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131화 (131/266)

# 131

<공략자들 131화>

시작과 끝이 보이지 않는 순백의 공간.

검은 탑 100층.

그 공간에서 움직이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그 사내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화악!

한순간,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땅의 돌을 수백 배 키운 것 같은 모습의 아이템인 코어 스톤이 나타났다.

사내는 그 거대한 갈색의 암석에 손을 얹으며,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방법을 찾았다.”

사내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코어 스톤의 이곳저곳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천문이 미친 듯이 떠올랐다.

[권한이 없습니다.]

[허가되지 않는 경로입니다.]

[권한이 없습니다.]

[5분 내로 코드가 입력되지 않으면, 관리자 권한이 강제 소거됩니다.]

“더러운 찬탈자 놈들. 별것도 아닌 정보라 방어벽도 설치해 두지 않았나? 이번만큼은 감사를 표하지.”

라스틴이 코어 스톤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그 순간, 떠오르던 천문이 씻은 듯 사라졌다.

[긴급 코드가 등록되었습니다.]

노이즈 섞인 영상처럼, 곳곳이 지지직거리는 천문이 떠올랐다.

[변형된 검은 탑]

[관리자 : 라스틴]

[소유자 : 지혜의 왕]

[등급 : ??]

[종류 : ??]

[효과 : ??]

[사용자 수 : 3,680,027명/430,212,900명]

사내, 아니, 검은 탑의 관리자이자 왕들과의 모종의 계약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세계의 정수를 착취하고 다니는 자, 라스틴이 나직이 말했다.

“관리자 권한, 상세 정보.”

라스틴의 말과 함께 수많은 정보가 천문에 떠올랐다.

검은 탑을 오르는 자들에 대한 정보였다.

국적, 키, 나이, 레벨, 스테이터스, 진행 중인 층수.

수도 없이 많은 정보가 떠올라 있었다.

라스틴은 4억이 넘는 사람들의, 그 수십 배는 되는 정보를 고작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모조리 훑어보았다.

“벌써 31층이었군. 그 상태로 잠에 빠져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현재 검은 탑은 31층까지 공략됐다.

지금껏 제일 빠른 공략 속도와 가장 높은 층까지 도달했던 세계는, 최강종이라 불리는 용족의 말단인 용인족(龍人族)들이 살고 있던 드라고니악이었다.

드라고니악은 아발론에서 세 번째로 분화된 세계에 살아가던 존재들이었다.

강인한 육체와 마법 적성은 물론이거니와 태생적으로 마력을 타고 나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빠른 속도로 검은 탑을 오를 수 있었다.

비록 90층에 도착하기도 전에 멸망했지만 말이다.

그런 그들도 30층 구간에 도착하기까지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최하위 위계이자 아발론에서 마지막으로 나눠진 세계인 지구에서 고작 15년 남짓한 시간 만에 30층 구간에 도착한 이가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왕들에 의한 개입이 다른 어떤 세계보다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아직 31층인 것이 납득되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었다.

‘온갖 차원을 거쳐 오며 나는 검은 탑의 층을 강화시켰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라스틴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원래 검은 탑은 아발론의 일부를 공유한 세계였다.

그는 곳곳에 아발론의 생명체들과 그가 직접 만들어 낸 몬스터들을 심어 뒀다.

그리고 수많은 세계의 정수를 흡수하며, 적절한 세계를 탑의 일부로 수렴하는 방식으로 검은 탑을 더 강화시켰다.

왕들과의 계약은, ‘그 어떤 자도 100층에 도달하지 못하게 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버그가 있을 게 분명하군.”

라스틴이 손을 한 번 휘젓자 순식간에 수많은 헌터들의 프로필이 사라졌다.

그리고 남은 프로필을 한 번 더 살피던 라스틴이 눈을 빛냈다.

“찾았다.”

떠오른 것은 고작 두 자리 수에 가까운 헌터들.

그들 모두, 검은 탑에서 쟁쟁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자들이었다.

“클라우스 두비취, 이셴, 카미유 밀러…….”

하나둘씩 그들의 정보를 읽어 내려가던 라스틴이 흠칫 놀랐다.

“이놈은 뭐지?”

[사용자 정보]

이름 : 발터 에스키엘

종족 : 인간

레벨 : Lv.291

타이틀 : 불가해(不可解), 학살자, 싸움꾼, 하늘에 닿은 자…….

클래스 : 구도자(求道者)

……

[도전 중인 층 : 31층]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지구의 검은 탑은 최인한과 발터 에스키엘.

이 두 명에 의해 공략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나머지 헌터들 중, 대부분의 쓸 만한 사용자들은 20층부터 25층 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그들의 평균 레벨은 100레벨과 150레벨 사이다.

아무리 최전선을, 거기다 혼자서 달리고 있다지만 믿을 수 없는 레벨이었다.

그뿐 아니다.

보유 타이틀의 숫자는 라스틴의 머리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정도였다.

발터 에스키엘은 쉽게 얻을 수 있는 타이틀부터, 라스틴이 그 누구도 얻지 못하게 만들어 두었던 타이틀까지 모조리 갈아치운 것이다.

“믿을 수가 없군. 거기다…….”

왕들의 도움이 있을까 했건만, 그런 것도 없었다.

버그로 선택된 자들이 대부분 씨앗이 심어진 자들인 것을 생각하면, 이자는 오로지 개인의 강함만으로 버그로 인식된 케이스였다.

“대체 이 세계는…….”

자신들의 유희가 끝나는 것을 버티지 못한 왕들이 개입해 온 건 줄 알았건만, 사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토록 많은 버그에, 이토록 많은 변수가 존재했다.

이 보잘것없는 세계에 어째서 왕들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놈들에게 기억이 봉인당하지만 않았더라도.’

라스틴은 다시 천문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가 고개를 갸웃했다.

“웃기군. 정작 나와야 할 놈들의 이름은 없어.”

라스틴이 허공에 손을 뻗어 무언가를 끌어내렸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을 들여 일일이 찾아낸 네 명의 천문을 띄웠다.

[사용자 정보]

[최인한]

[이정환]

[레오 뒤보아]

[박철환]

천문이 읽히지 않는, 최고의 버그들.

그들 중 한 사내의 이름을 본 라스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일을 하고 있는 놈이 한 놈 있기는 하군.”

이름에서 눈을 뗀 그가 나머지 세 명을 살폈다.

이들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나머지 셋은 그가 의도해서 심은 버그들이 아니었다.

단순히 왕들의 개입이었다면, 지금 사용자 정보가 떠올라야 정상인데 이들은 아무것도 읽히지가 않았다.

‘설마 예비 사도라고?’

아니, 그렇다 하더라도 정보가 떠오르는 게 정상이다.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알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은 변수가 있다.

왕들의 개입, 버그를 가진 존재들, 우주의 모든 정보를 읽어 내는 천문을 무시하는 존재들.

무시하고 있던 세계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아니, 이미 벗어난 상태였다.

문득 지독한 분노가 차올랐다.

라스틴은 떠올랐던 천문을 모조리 치워 냈다.

“버그는…… 뿌리부터 뽑아 버릴 뿐.”

라스틴이 천문을 조작했다.

* * *

검은 탑, 35층, 레지스.

사방이 유적지로 되어 있는 층이었다.

5층도 곳곳에 유적이 가득한 곳이기는 했다.

그래도 그곳은 숲이나 산도 존재하고, 그 사이사이에 유적이 조금씩 자리를 잡은 형태의 공간이었다.

그에 비해 레지스는 층 전체가 하나의 유적이었다. 필드를 거닐다 보면, 풀이나 나무보다 오래된 건물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올 때마다 생각하지만 유령 도시를 보는 기분이군.’

레지스의 유적들은 대부분 상태가 좋은 편이었다.

물론 곳곳에 잡초가 나 있고, 건물도 낡았지만, 충분히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상태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도로와 수로의 흔적 또한 찾을 수 있었고, 세워져 있는 건물에 들어가 보면 화석처럼 변한 생활용품들을 볼 수도 있었다.

회귀 전, 헌터들은 이곳을 제2의 폼페이라고 불렀다.

‘이곳도 정수를 빼앗긴 세계인가?’

인한은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35층은 지극히 인간과 비슷한 생활 양식을 띠고 있는 곳이었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때, 인한의 뇌리에 의식이 스며들었다.

-모든 세계가 다 정수가 빼앗긴 세계인 것은 아니다.

“음?”

위그라노아였다.

힘을 회복하고 있는 위그라노아는, 몇 달에 한 번씩에 불과하지만, 때때로 정신을 차리고 세계수의 신관인 인한에게 의념을 보내왔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나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검은 탑에 있는 모든 곳이 점령당한 세계인 것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검은 탑이 나타난 첫 번째 세계는 어떤 층도 없었겠지.

“그건…….”

인한이 눈을 번쩍 떴다.

위그라노아의 지식을 받은 인한은 위그드라실에 나타난 탑도 100층이 최대층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 예상엔, 이곳은 아발론의 한 부분이다. 초창기의 탑은 대부분이 아발론의 일부분이었을 것이다. 아마 이 가증스러운 탑의 관리자가, 유희에 써먹기 괜찮다고 생각되는 세계만 선정해 탑의 공간으로 만든 것이겠지.

그러고 보면 고대인의 도피처에도 아발론과 왕에 대한 정보가 적혀 있었다.

5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한이 으득 이를 갈았다.

“정말 제멋대로들이군.”

하지만 인한은 이내 분노를 잠재우고 레지스의 거리를 걸었다.

레지스의 크기는 대략 대한민국의 3분의 2 정도 되는 크기였다.

그 거대한 대지가 모두 유적지로 되어 있었다.

인한은 느릿한 걸음으로 필드로 나섰다.

레지스에 나타나는 몬스터는 그리 특별할 건 없었다.

그저, 층수에 걸맞게 강할 뿐이었다.

-쿠오오오오!

휘익!

메탈 골렘이 갑자기 측면에서 돌진해 왔다.

일직선적인 움직임이기에 피하면 됐지만, 인한이 마주선 채 주먹을 휘둘렀다.

콰앙!

새하얀 빛무리가 메탈 골렘의 내부로 파고들었다.

-쿠오!

오른쪽 몸의 일부가 무너져 내린 메탈 골렘이었지만, 핵까지 마력이 닿은 것은 아니었다.

메탈 골렘은 순식간에 몸을 회복시킨 후, 그대로 인한에게 몸을 들이박았다.

콰앙!

몇 톤이 넘는 메탈 골렘의 엄청난 질량을 담은 박치기에 고작 80kg 남짓한 무게를 가진 인한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인한의 몸이 붕 떴다.

작은 1층짜리 유적을 몇 채나 부수고서야 인한이 멈춰 섰다.

유적지의 안쪽에서, 인한이 잔해를 비집고 천천히 일어섰다.

“역시 35층쯤 되니까 슬슬 힘들어지긴 한단 말이지.”

우는 소리와는 다르게 옷이 조금 더러워진 것 외에는 인한의 몸에는 생채기도 하나 없었다.

-쿠오오오오!

콰앙!

메탈 골렘이 땅을 박차고 인한에게 달려들었다.

인한이 주먹에 끌어당겼다.

위이이이잉!

인한의 주먹을 중심으로 바람이 와류를 일으키며 모여들었다.

실리암을 소환한 것은 아니었다.

강맹한 오러의 힘에 주변 공기가 들끓은 것이었다.

메탈 골렘이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인한이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

메탈 골렘의 상대법은 회복하는 놈의 육체를 타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 숨겨진 핵을 찾아내 공격하는 것이었다.

인한도 그 방법을 사용하기는 했다.

다만, 굳이 핵을 찾으려 하지 않고 핵과 함께 몸체를 모두 부숴 버렸을 뿐이었다.

쿠구구구!

오러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메탈 골렘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인한은 손을 툭툭 털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