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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자들-132화 (132/266)

# 132

<공략자들 132화>

인한은 그날을 굉장히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길, 메탈 골렘이 무리를 지어서 움직이다니.”

임태호가 이를 갈았다.

탑을 오르던 해태 길드는 필드에서 상당수의 몬스터 무리에게 몰이를 당했다.

전투를 하자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해태 길드의 모토는 안전이었다.

다수의 팀원을 위험에 빠뜨릴 수 없었기에, 인한은 후퇴를 명령했다.

“그건 그렇고, 상당히 깊숙이 온 것 같은데 여긴 대체 어디쯤인 건지…….”

임태호가 얼굴을 찡그리며 이동 중에 다친 상처에 응급 처치를 했다.

팀원들은 대부분 지쳐 있었다.

지도도, 표지판도 없는 미로 같은 유령 도시를 헤매며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몬스터의 습격이 계속해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투로 인한 피로도 상당했다.

“형님, 제가 한번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철민, 밀러, 맥. 따라와.”

인한은 정찰 관련 스킬을 가지고 있던 동료 세 명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때, 먼 곳에서 묘한 마력의 파동이 느껴졌다.

35층에는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몬스터는 없었으므로, 사람이 흘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인한과 동료들이 동시에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 곳을 되짚어 이동했다.

만약 마력을 흘리는 이가 35층 땅의 돌로 향하는 길을 알고 있는 자라면, 그자에게 적당한 사례를 하고 길을 물어볼 셈이었다.

마력의 근원은 한 사내였다.

광장으로 보이는 넓은 공터에 우두커니 선 사내는 뿌연 연기 같은 마력을 휘감고 있었다.

마력 때문에 윤곽이 흐릿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인한은 본능적으로 사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

인한이 서 있던 곳의 지반이 무너져 내렸다.

‘함정인가!’

지반이 무른 곳도 아니었으며, 사내가 흘리는 마력이 너무 노골적이었기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무언가 거대한 압력에 의해 무너지듯, 지반의 균열도 부자연스러웠다.

지반이 무너지는 속도는 과도하리만큼 빨랐고, 잔해를 밟고 뛰어오르려 해도 무형의 압력이 인한을 짓누르고 있었다.

“길드장님! 뭐 해요!”

오직, 길드원들만 훌쩍 뛰어올라 지상에서 인한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결국 인한은 지하에 추락했다.

당시에는 극체술의 하위 호환인 강체술을 익히고 있었고, 거기다 마력 스테이터스도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족히 7, 8층은 되는 높이에서 떨어진 인한은 낙법과 스테이터스의 도움으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팔다리에 골절상을 입었다.

그 순간이었다.

[??의 퀘스트 ??가 ??]

정보가 전혀 떠오르지 않은 천문이 인한의 눈앞에 떠올랐다.

* * *

[왕의 선택 (3/10)]

[난이도 : EX]

[성공조건 : 퀘스트를 얻은 장소로 돌아오시오]

[실패조건 : 죽음]

[상세설명 : 없음]

[보상 : 패시브 스킬 <왕의 유산>]

인한은 아주 오랜만에 퀘스트창을 열었다.

‘여전히 바뀐 건 없고.’

그곳에서 퀘스트를 받은 직후, 인한은 정신을 잃었다.

이후 깨어나 보니 육체는 어느새 회복되어 있었고, 정체 모를 퀘스트 하나와 스킬이 주어졌었다.

문득, 인한은 오래된 기억 속에서 의문을 끄집어냈다.

‘대체 그자는 누구였을까.’

인한은 미간을 찡그리며 그때 자신을 유도했던 사내를 떠올렸다.

분명, 인한이 지상으로 떠오르지 못하게 압력을 가한 것도 그 사내일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일까.

어째서 인한에게 유적에 들어서도록 했는가.

‘그냥 함정이었던 건가.’

킬러가 함정을 파고 기다렸는데, 그게 운 좋게 왕의 권세를 얻을 수 있는 퀘스트였던 것이다.

말이…….

‘될 리가 없군.’

인한이 고개를 저었다.

당시에는 그저 스페셜 원, EX등급이 자신의 천문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흥분해서 의문을 갖지 않았다.

회귀 후에는 그것에 신경 쓸 이유도 없었다.

아무리 고민해 봤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인한은 고민하는 것을 그만뒀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되기 마련이었다.

‘자…… 그때는 정신을 잃어서 퀘스트를 얻은 직후의 기억이 없었지만, 과연 이번엔 어떨까.’

인한은 지리를 알고 있다는 듯 익숙하게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당시의 일이 너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인한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그곳을 찾아갔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주저앉은 지면과 특별할 것 없는 자그마한 유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지금은 다르지. 여긴 과거야.’

지반이 무너지기도 전이며, 퀘스트를 받기도 전이다.

인한은 그곳에 자신의 의문을 풀어 줄 중요한 열쇠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렇게 기억을 되짚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인한은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리스의 원형 극장을 연상시키는 구조의 광장은,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는 도시만큼이나 광활했다.

‘이쯤이었지.’

인한은 기억을 더듬으며, 유적이 있었던 위치에 올라섰다.

우우웅!

땅 아래로 감각을 집중하자, 눈에 보이지 않는 밑쪽에 어느 정도의 공간이 있음이 느껴졌다.

인한은 마력을 끌어올려 지면에 흘려보냈다.

‘유적이 무너지면 안 되니까. 적절한 힘으로.’

마치 간헐천처럼, 광장의 바닥에 깔린 돌들 사이로 마력이 솟아올랐다.

인한은 마력을 두 갈래로 갈라서, 한쪽은 주변 지반을 고정하고 나머지 한쪽은 들어낼 부위에 집중했다.

그리고.

“분쇄.”

마력이 실린 한 마디의 주문과 함께, 인한이 쭉 뻗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 언령과 수인(手印)에 4개의 마력구가 생성된 미드 코어가 반응했다.

콰과과과과!

인한이 들어내고자 했던 지반이 거대한 압력에 의해 부서지기 시작했다.

지구의 보도블록처럼 광장 바닥에 깔려 있던 암석은 산산조각이 나 돌조각이 되어 버렸다.

두껍고 단단한 지반은 분쇄기에 갈린 듯 고운 입자의 모래로 바뀌어 버렸다.

그 가공할 힘의 여파에 땅이 비명을 질렀다. 광장 일대의 지면이 지진이라도 난 듯 미친 듯이 흔들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인한이 손을 멈췄다.

해수욕장의 모래보다 더욱 작은 입자로 변한 지반을 향해 인한이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일소(一掃).”

한 번에 쓸어버린다.

그 말 그대로, 언령이 뱉어짐과 동시에 모래 입자가 해일에 휩쓸리듯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유적을 가리고 있던 모래가 전부 밖으로 빠져나간 것을 느낀 인한이 마력을 회수했다.

3년 전의 인한이라면 못했을 이적(異蹟)이었다.

하지만 3년의 시간은 인한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성장시켰다.

인한의 힘은 더욱 세련되어졌으며, 강력해졌다.

“…….”

인한은 천천히 스스로 구멍이 뻥 뚫린 곳으로 걸어갔다.

솨아아!

튕겨 나가지 못한 모래의 일부가 지하에 있는 공간으로 쏟아져 내렸다.

인한은 낭떠러지의 끝자락에 선 채, 밑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곳엔, 인한의 기억과는 너무 다른 모습의 유적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기억 속 보잘것없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 일색인 벽면과 기둥, 정교하게 깎아져 있는 조각상과 지구의 고딕 양식과 비잔틴 양식을 절묘하게 섞은 듯한 지붕까지.

그저 지면에 숨겨져 있던 일부가 드러났을 뿐이건만, 누가 보더라도 지금껏 검은 탑을 오르며 보았던 수많은 건축물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느낄 법했다.

“이건…….”

그러나 인한은 그 압도적인 광경을 보며 오히려 당황해했다.

그의 기억 속 유적은, 레지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방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인한이 강제적으로 대부분을 깨뜨리고 부쉈었기에, 더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웅장한 건축물은 뭐란 말인가.

입구도 하나 없으며, 들어가는 방법은 오직 지면을 무너뜨리는 것뿐인 유적.

모든 일의 시작이자, 인한이 찾는 의문의 해답이 있는 곳.

[스페셜 던전 ‘시작과 끝의 왕의 신전’을 발견했습니다.]

거대한 신전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 * *

그 세계의 이름은, 아발론이라고 칭해졌다.

모든 세계의 근원이자, 세계의 말단부터 붕괴되어 가고 있는 세계.

그 세계의 구석.

한 여인이 있다.

하품을 내쉬는 여인의 모습은 별로 특이할 게 없었다.

눈, 코, 입, 귀 다 달려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고, 사지와 몸통이 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

미의 여신이 있다면 이럴까.

백옥 같은 피부와 비단처럼 흔들리는 머리카락, 거기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눈동자까지.

권태로운 듯 쳐져 있는 눈동자에 퇴폐적인 아름다움이 서렸고,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손짓에 묘한 색기가 머물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그녀의 나체는 뭇 남성들을, 하물며 동성조차 넋을 잃게 하기에 충분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왕좌가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또한, 온갖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화려한 티아라가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사, 살려 주십시오…….”

여인은, 죽은 자들의 시체를 의자로, 그들의 굳은 피를 왕관으로 쓰고 있었다.

여인의 발밑에는 긴 귀와 갈색의 머리칼을 지닌 아인종, 드워프가 벌벌 떨고 있었다.

그들을 바라보며 여인이 나직이 말했다.

“미안해. 하지만 심심한 걸 어떻게 해.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왕 따윈 되지도 않았단 말이야.”

“와, 왕이시여, 우리 붉은 모루족이 부디 당신의 권태를 풀어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 그러니 부디 더 이상의 종족들을…….”

“음, 그럴까? 기회를 줄까?”

“예! 부탁드리옵니다!”

붉은 모루족의 족장을 보며 싱긋 웃은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인은 나긋나긋한 움직임으로 시체로 만들어진 언덕을 밟고 천천히 내려왔다.

“그럼 이렇게 하자.”

여인이 히죽 웃으며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붉은 모루족의 족장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너희 종족들을 둘로 나누고 전쟁을 벌여. 이긴 쪽은 살려 주지. 지금 당장. 어때?”

“그, 그게 무슨……!”

여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싫어?”

“그, 그…….”

“싫으면 말고. 시작은 너희가 먼저 했잖아. 내가 최고의 검을 만들어 오라니까, 그냥 툭 치면 부러지는 걸 가져왔으면서?”

여인이 싱긋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아름다운 미소였고, 우아한 손짓이었다.

“컥! 큭!”

투확!

하지만 그 손짓에, 족장의 코를 향해 무언가가 파고들었다.

순간 호흡이 멈췄지만, 금세 다시 신색을 되찾은 족장이 의아한 얼굴로 여인을 바라보았다.

“지금 심은 건 전염병이야. 호흡 기관으로 전염되는 녀석인데 단가도 싸고, 효과도 좋은 방법이지. 전쟁은 효율이잖아? 하하하!”

여인은 그렇게 웃으며 걸어갔다.

“전염? 호흡 기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족장은, 그저 살아 있단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 직후.

“쿨럭!”

기침 한 번에 족장의 입에서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그에 경악한 족장이 고개를 돌려 여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미 여인은 사라져 있었다.

“도, 동지들이여…….”

족장은 도움의 손길을 바라며 그의 부족원들에게 짧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순간, 족장을 중심으로 부족원들의 코와 입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삼백에 달하는 붉은 모루족이 몰살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세계는 여인을 이렇게 불렀다.

전쟁의 왕, 아테리너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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