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공략자들 135화>
해태 길드는 현재 35층까지 진행한 상태였다.
“그놈이 마지막에 연락했을 때, 분명 35층이라고 했지?”
“네, 분명 그랬죠.”
이창훈이 맹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임태호가 씨익 웃으며 이창훈을 바라보았다.
이창훈도 마주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면…… 이제 저희가 앞서 나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흐흐흐!”
“그렇지? 흐흐흐!”
술 취해서 싸운 건 언제고, 벌써 의기투합한 둘은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이정환이 엷은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진행할 겁니다.”
“……뭐?”
이정환의 말에 임태호가 흠칫 몸을 떨었다.
“보스전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필드로 나갑니까. 여기는 아직 마을도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았으니까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고 휴식 시간을 가질 거예요.”
“아, 안 돼! 기껏 추월했는데!”
“안전이 우선이잖습니까?”
이정환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임태호가 무언가 말하고 싶어서 입을 뻐끔거렸지만, 이정환은 사실상 해태 길드의 길드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직의 위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임태호로선 길드원들이 이렇게 많은데 대들 수 없었다.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웅!
이정환이 흠칫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뭐지?’
갑자기 전신에 오한이 드는 것을 느낀 이정환이 사방을 훑어보았다.
‘착각인가?’
피곤해서 몸이 반응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이정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오한은 사리질 기색을 보이지 않고, 끝내는 마력까지 들끓기 시작했다.
‘대체 뭐가…….’
불길한 기분이었다.
서커스 팀의 팀장으로 탑을 오르고, 이제는 해태 길드의 길드장이 되면서 별의별 상황을 다 겪었지만,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하물며 그 절망적이었던 5층에서의 히든 던전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키야아아-!”
언제나 조용하던 세릴이 별안간 몸을 낮추고 코와 꼬리를 곧추세우며 사방을 경계했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변화에 길드원들도 웅성거리며 사방을 살피기 시작했다.
“세, 세릴? 왜 그래요?”
“세릴 씨?!”
옆에 있던 아나스타샤와 이소영이 당황해하며 이정환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정환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지독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정환의 표정이 굳었다.
‘이건…… 몬스터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
이정환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그는 이와 같은 존재를 알고 있다.
동시에, 같은 씨앗 보유자인 세릴도 알고 있을 터였다.
이 탑의 주인이자, 이 세계의 진정한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
왕들이다.
그들이 탑에 개입했다.
이정환이 다급히 외쳤다.
“서두르세요!”
“응? 갑자기 왜 그래? 쟤는 또 왜 저러고.”
“일단 서둘러서 탑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전원, 빠르게 땅의 돌을 이용해 주십시오!”
사색이 된 이정환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는지 임태호의 표정이 절로 진중해졌다.
이정환은 다급하게 필드의 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 탑은 이제 이전과 달라질 게 분명했다.
계약에 의해 이쪽에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게 분명한 그들이 모종의 이유로 이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된 것이라면, 그 자체로 어떤 큰 흐름이 만들어질 게 분명했다.
아직 힘을 쌓지 못한, 연약하고도 연약한 인간들은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흐름이 말이다.
* * *
“이걸로…… 마지막.”
인한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마력이 파고든 위치에서 하얀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웅!
그 하얀빛은 회랑 가득 퍼져 나갔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물비늘처럼 흔들렸다. 인한은 우두커니 선 채 공간이 변화되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화악!
아지랑이처럼 공간이 일그러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을 때, 인한은 일곱 왕이 그려져 있던 광장과 같은 공간에서 정신을 차렸다.
인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문제는 그녀를 아는 사람만이 풀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런 사람은 인한이 전부였다.
인한은 회랑을 똑바로 직진해 나아갔다.
환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윽고 끝자락에 도착했을 때, 거대한 문 하나가 나타났다.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저 문 너머에 있는 것이 이 바로 신전이 숨기고 있는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끼이이익!
인한이 살짝 손을 얹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퀘스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습니다.]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
<패시브 스킬>
[왕의 유산]
[등급 : EX]
[숙련도 : 없음]
[효과]
1) 귀속 아이템 ‘레갈리아’를 사용할 자격을 얻습니다.
[다음 퀘스트로 이어집니다.]
[퀘스트를 받아들이시겠습니까?]
[Y]
천문이 미친 듯이 떠오르고, 마지막에는 거부할 권리조차 없는 불친절한 천문이 떠올랐다.
‘뭐, 어차피 거부할 생각은 없었어.’
[퀘스트를 받아들였습니다.]
[왕의 선택 (4/10)]
[난이도 : EX]
[성공조건 : 용왕 볼카누스와 만나십시오.]
[실패조건 : 죽음]
[상세설명 : 없음]
[보상 : 왕의 자격]
그는 포도주의 왕이었다.
그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술이란 것을 만들었고, 세상에 전파했다.
술은 좋다.
때때로 없던 용기를 내게 해 주고, 삶의 고단함을 잊게 해 주고, 축제를 조금 더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술을 마실 수만 있다면, 그는 어디에서든 즐거웠다.
친구들은 그런 그를 놀렸지만, 별로 상관없었다.
그렇게 놀리는 그놈들도 그가 가는 축제는 좋다고 따라다녔으니까.
축제는 술을 더 즐기도록 만들어 주는 곳이었다.
삶의 고단함을 잊고, 한순간의 유희를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있었다.
축제를 즐길 때면, 그는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오는 걸 느꼈다.
아니, 당시에는 노래라는 개념도 없었다. 그저 흥얼거리는 것에 불과했다.
그의 흥얼거림을 사람들이 농사나 뱃일을 하면서 부르기 시작했다.
그걸 좀 더 제대로 된 곡조로 만들다 보니 악기가 탄생했고, 그게 노래가 되었다.
노래는 곧 시가 되었고, 시는 극이 되었다.
그가 문화의 시작점이었다.
온갖 놀이란 놀이는 그가 만들어 냈다.
술과 축제와 노래와 놀이가 함께하던 기억은 그의 머릿속에서 아주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다.
* * *
사방과 위아래의 구분이 모호해질 정도로 새하얗기만 한 공간.
그 어떤 이물질도 존재하지 않는, 숨이 막힐 정도의 순백 속에 왕좌처럼 생긴 거대한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 의자에 창백한 피부에 유난히 새빨간 입술을 가진 사내가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100층의 주인, 라스틴이었다.
“…….”
한순간, 라스틴의 눈꺼풀이 천천히 떠졌다.
마치 인형처럼 라스틴은 눈을 돌려 주위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로 눈을 질끈 감았다.
아직은 현실 속에 있고 싶지 않았다.
눈을 아무리 강하게 감는다고 다시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는 지금의 감정을 악몽과 같은 현실에 침범당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결국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정말…… 오랜만의 꿈이군.”
피로도, 피곤도 느껴지지 않는 육체를 가진 그는 수면이 필요 없었다.
잠을 자지 않으니, 당연히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가끔.
감옥 같은 그의 육체가 그의 영혼을 감당하지 못할 때, 육체와 의식의 연결이 끊어지며 에러가 발생하고는 했다.
그럴 때면 라스틴이라는 영혼에 새겨진 과거의 편린이 떠올라 의식을 지배했다.
그것이 라스틴에게는 꿈이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머나먼 과거의 즐거웠던 한순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두통이 느껴질 리도 없는데, 안구 안쪽이 뻐근하게 당겨지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곧…….”
잠시 침울한 표정이 되었던 그가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약의 제한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탑에 개입하기 위해선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아무리 왕들이 그가 파고들 여지를 만들어 두었다고 하지만, 천문이라는 견고한 시스템의 눈을 속이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주의 모든 기록을 읽어 내는 기술이라.’
천문.
이것은 그의 시대에 만들어진 기술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왕이라고 자칭하고 다니는 가증스러운 찬탈자들이 만들어 낸 기술이었다.
‘과연 그럴까.’
천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나, 이번 일을 통해 천문에 파고들며 그 시스템에 대해 의아함을 품게 됐다.
우주의 모든 기록을 읽어 내는 기술이라고 말하지만, 정말 그런 것일까.
생명체가 발하는 사념, 의지, 감정 등의 모든 것을 정말 언어로써 분명하게 치환할 수 있는 걸까.
‘하긴, 상관없다.’
천문이 어떤 것이든, 그것은 자유를 얻은 뒤에 하면 될 일이다.
천문을 조작하던 라스틴의 손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연락이 도착했습니다.]
[제1 위계 아발론]
“……수신.”
라스틴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져 갔다.
* * *
갑자기, 레오가 중얼거렸다.
“지랄 났군.”
그는 전신에 피를 가득 묻힌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레오의 옆에 휠체어에 탄 클라우스가 다가왔다.
“너도 느꼈나?”
클라우스의 질문을 무시하고 씨익 미소를 지은 레오가 뒤쪽을 바라보았다.
시산혈해라는 말이 있다.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바다를 이룬다는 말.
그것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몬스터가 처참하게 쓰러져 있고, 그 사이사이로 사람의 신체 일부분들이 굴러다녔다.
그리고 그 시체의 위.
피로 점철된 광경 속, 청명한 빛을 토해 내는 검을 손에 쥐고 있는 사내.
박철환이었다.
-크르르르륵!
죽은 척하고 있었던 것일까.
몬스터의 시체의 틈에서 축구공만 한 크기의 박쥐형 몬스터가 박철환의 등 뒤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지이잉!
박철환이 무슨 수를 쓰기도 전에, 예리한 섬광이 몬스터를 꿰뚫었다.
-키엑!
털썩!
쓰러진 몬스터의 사체는 기이했다.
도저히 검에 의해 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둥그런 상흔.
거기다 불에 지지기라도 한 듯, 상처로부터 새하얀 연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흐음, 대체 시작의 신전에서 뭘 익히면 저렇게 되는 거지?”
레오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질문은 하나만 하지.”
박철환의 말에 레오가 어깨를 으쓱했다.
박철환이 구원의 검을 한 번 털며 핏방울을 떨어뜨렸다.
“우리가 할 일은 변하지 않아. 계속 작업을 할 뿐이다.”
“그런데, 당신…… 대체 뭘 꾸미는 거야?”
레오의 질문에 박철환이 고갤 갸웃했다.
“그건 물어보지 않는 게 아니었나?”
“갑자기 궁금해져서. 내가 원래 좀 변덕스럽거든.”
레오가 그의 장비를 휙휙 휘저으며 말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궁금해하지 않겠어? 저 마법사 양반은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이던데? 인정?”
레오가 클라우스에게 검을 겨누며 씨익 웃었다.
클라우스는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부끄럼쟁이구만. 하여튼 알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지. 어떻게 우리와 같이 탑을 오르는 일개 헌터가…….”
레오의 칼끝이 이번엔 박철환에게 겨눠졌다.
“히든 던전의 위치, 스페셜 던전의 위치, 필드의 구성, 공략법, 타이틀과 스킬까지 다 알고 있는 것일까.”
“…….”
“마치 이미 한 번 탑에 와 본 사람인 것처럼.”
박철환이 지그시 레오를 응시했다.
레오도 박철환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런 너도…….”
박철환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대체 뭘 꾸미고 있는 거지?”
언제나 웃고 있는 레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렇게 나오기야?”
킥킥 웃은 레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글쎄.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