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
<공략자들 133화>
아테리너스가 걸음을 옮겼다.
권태로워 보이는 그녀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웬일이래?”
곧, 어디선가 새하얀 깃털을 가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아테리너스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야?”
새는 토끼의 눈 같은 새빨간 눈동자로 아테리너스를 지그시 응시하다, 천천히 부리를 열었다.
“언제까지 그 짓을 할 셈이지?”
새의 힐난에 아테리너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심심하잖아. 너는 안 그래?”
“무료함을 느끼는 것과 1천에 가까운 생명을 죽이는 것이 무슨 연관이 있지?”
“뭐야? 고작 1천? 난 또 오랜만에 와서 잔소리나 하기에 엄청 많이 죽인 줄 알았네.”
아테리너스의 반응에 새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대로라면 아발론의 생명체들이 모두 죽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겠군.”
“에이, 그건 너무했다.”
아테리너스가 킥킥대며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잔소리하려고 온 건 아닐 테고.”
“굳이 올 필요는 없었지만, 일단 알려 주려고 왔다.”
새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탑에 이변이 발생했다. 우리 둘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에게도 연락을 보냈으니, 오늘 내로 모일 것이다. 되도록 본체로 오도록.”
“흐음.”
시종일관 장난기 가득하던 아테리너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꼭 가도록 할게.”
“흥.”
새는 별로 관심 없다는 듯 천천히 날갯짓하며 하늘로 떠올랐다.
* * *
그 산의 이름은 세계의 이름을 따서 아발리누스라 칭해졌다.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으며, 중턱에서부터 구름이 걸려 있었다.
아무리 고강한 자라도,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아무리 부유한 자라도 원한다고 오를 수 없는 세계의 중심이자 성지(聖地).
그곳에 오를 수 있는 존재는, 세계의 주인이자 세계의 모든 걸 소유한 자들, 일곱의 왕뿐이었다.
“리시피르를 제외하면 전원 다 온 것인가.”
지혜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은 거대한 새였다.
펼치면 하늘을 덮을 듯한 네 쌍의 푸르고도 거대한 날개가 있었고, 머리 부분에는 왕관을 닮은 새하얀 깃털이 솟아 있는 새였다.
“무식하게 차원을 넘나들거나 그래서 그렇지. 멍청한 놈.”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
지혜의 왕이 그 말에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들어가지. 탑에 이상 현상이 감지됐다.”
“아, 잠깐만. 너 뭐야? 본체로 와야 하는 거 아니었어? 너는 왜 유희용으로 온 거야?”
아테리너스가 기분 나쁘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나체인 상태로, 요염하게 다리를 꼬았다.
아테리너스가 앉아 있는 것은 검과 칼과 창과 방패로 만들어진 왕좌였다.
자연히 병장기의 날 부분이 몸을 찌를 터인데, 아테리너스의 백옥 같은 피부에는 작은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노출광에 전쟁광인 너와 달리 난 할 일이 많기 때문이지.”
“흐음, 시비 거는 거지, 지금? 나, 싸워도 되는 거지?”
아르테너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뒤에서 듣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만 해라. 오늘은 분명 일이 있어서 모인 것일 텐데.”
죽음의 왕좌에 앉아 있는 자.
전신에 검은 안개를 휘감고 있는 존재였다.
그 안개 때문에 생김새를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그의 형체가 인간의 그것과는 달랐다는 점이었다.
그의 말에 아르테너스가 코웃음을 쳤다.
“너는 오랜만에 만났는데 변하질 않니. 그 음침함 좀 어떻게 하면 안 될까?”
“원한다면 너도 이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미안하지만 난 아직 죽기 싫어서.”
“그렇다면 얼른 이야기로 넘어가지.”
죽음의 왕이 지혜의 왕을 바라보았다. 아르테너스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지혜의 왕에게 시선을 옮겼다.
“너희들도 씨앗을 통해 충분히 그쪽의 일을 파악하고 있을 것이라 알고 있다.”
지혜의 왕의 말에 모두가 긍정했다.
“내 씨앗 또한 누군가에게 심어 두었다. 그리고…… 그 씨앗에서 묘한 낌새를 느꼈다.”
“묘한 낌새?”
“마왕의 흔적을 느꼈다.”
“…….”
대수롭지 않던 왕들의 기색이 살벌하게 달아올랐다.
“마왕이 개입을 했단 말인가?”
대답한 것은 병마(病魔)의 왕좌에 앉은 자였다.
병마의 왕은 형체를 이루고 있지 않았다. 보라색 기조에 갈색과 붉은색과 녹색이 섞인, 점액질인지 액체인지 알 수 없는 몸을 가지고 있었다.
“라스틴을 말하는 거야?”
아르테너스의 말에 지혜의 왕이 고개를 저었다.
“놈도 움직이긴 했다.”
“그런데 괜찮네?”
“계약 내용을 어기지는 않았다. 우회 루트를 발견한 모양이더군. 우리도 아슬아슬하게 계약의 내용을 넘나들었으니 할 말은 없다. 그리고…… 단지 놈이었다면 굳이 이 자리에 너희를 모으지 않았다.”
“그럼…… 뭐야?”
아르테너스의 장난스럽던 표정이 잔뜩 경직됐다.
현 왕들은 아발론의 주민이 아니다. 또한 그들은 적합한 절차로 인해 왕이 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려 그들의 힘만을 갈취했다.
옛 왕들, 즉 마왕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는 ‘그렇게 되어’ 있었다.
정상적인 왕도 아니거니와 이세계의 존재인 현 왕들은, 세계의 비호를 받고 있는 마왕을 죽일 수 없었다.
마왕들이 현재 의식조차 유지할 수 없다지만, 왕들은 언제나 안심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찬탈자였다.
“힘을 되찾은 놈이 있단 거야?”
“그렇지는 않다. 봉인을 다 뒤져 보았지만,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라스틴을 제외한 다섯의 왕은 여전히 봉인되어 있다.”
지혜의 왕의 말에 아르테너스의 표정은 더더욱 일그러졌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라스틴을 제외한 다섯.
총 여섯이다.
하지만 왕좌는 언제나 일곱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그년은 우리 눈앞에서 죽었어.”
“그렇지. 네 말마따나 죽었지.”
“…….”
죽일 수 없는 존재가 죽었다.
기억하기도 힘든 머나먼 과거를 떠올리며, 아르테너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혜의 왕은 날개를 활짝 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계약을 어겨야겠다.”
“……?”
“탑에 개입해야겠다. 그렇기에 이 자리를 만든 것이다.”
지혜의 왕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리고, 이곳에 모인 그 누구도 그 눈빛을 보지 못했다.
* * *
워낙 규모가 컸기 때문에, 신전을 전부 발굴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없던 인한은 천장의 일부분을 깔끔하게 부숴 버리고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인한이 신전의 윗부분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
채 신전에 접촉하기도 전에, 인한은 투명한 막에 막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인한이 미간을 찌푸리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콰아앙!
마력을 휘감은 일격에 얇디얇은 투명한 막이 출렁였다.
하지만.
“뭐?”
대충 휘두른 주먹에 불과했지만, 웬만한 몬스터는 일격에 침몰시킬 수 있는 힘을 담은 일격이었다.
그런데 막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혹시 힘이 부족했던 것일까.
인한이 다시 한 번 주먹을 끌어당겼다.
우우우우웅!
새하얀 오러가 주먹에 머물렀다.
그리고, 인한이 또 한 번 휘두른 주먹에 투명한 막은 출렁이기만 할 뿐 변화가 없었다.
“…….”
인한이 우두커니 서서 막을 올려다보았다.
묘하게 오기가 솟았다.
“후우…….”
길게 숨을 내쉬는 인한의 눈에 빛이 서렸다.
그 뒤로 1시간.
인한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허억, 허억! 못하겠다!”
인한이 숨을 몰아쉬었다.
결국 인한은 그 얇은 막을 뚫지 못했다.
“이 정도면 진짜…….”
인한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을 끝까지 끌어올리고, 정령술에, 3년 동안 만들어 낸 ‘기술’까지 먹히지가 않았다.
‘퀘스트를 끝내려면 여기로 오라면서, 이렇게 막아 두면 어쩌라는 거지?’
비닐처럼 얇은 막에 불과한 것이 하늘과 땅을 흔들리게 만들 일격에는 출렁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하긴 이렇게 단단하니까 누가 들어오지 못한 거겠지만…….’
아무리 지하에 숨겨져 있다지만, 마력을 익힌 사람이라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는 위치였다.
히든 던전이나 스페셜 던전이라는 말만 들으면 눈 돌아가는 사람의 특성상 이렇게라도 막아 두지 않으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쯧.”
인한이 혀를 찼다.
이러나저러나 지금 인한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펼쳤다. 그런데도 열리지 않았으면 정말 답이 없단 것이었다.
‘아니, 하나 남았나.’
인한이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극멸기가 남았다.
스치는 모든 걸 소멸시키는 힘.
그리고, 아직 인한이 완벽히 제어할 수 없는 힘이기도 했다.
여차하면 신전을 모조리 부숴 버릴지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해 보자.’
인한이 눈을 부릅뜨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위이이이잉!
응집된 오러에 속성력을 흘려 넣었다.
극멸기 특유의 소음이 흘러나왔다.
오러나 속성력이 빛을 발하는 힘이라면, 극멸기는 빛 그 자체다.
인한은 최대한 힘을 억눌렀다.
‘신전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이 얇은 막만 처리한다.’
인한이 손을 얇은 막에 가져다 대었다.
그 순간이었다.
“큭?”
극멸기의 출력이 순식간에 치솟았다.
신전을 막고 있던 막에 닿은 순간, 인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극멸기가 저절로 그 힘을 높였다.
“……!”
그 직후, 얇은 막을 타고 극멸기가 퍼져 나갔다.
마치 투명한 물에 물감 한 방울을 떨어뜨린 것 같은 광경이었다.
그리고.
우우우웅!
얇은 막이 크게 진동하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저 출렁이는 정도에 불과하던 이전에 비하면 엄청난 변화였다.
한순간.
스르륵!
녹아내리듯, 결계가 허물어졌다.
인한은 사뿐히 신전의 위쪽에 착지했다.
계획대로 윗부분을 부숴 버린 인한이 피곤한 표정으로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지치는군.”
극멸기를 그토록 쏟아 낸 것은 국정원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원래라면 상당한 내상을 입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마력도 속성력도 대부분을 쏟아 냈는데 굉장히 편안했다.
[입장 조건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모든 기억을 삭제당하며, 던전의 위치가 이동됩니다.]
“뭐?”
신전에 들어서는 순간, 그런 천문과 함께 날카로운 바람이 인한을 휘감았다.
실리암이 의지를 보내왔지만, 인한은 고개를 저었다. 바람에는 인한을 해치려는 기색은 없었다.
[스페셜 던전 ‘시작과 끝의 왕의 신전’의 입장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시작과 끝의 왕의 신전’에 입장하시겠습니까?]
[Y / N]
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과 끝의 왕의 신전’에 입장하셨습니다.]
[시작과 끝의 왕의 신전]
[아발론의 일곱 왕좌 중 제7좌이자, 뭇 왕들의 우두머리였던 제왕 ‘아리아’의 무덤입니다. 그녀의 사후, 그녀의 죽음을 기리고자 이곳에 신전이 만들어졌습니다.]
[등급 : EX]
[클리어 적정레벨 : 없음]
[최초 발견자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던전의 소유자가 될 수 없습니다.]
[타이틀 <시작하는 자>가 적용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