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공략자들 134화>
[시작과 끝의 왕의 신전]
[아발론의 일곱 왕좌 중 제7좌이자, 뭇 왕들의 우두머리가 된 제왕 ‘아리아’의 무덤입니다. 그녀의 사후, 그녀의 죽음을 기리고자 이곳에 신전이 만들어졌습니다.]
시작과 끝의 왕이자 무관의 왕.
거의 확실하게 인한을 과거로 회귀하게 만든 존재이자, 머나먼 옛날 아발론에서 인한과 기억을 공유했을 존재.
‘이름이…… 아리아였나.’
인한은 이제야 그 이름을 알게 됐다.
위그라노아도 그 이름까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인한은 그녀의 이름을 곱씹다, 문득 시야가 뿌옇게 번지는 걸 느꼈다.
“……?”
눈가에 머물렀던 눈물은 곧 방울이 되어 흘러내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떠올라 머릿속을 헤집었다.
분노, 죄책감, 슬픔…….
어째서 이런 감정을 느끼는 지도 모르는 채, 인한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일단 들어가 보자.’
이 감정의 정체 또한, 이 안에 있을지 몰랐다.
인한이 들어온 곳은 종이 있는 자리였던 모양이었다.
내려서자마자 웬만한 대형 몬스터 크기의 거대한 종이 보였다.
웅웅!
그 밑에 있는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자, 묵혀 있던 공기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내부도 마찬가지로 새하얀 돌로 지어져 있었다.
곳곳마다 화려한 조각들이 가득했고, 녹슬지도 낡지도 않은 수많은 장식들이 주위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이윽고 인한은 기다란 회랑을 지나 넓은 광장 같은 공간으로 들어섰다.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군.’
화륵!
인한이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코앞의 허공에 작은 불이 피어올랐다.
샐러였다.
3년의 기간 동안 성장한 샐러는 이제 인한의 생각을 읽고 알아서 움직일 정도의 지능을 갖게 된 것이었다.
“흐음…….”
지면에서 천장까지 족히 3, 40미터는 되어 보였다.
천장은 반원의 모양으로 완만하게 휘어 있었는데, 그 휘어진 부위에 형형색색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들어왔으니 일단 퀘스트가 완료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완료되었다는 천문이 뜨질 않았다.
들어왔을 때 힘들었던 것에 비해 내부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이세계의 건축과 예술이다 보니 예술가나 건축가라면 미친 듯이 달려들겠지만, 인한에게는 그저 조금 화려한 그림과 건물일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걸음을 옮기던 인한이 우뚝 멈춰 서고 짜증 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걸 왜 지금 눈치챈 거지.’
인한이 걸음을 돌려 왔던 길을 그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인한을 맞이한 것은 방금 지나왔던 길의 풍경이었다.
인한이 고개를 돌려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림에 워낙 관심이 없다 보니 여태껏 모른 채로 지나쳤었는데, 지금 보니 같은 그림만 계속 보이고 있었다.
구조야 들어올 때부터 비슷비슷 했으니 더욱 신경 쓰지 못했다.
‘큰일인데.’
인한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환상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일단 종류라도 알아야 파훼법을 찾을 텐데, 언제부터 환상 속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으니 파훼법은 어불성설이었다.
일단 환상이 시작된 부분이라도 찾아야 했다.
몇 번을 빙빙 돌던 인한은 곧, 처음 샐러를 켜서 벽화를 확인했던 공간이 시작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명색에 EX급 던전이라 이거지.’
던전이라는 건 즉 모종의 위험이 있다는 소리.
아무런 위협이 없어서 긴장을 풀고 있었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조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인한 정도의 마력, 거기에 발달된 감각까지 가지고 있으면서 환상에 빠진 시점을 눈치채지 못했다니 말이다.
‘대체 뭘 지키려고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마력 스테이터스 2천 포인트가 넘는 오러에 정령술까지 사용하며 두드려도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결계에, 언제 걸려들었는지 알 수 없는 환상까지.
거기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토록 던전에 입장하기 힘들게 했으면서, 던전의 존재 자체는 쉽게 알아채게끔 단순하게 땅에다 그냥 묻어 뒀다는 것이다.
고작 1층의 히든 던전인 고대인의 도피처조차 던전을 개방하려면 루나 모스라는 몬스터를 잡는 공정이 필요했는데 말이다.
인한은 천천히 손을 뻗어 벽화가 그려진 벽면을 만졌다.
일단 마법이나 저주, 그리고 주술적인 환상은 아니었다.
마법류의 경우 이질적인 마력을 느끼기 마련이고, 저주나 주술의 경우엔 천문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즉, 인한이 경험해 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방식이라는 것이다.
“…….”
인한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벽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한순간, 벽을 향해 전력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그 가공할 일격에 지축이 흔들리며 신전의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꿈쩍도 안 해?”
인한이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아름다운 벽화가 그려진 벽면에는 금조차 그어져 있지 않았다.
예상은 했지만, 금 한 줄 그어지지 않은 벽을 보고 있으니 애꿎은 자신감에 금이 가는 기분이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쌓아 올린 힘이 부정당했다.
‘다시 극멸기다!’
굳이 간 볼 것 없이 인한은 바로 극멸기를 펼쳤다.
또다시 극멸기에 반응하며 환상이 풀어질 것을 예상한 인한이었지만.
우우웅!
벽면은 극멸기에조차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극멸기가 벽에 상처를 입히지도 못했다.
“…….”
인한은 넋이 나간 듯 우두커니 선 채, 벽화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인한은 벽화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내가 올 것을 가정하고 만들어진 미로였다면…… 뭔가 방법이 있다는 소리겠지.’
환상의 트릭만 간파하면 간단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 공간에 트릭을 설치할 만 한 것은 벽화뿐이었다.
인한은 벽화를 살펴 갔다.
‘이건…… 아발론의 이야기군.’
인한은 벽화를 훑어보았다.
벽화는 그저 아름답고 화려한 그림이 아니었다.
자세히 보면, 몇몇 은유와 상징이 들어간 특별한 스토리텔링을 가지고 있었다.
회랑의 벽면에 그려진 것은 한 그루의 사과나무였다.
그 주위를 지키듯, 일곱 마리의 형형색색의 새들이 날아다녔다.
하나둘씩, 다 익은 사과는 땅에 떨어지고, 열매에 모든 영양을 쏟아 부은 사과나무는 생명력을 잃고 앙상하게 가지만 남았다.
인한은 벽화들을 보며 어렵지 않게 의미를 유추할 수 있었다.
‘사과나무는 아발론, 새들은 왕들, 떨어진 사과들은 분화된 차원들이군.’
인한이 뚜벅뚜벅 회랑을 걸었다.
이왕 함정에 빠진 것, 느긋하게 마음을 갖기로 한 것이다.
곧 벽화의 분위기가 상당히 달라졌다.
앙상한 사과나무에 수많은 벌레들이 날아와 가지마저 파먹기 시작했다.
사과나무를 지키던 새들이 필사적으로 벌레들을 쳐 냈지만, 사과나무를 먹고 자란 벌레들은 오히려 새들을 땅바닥에 떨어뜨렸다.
‘왕…… 그리고 마왕.’
새들은 땅바닥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으며, 그들의 피가 사과나무의 영양분이 되었다.
사과나무는 다시금 열매를 맺었지만, 그 열매는 오로지 벌레들의 것이었다.
거기까지 걸었을 때, 인한은 다시 시작 지점으로 돌아온 것을 알았다.
그곳의 벽화는 다른 것들과 조금 달랐다.
흙과 망치를 들고 있는 난쟁이.
술잔과 카드를 들고 있는 젊은 사내.
사과와 화살을 쥐고 있는 긴 귀의 여성.
태양과 달과 별을 조심히 두 손에 들고 있는 여자 세쌍둥이.
온몸에 방패와 같은 비늘을 휘감고, 입으로는 불을 쏘아 내는 한 마리의 용.
형체가 없는, 칠흑 같은 육체에 책과 천칭이 둥둥 떠 있는 정체불명의 존재.
그리고.
새하얀 빛에 휩싸인, 여성의 실루엣을 가진 누군가.
‘저게…….’
인한은 천장에 그려진 그 그림을 지그시 올려다보았다.
‘아리아. 시작과 끝의 왕.’
지그시 그림을 바라보던 인한의 입가에 문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신이나 천사를 연상시키는 그림이었다.
날개만 안 달려 있을 뿐이지, 후광 때문에 몸의 윤곽도 제대로 보이지 않게 그려 놨다.
실제로 그녀는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칭송받았지만…… 사실 그녀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그렇게 여겨지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아리아.
생긴 건 도저히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우면서, 성격은 사람 귀찮게 하는 걸 즐기는 성격 나쁜 말괄량이 소녀.
라스틴이 심혈을 기울여 담근 포도주를 훔쳐 마시질 않나, 도르킨이 힘겹게 가꾼 꽃밭에 강아지를 뛰어 놀게 하지 않나.
기분 좋게 햇볕을 즐기던 드레키의 목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놀다가 역린(逆鱗)을 건드리질 않나.
인한은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사방팔방을 뛰어다녀야했다.
그녀는 악녀(惡女)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워낙 주위 사람들을 괴롭히고 다니니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다 그녀를 귀찮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사람들 모두…… 그녀를 사랑했다.
“……!”
한순간.
인한이 흠칫 놀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 내가 뭘…… 윽!”
욱신!
인한이 갑작스러운 두통을 느끼며 머리를 감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억과 감정이 떠올라 머릿속을 헤집었다.
마치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듯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미지가 머릿속에 플래시백됐다.
‘이게 대체…….’
잊어버린 오래 전의 기억들이다.
아니, 잊어버린 것이 아닌, 금고에 잠겨 있던 기억이 흘러넘친 것이었다.
인한은 그 기억들을 되짚어 갔다.
지금이라면 자신의 일부분을 되찾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뿌연 안개와 같은 것이 떠올라 인한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미지들을 모조리 지워 버렸다.
허탈한 표정의 인한이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장에는 여전히 밝은 빛을 휘감고 있는 일곱 왕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제길.’
어렴풋한 감정만이 떠오를 뿐,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인한은 굳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덕분에…… 알았어.’
인한이 가장 첫 번째 벽화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트릭을 알아챘다.
아니, 정확히는, 플래시백되는 기억 속에서 그 방법을 찾아냈다.
-크르릉!
길을 찾기 위해 불이 조금 더 밝아야 했다.
샐러가 눈치 빠르게 불을 넓게 퍼뜨려 사방을 밝혀 주었다.
‘찾았다.’
인한이 눈을 빛냈다.
유일하게 그녀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천장의 벽화.
그곳에 이질적인 그림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일곱 왕을 묘사한 그림이거늘, 구석진 곳에 자그마하게 꿀단지가 그려져 있었다.
인한은 거기에 마력을 심었다.
분명 극멸기조차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던 벽면이었는데, 그 부분만은 마력이 깔끔하게 빨려 들어갔다.
‘이게 가리키는 건…… 저쪽.’
인한이 걸음을 옮겨 회랑으로 들어섰다.
사과나무와 일곱 마리의 새가 그려진 벽화였다.
그곳에 뜬금없이 포도주를 연상시키는 짙은 자주색의 물방울이 그려져 있었다.
‘여기서 이것.’
세 번째 벽화에는 새들이 머리를 박고 있는 벽화였다.
그림의 분위기와 색감은 어둡고 칙칙하기 그지없는데, 어째서인지 그 그림에서 땅은 새하얀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인한은 폴짝폴짝 이 그림 저 그림을 뛰어다녔다.
꿀단지, 포도주, 들꽃…….
그 뒤로도 작은 곰 인형, 날카로운 칼창, 은하수까지삭제 벽화의 크기가 큰 만큼, 인한이 찾아내는 것들도 많아졌다.
인한은 자세히 보면 알 수 없는 미묘한 요소들을 찾아내 마력을 흘려 넣었다.
‘전부 그녀가 좋아했던 것들이야.’
인한의 심장이 작은 고동을 토해 냈다.
그 고동의 의미를 인한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인한은 얼마 동안 신전 안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