨 개소리를 하나 했더니, 그따위 소리를 하기 위해 온 것인가!”
라스틴이 조소를 흘렸다.
계약의 내용 중, 그러한 내용이 있었다.
그 어떤 존재에게도 100층을 허용하지 말 것.
지금껏 수많은 세계를 여행하면서, 어떤 세계의 존재도 90층 구간에 들어서지 못했다.
그것은 철저히 계약 내용에 따른 양측의 합의 때문이었다.
하지만 왕들이 개입하면 도전자들이 90층 이상으로 오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
반대로, 탑의 관리자인 라스틴이 개입한다면, 지구의 헌터들은 현재 공략 중인 35층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듣도록 해라. 네놈에게도 그리 나쁘지 않은 제안일 테니.”
“……?”
“우리가 직접 탑에 개입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저 우리의 유희용 육체만 들여보내 주면 충분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 3784번, 최하위 위계의 주민들에게 탑을 오르는 것에 대한 어떤 것도 개입하지 않겠다. 오히려 때때로 그들 중 일부를 처리해 주지. 분명한 것은, 상당수가 죽는다는 사실이다.”
“뭐……?”
라스틴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라스틴에게만 유리한 조건이었다.
현재 3784번 세계인 지구는 압도적인 속도로 탑을 오르고 있었고, 전 차원 중 유일하게 100층에 도달할지도 몰랐다.
라스틴은 이번 세계의 유희만 완수하면 계약이 끝나고, 왕들에게서 영원한 자유를 얻는다.
그런 라스틴에게 있어서, 마지막의 마지막에 하찮은 최하위 위계의 존재들 때문에 계약이 실패로 끝나게 된다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계약을 실패하거나 어기면, 그는 왕들의 영원한 노리개가 되기에…….
‘그런데, 그토록 공을 들여서 계약에 걸리지 않으면서도 도전자들의 힘을 키워 준 찬탈자 놈들이 직접 도전자들을 걸러 주겠다고?’
뭔가 이유가 있다.
구린 냄새가 난다.
“어째서지?”
“뭘 물어보는 것인가.”
“시치미 떼지 마라. 어딜 어떻게 보아도 그 내용대로 계약하면 이득을 볼 것은 나다. 어째서 그런 계약 내용을 들이미는 것이지?”
“별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유희에 직접 참여하고 싶어서이다. 이 세계의 존재들이 발하는 사념은 우리에게 지고의 쾌락을 가져다준다. 우리는 그것을 지근거리에서 경험하고 싶을 뿐이다.”
새는 감정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어조로 무덤덤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미 네가 만들어 둔 이 유희의 방식이 있으니, 우리가 직접 행하면 될 뿐인 일이다. 힘을 모두 잃은 옛 군주의 자유 따위, 우리에게 별로 큰일도 아니다.”
라스틴은 혀를 차며 표정을 찡그렸다.
‘혐오스러운 놈들.’
분명 그 말이 100퍼센트 사실일 리는 없다는 것을 라스틴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인 것은 아니었다.
라스틴이 입을 열었다.
“좋다. 계약의 수정을 받아들이겠다.”
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새의 새빨간 눈동자가 불길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