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공략자들 129화>
인한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련을 진행했다.
‘시작해 볼까.’
처음은 기술을 탐구하는 일이었다.
인한은 마력과 정령술을 어느 정도로 제한하고, 기술에 집중했다.
그동안 잘 쓰지 않던 파검식부터, 폰 체술까지 골고루 탐구했다.
하지만 인한은 곧 그 방법을 버렸다. 그동안과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한 것은 전력을 다하는 일이었다.
콰아아앙!
일격, 일격에 천지가 요동쳤다.
이미 1천 스테이터스를 넘긴 마력에, 속성력도 2백이 넘었다.
몬스터는 부산물을 남기지도 않고 분쇄됐고, 근처에 있던 나무나 암석들도 형체를 유지하지 못했다.
이미 검은 탑에서 전력을 다할 일이 없기 때문에, 인한은 힘을 어느 정도 억제해 왔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굳이 잡몹 하나 처리하는 데에도 전력을 다했다.
극멸기라 불리는 힘은 여러모로 펼치기도, 유지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마력과 정령술은 밑바닥까지 쏟아부었다.
마력을 모두 소모해 쓰러지기를 수십 번, 속성력을 모두 소모해 샐러와 실리암을 역소환시키기를 수십 번…….
‘허억…… 허억…….’
인한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몇 번이고 한계에 부딪혔다.
마력이란 것은 인간에게는 물과 비슷한 요소였다.
극한까지 소모한 마력에 인한은 탈수 증세와 같은 감각을 느끼고는 했다.
그러다 결국 인한은 그 방법도 포기했다.
마력과 속성력을 한계까지 뽑아내는 것은 그저 몸을 축낼 뿐이고, 큰 소득을 볼 수 없었다.
마나 스킬과 정령술의 숙련도적인 부분에서는 큰 성장을 맛보았지만, 인한이 바라는 것은 수치상의 성장이 아닌 일종의 깨달음이었다.
마력과 속성력을 한계까지 사용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시도한 것은 모든 걸 백지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었다.
극체술, 정령술, 파검식, 트리아스 액셀, 폰 체술, 아이언 크래시, 제국식 유술…….
가진 모든 것을 잊고, 기초부터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 첫 번째로 한 것이 바로, 마력으로 감각을 뒤틀어 버리는 것이었다.
인한은 적당한 안전지대에 들어가, 마력을 끌어올려 전신의 신경선에 혼란을 줬다.
굉장히 무모하고 극단적인 방법이었다.
인한도 앞뒤 생각 없이 바로 실행한 것이었는데…… 낭패를 봤다.
‘크윽! 숨이!’
인한은 헐떡이는 것조차 하지 못한 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근육의 이완과 수축, 관절의 움직임, 호흡의 타이밍까지.
모든 감각이 뒤틀린 인한은 한동안 호흡부터 연습해야 했다.
반나절을 내리 누운 채 호흡하는 법을 되찾는 데 사용했고, 나머지 반나절을 자리에서 일어서는 데 사용했다.
걷는 것, 뛰는 것, 제자리에서 점프하는 것, 팔다리를 뻗고 접는 것, 무거운 것을 들었다 내려놓는 것.
그런 간단한 동작을 해내는 데 무려 한 달이 걸렸다.
인간의 몸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하나의 시계와 같았다.
근육과 뼈와 신경과 혈관은 작은 톱니바퀴 같았고, 단순히 팔을 움직이는 동작 하나에도 수십 개의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마치 갓난아기처럼, 인한은 그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법을 다시 한 번 되찾아 가는 과정을 천천히 습득해 나가야 했다.
그래도 몸을 움직이는 것은 금세 해결됐다.
어느 정도 인간의 육체에 대한 이해가 따라가자, 오히려 예전보다 몸의 움직임이 더 좋아지는 일이 발생했다.
문제는 마력 쪽이었다.
마력을 움직이는 감각조차 잊어버려서, 인한은 마력의 운용조차 처음부터 다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것과 달리, 마력은 본능적인 영역의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집중해도 마력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별의별 방법을 다 사용했지만 마력원에서 마력을 끄집어낼 수 없었다.
평소의 마력 운용법을 되찾고, 전투 상황에서 자유자제로 마력을 다루는 것에만 1년이 넘게 걸렸다.
마나 스킬을 전혀 몰랐을 때처럼 모든 것을 제로부터 다시 알아 가는 느낌이었다.
그런 예상치 못한 고생을 했지만, 그 고생은 인한에게 많은 걸 가져다주었다.
그동안 놓쳤던 것, 알고도 하지 않았던 것, 할 수 있는 것 등 수많은 요소들을 재확립시켰다.
마력의 운용은 세련되어져 갔고, 정령술의 숙련도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뤄 냈다.
그리고 마침내 어떠한 가닥을 잡았다.
그 가닥을 잡는 것에만 3년이 흘렀지만, 드디어 인한은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시키는 중요한 요소를 하나 잡아낼 수 있었다.
‘느려도 어쩔 수 없지. 내 재능이 그 정도인 걸.’
그런 엽기적이기까지 한 수련을 통해 강해졌고, 그 전부터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했던 인한이 굳이 아래층에 내려온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인한은 꽤 오랫동안 31층 공략을 애먹고 있었다.
30층을 넘어선 순간부터, 10층의 블러드리드나 5층의 샌드 크리퍼처럼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만 쓰러뜨릴 수 있는 보스 몬스터들이 나오고 있었다.
특히 31층의 보스 몬스터는 물리 타격에 ‘절대적인 저항’을 가지고 있었다.
온몸이 슬라임처럼 점액질의 액체로 되어 있는 놈은 인한에게는 카운터나 마찬가지인 상대였다.
솔로로 움직이는 인한은 동료의 지원도 받을 수 없으니 미래의 공략법을 사용해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킬러들을 만나 아이템을 얻은 건 부수적인 이득이라 할 수 있었다.
인한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필드를 걸었다.
가벼운 걸음으로 길을 가던 인한은 힐끗 협곡의 한쪽을 바라보며, 잠시 멈춰 섰다.
그곳 절벽에는 거대한 파괴의 흔적이 있었다.
거대한 몬스터가 할퀸 것 같기도, 포탄이 날아와 터진 것 같기도 했다.
사방에 거대한 크레이터들이 가득했고, 부서진 암석들과 토사가 사방에 가득했다.
도저히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없을 것 같은 흔적이었다.
하지만, 저 중 일부를 인한이 만들어 냈다.
2년 전, 막 플로리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었다.
인한은 그곳에서 발터 에스키엘과 부딪혔다.
랭킹 1위, 인한의 동경, 천부적인 싸움꾼.
그는…… 믿을 수 없이 강했다.
‘역시, 아직이야.’
인한은 어쩌면 자신이 지금의 헌터들 중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발터 에스키엘은 그런 인한의 자만을 간단히 깨뜨려 버렸다.
인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지나간 일이었다. 지금은 얼른 35층에 도착해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것만 생각해야 했다.
“후우, 끝났군.”
인한은 플로리의 협곡 깊숙한 곳에서 거대한 몬스터 한 마리의 피를 작은 병에 담았다.
병을 굳게 밀봉한 인한은 인벤토리에 피를 넣고 허리를 쭉 폈다.
그때였다.
주위에서 부스럭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인한이 한숨을 길게 내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크르르…….”
“으, 으우으…….”
어느새 인한을 둘러싸고 수많은 헌터들이 몰려 있었다.
그들 모두 동공에 힘이 풀려 있었고, 사지가 기형적으로 부풀어 있었다.
인한은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장적인 측면에서 인한이 3년간 여러 수련을 반복해 왔다면, 그 외적인 부분에서 인한에게 있던 변화는 이것이었다.
“오늘도 시작인가.”
인한이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고 있든, 하물며 히든 던전을 찾아서 거기에 틀어박혀 있어도 이 기묘한 상태의 좀비와 같은 인간들이 인한을 찾아왔다.
1층에서 겐지와의 만남 후 인한을 찾아왔던 자와 같은 종류의 존재들이었다.
이들을 마주한 인한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살인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이미 죽어 있었다.
저렇게 숨을 쉬고, 움직이고 있지만, 분명 죽어 있었다.
우우우우우웅!
마력의 총량이 믿을 수 없이 증폭된 인한의 주먹이 새하얀 빛을 토해 냈다.
‘대체 어떤 놈인지…… 얼굴이라도 보고 싶군.’
아무리 죽은 자이고, 자신을 노리는 자라지만, 사람에게 살수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크르아아아아!”
한 나체의 사내가 인한에게 달려들었다.
인한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 * *
검은 탑 1층, 시작의 마을.
초창기의 조악한 조립식 건물이나 비포장도로로 가득하던 거리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이제는 여느 선진국의 대도시 못지않은 풍경을 가지게 되었다.
마천루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꽤 층수가 있는 빌딩들이 곳곳에 자리했고, 그 건물마다 유명 브랜드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밤이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 어두워졌던 예전과는 다르게 마을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길거리마다 사람들이 넘쳐 났고, 음식점과 술집들이 문을 열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런 시작의 마을의 흔한 술집.
대단할 건 없지만, 검은 탑 안에서 재배한 보리로 만든 맥주 하나로 꽤 인기를 누리고 있는 술집은 오늘도 사람들로 북적였다.
“어이, 그 소식 들었나?”
“소식? 뭐가?”
“해태 길드가 기어코 29층을 돌파한 모양이더군.”
“허어, 벌써? 29층은 분명 ‘공중 계단’ 아니었나? 그…… 구름에 휩싸여 있어서 막혀 있다는 필드. 이소영 방송에서 본 거 같아.”
“맞아. 거기 말이야. 사실 그게 다 환상이었다더라. 그러니까 필드에 진입하려면, 일단 환상부터 깨야 하는 거였어.”
“허어! 난이도가 왜 그러냐? 올라갈수록 이상해지네.”
“그런데 해태 길드가 그걸 또 클리어했다는 거지.”
3차 몬스터 웨이브의 위험이 발생했던 3년 전…… 정확히는 4년 전의 사건 이후, 현재 검은 탑은 30층까지 공략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선두에 있는 공략 길드는 다름 아닌 다국적 헌터 연합, 해태 길드였다.
“흥! 해태 길드? 그 인원수로 밀어붙이는 바보들 아닌가! 그렇게 머릿수로 우르르 몰려가서 공략하는 거면 나도 하겠다! 크크크!”
그때, 옆자리에서 자작하고 있던 사내가 조소를 흘리며 말했다.
언뜻 해태 길드에 대한 설명을 대충 들은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해태 길드는 분명 상당한 수의 머릿수를 무기로 공략을 해내고 있는 조직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사내의 말에 호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무시했다.
“어이, 아저씨. 조용히 마시다 가쇼. 꼽사리 끼지 말고. 또 뭣도 모르면서 술김에 헛소리나 하네.”
“뭐야?! 야! 내가 이래 봬도 지금 9층까지 오른…….”
“아아, 그건 됐고. 지금 해태 길드에 랭커만 몇 명이 있는 줄 알고 그런 소릴 하는 거요?”
“…….”
술 취한 사내가 얼굴을 확 붉히며 무언갈 외치려다 입을 꾹 닫았다.
사내의 말에 술집에 있던 사람들이 코웃음 친 이유가 이것이었다.
해태 길드는 단순히 인원수만 믿고 공략을 진행하는 그런 길드가 아니었다.
인원수만 믿고 밀어붙여서 해태 길드 정도의 업적을 이뤄 낼 수 있었다면, 지금껏 누구나 그렇게 했을 것이었다.
해태 길드는 그저 덩치만 클 뿐인 조직이 아니었다.
보유 랭커 수 18명.
사실상 전체 랭커 수의 20퍼센트를 보유하고 있는 조직인 셈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이번에 해태 길드가 여름 시즌을 맞이해서 장검 시리즈를 발매한다는 걸로 알고 있는데, 들었냐?”
“그래? 응모 중이야?”
“이번 주까지야. 거기다 다름 아닌 세계수 시리즈다. 믿겨지냐?”
“대박인데?”
“이야! 해태 길드, 거기 소속된 사람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소속 길드원들은 장비 시리즈를 모조리 받는다던데.”
해태 길드는 뭇 헌터들의 로망과 같은 조직이었다.
검은 탑 자체를 클리어해서 세상에 퍼졌던 검은 탑의 악몽을 끝내겠다는 꿈을 품은 사람들.
그저 말로만 떠들 뿐인 자들과 다르게 해태 길드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하루가 다르게 믿을 수 없는 무용담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그러게 말이다. 우리도 언젠간 해태 길드에 들어갈 수 있으려나……?”
마치 꿈이라도 꾸듯 아련한 어조로 말하는 사내였다.
그 순간.
“이 새끼가! 건방지게!”
“아니! 뭐요, 뭐! 내가 얼마나 많이 하는데, 뭐요? 무쓸모?!”
“어디서 목청을 높여, 인마!”
“형님, 나랑 고작 다섯 살 차이거든!”
“이 새끼가!”
“와! 한 대 치시겠소!”
“아이, 두 분 다 왜 그러십니까. 그만해요, 기분 좋게 술 마시러 왔는데.”
조용하지는 않았어도 제법 부드러운 분위기였던 술집에서 싸움이 일어났다.
거구의 사내와 두꺼운 지팡이를 쥐고 있는 청년, 그리고 그걸 말리고 있는 준수한 외모의 청년까지.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