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126화 (126/266)

# 126

<공략자들 126화>

아주 오랜만에 인한은 홀로 탑에 들어왔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이창훈이 없으니 조금 어색한 기분이었다.

해태 길드 창설에 대한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나름 길드라 내세울 수 있는 틀을 대강 갖추게 되었다.

길드장은 인한.

부길드장이자 인한이 없을 동안의 임시 길드장은 이정환이 맡았다.

부산물 관리는 오성과 제휴를 맺어 관리하기로 하였다.

검은 탑 관련 사무실이 모여 있는 파고다 공원의 커다란 사무실 하나를 임대해 ‘해태 길드’라는 이름의 비상장 회사도 설립했다.

굳이 사무실을 설치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수입원이 부산물 하나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회귀 전에 대형 길드들이 그랬듯 해태의 이름을 딴 제작 아이템들도 팔아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신입을 받더라도 체계적으로 모양이 잡혀 있는 편이 훨씬 더 좋았다.

길드 설립한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난 지금은 천천히 인원을 편성하는 단계였다.

일단 편성이 끝나면 1층 시작의 신전에 들어가 스킬을 얻을 예정이었다.

그 후에는 마침 전원이 8층까지 공략한 상태이기에 8층 필드를 돌아다니며 손발을 맞추는 연습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난 내 일을 해야지.’

인한은 계획대로 홀로 탑을 오를 셈이었다.

길드 쪽은 걱정할 게 없었다.

초반에는 손발이 맞지 않아서 삐걱대겠지만, 몇 번 하다 보면 금방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합이 잘 맞아 들어갈 게 분명했다.

‘그럼 바로 12층으로 가 볼까.’

인한이 천천히 땅의 돌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그 순간.

“구원자, 최인한이라 보입니다만, 맞습니까?”

딱딱한 어조의 일본어가 들려왔다.

인한이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

앳되지만, 익숙한 얼굴이 서 있었다.

과거 랭킹 8위, 천궁검 니시야마 겐지.

그리고, 인한이 가지고 있는 타이틀 <시작하는 자>의 원주인.

“실례라는 것을 알고도 부탁드리겠습니다. 한 수 가르침을 주시지요.”

니시야마는 올곧은 눈으로 인한을 직시하며 말했다.

천궁검, 니시야마 겐지.

단순하게 그를 표현하자면, 시대착오적인 인물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흔히 세간에서 사무라이 하면 떠올리는 인상을 집약시킨 인물이었다.

간혹 사복을 입기도 하지만 보통은 전통 일본 복장을 하고 다녔으며, 무기도 인벤토리에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꼭 꺼내서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어조는 언제나 사극 톤이고, 한 시간을 대화를 나누면 무사도에 대한 얘기가 이삼십 분은 나올 정도였다.

거기다 그는 강자를 향해 엄청난 집착을 보였다.

보통 최상위 랭커쯤 되면 저들끼리는 싸우지 않는 법인데,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무기 한 자루만 품에 안고 결투를 신청했다.

사람들은 천궁검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그를 부를 때, 21세기의 사무라이라고 불렀다.

정작 그는 그 호칭을 싫어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이곳은 대련하기 매우 좋은 곳이로군요.”

인한은 결국 그를 마을 어귀의 필드로 데려왔다.

덥수룩한 머리칼에 맑고 깊은 갈색 눈동자를 지닌 겐지는, 키는 그리 크지 않지만 몸이 다부져서 전체적으로 단단한 인상을 주었다.

‘천궁검이라…….’

인한이 눈을 빛냈다.

원래라면 인한이 가지고 있는 시작하는 자를 얻었어야 할 사내이며, 하나같이 괴물 같은 사람들만 있던 검은 탑 최상위 랭커 중 일각을 차지했던 사내.

그가 가졌어야 할 것을 인한이 빼앗았기에 그 죄책감에 도전을 받아들인 것도 있었지만, 사실 지금의 천궁검의 실력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거기다 천궁검은 시작하는 자를 제외하면, 그 어떤 아이템이나 히든 클래스 등의 특별한 것 하나 없이 오직 가진 바 기술로 랭커가 된 것으로 유명했다.

그가 먼저 인한을 알아봤다 뿐이지, 인한이 먼저 알아봤다면 대련을 신청한 것은 인한이었을 것이다.

그때, 겐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무슨 말입니까?”

“다짜고짜 찾아와 대련을 부탁한 것 말입니다. 제 부탁에 놀라지 않은 것은, 당신이 두 번째입니다.”

“음, 그건…….”

이미 니시야마 겐지라는 사내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뒤 상황 생각하지 않고 강자가 있다면 대련을 신청하는 무광(武光).

그런 그가 대련을 신청하는 게 인한에게는 오히려 당연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데 어떻게 나인 걸 알았습니까?”

“아, 그건 용모파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용모파기라니, 요즘에도 그런 말을 쓰나?’

인한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직후에 겐지가 말한 말에 일그러졌다.

“인한 님은 탑에서는 유명인이시니 말입니다.”

“……유명?”

겐지가 인벤토리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A4용지에 인쇄된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 사람의 얼굴이란, 당연하게도 인한이었다.

“……!”

종이에는 인한이 10층에서 싸우던 모습이 그대로 인쇄되어 있었다.

양손에 새하얀 마력을 휘감고 뚜벅뚜벅 걸어오는 인한의 형상이었다.

긴 머리카락 때문에 눈은 반 정도 가려져 있었지만, 얼굴의 대부분이 드러나 있었다.

“인터넷에 조금만 검색해 봐도 바로 나옵니다. 구원자, 영웅, 권왕(拳王) 등으로 검색해도 뜨죠. 얼마 전에는 한국의 위험 지역에 있는 생존자들을 구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뭇 헌터들의 귀감이십니다! 힘을 가지기는 쉽지만, 그것을 올바로 쓰는 것은 어려운 법! 존경합니다!”

누가 보면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눈동자를 하고 있는 겐지였다.

그에 비해 인한의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외국 사이트에서도 검색만 하면 나오는 얼굴이었다니.

굳이 숨고 다니지 않았으니 얼굴과 이름이 팔리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거기 앞에 붙는 것들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구원자? 영웅?

권왕은 또 뭔가.

차라리 이럴 거면 자이언트가 더 낫다!

“우연찮게 1층에 돌아온 날, 구원자를 만나다니요. 전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어떻…….”

“자, 잠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얘기를 계속하려는 겐지였지만, 인한은 이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어 다급히 말을 돌렸다.

“아, 아까 두 번째라고 했는데…… 그럼 첫 번째는 누구입니까?”

“발터 에스키엘이라는 사내였습니다.”

인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와 싸워 봤습니까?”

“예, 무지막지하게 강하더군요.”

겐지가 무술광이었다면, 발터 에스키엘은 싸움광이었다.

걸려 온 싸움을 피하지 않고, 한번 건 싸움은 끝을 볼 때까지 멈추지 않으며, 단 한 번의 싸움도 패배하지 않은 사내.

박철환에 의해 갑작스럽게 랭킹 1위를 빼앗기기 전까지 부동의 1위였던 자.

검은 탑 초창기부터 무기 하나 다루지 않고 오로지 맨손과 맨발로만 탑을 올라온 천부적인 싸움꾼.

그것이 발터 에스키엘이었다.

“결과는…… 하하, 상대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겐지는 부끄럽다는 듯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런 모습만 보면 미래의 그 대쪽 같던 사내보다는, 어수룩하고 풋풋한 젊은이의 모습이 보였다.

“당신과 같은 분에게 한 수 가르침을 부탁하는 것은 주제에 맞지 않는 것을 알지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주제에 맞지 않기는 무슨, 나야말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한은 진심이었지만, 그 말을 겸손함으로 받아들였는지 겐지의 표정이 또 한 번 환해졌다.

“역시! 강자는 그 내면조차 강한 법이군요! 여기서도 한 수 배웁니다!”

인한이 눈을 껌뻑였다.

‘뭘 배우는 건데?’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열정에 타오르는 청년, 겐지였다.

겐지가 말을 이었다.

“슬슬, 시작하겠습니다.”

겐지가 중단세를 취하며 눈을 날카롭게 빛냈다.

고작 자세를 취했을 뿐인데 순식간에 공기의 질이 변했다.

‘벌써 이 정도로?’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누며 보였던 어수룩한 청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인한 정도에 도달하면 기세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된다.

마력도 익히지 못했고, 탑에 오른 시기도 인한의 뒤였을 게 분명한데, 겐지는 이미 살이 에일 정도의 기세를 뿜어 대고 있었다.

‘일단 10퍼센트 정도로만.’

인한은 마력을 억제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겐지의 몸이 정면에서 사라졌다.

“……!”

인한이 한순간 겐지를 눈에서 놓쳤다.

곧바로 다시 포착했지만, 그때는 이미 겐지의 검이 측면에서 휘둘러지고 있을 순간이었다.

콰앙!

주먹을 휘둘러 검을 걷어 냈다.

크게 튕겨 나가는 검.

직후 인한의 스트레이트가 이어졌다. 겐지는 허리를 크게 젖히는 것으로 그것을 피해 냈다.

단지 한 번의 교환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겐지의 실력의 일면을 볼 수 있었다.

“대단하시군요. 회심의 일격이었는데.”

“그쪽이야말로. 피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요. 이번엔 제가 가죠.”

흥이 올랐다.

인한도 자세를 잡고 진지하게 달려들었다.

“졌습니다.”

겐지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검을 축 늘어뜨렸다.

인한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라고?’

겐지와는 거의 30분을 내리 싸웠다.

비록 인한이 승리하기는 했지만, 이걸 정말 승리로 봐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력을 순간적으로 20퍼센트까지 끌어냈다.’

겐지의 검은 날카로웠다.

레오가 변칙적인 검술로 인한을 괴롭혔다면, 겐지의 검은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은 검이었다.

그럼에도 빠르고, 강했다.

상대하던 인한은 기술적으로 밀리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힘으로 밀어붙여 승리를 따낸 것이었다.

“혹시 마력을 익혔습니까?”

인한이 물었다.

겐지의 체내에서 미약하나마 마력의 흔적을 봤기 때문이었다.

겐지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 인터넷 방송 채널 중에서 이것저것 알려 주는 채널이 있는데, 거기서 마력을 익히라는 얘기가 있어서 익혔습니다.”

보기보다 인터넷과 가까운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그 채널이란 것은 인한이 만든 채널일 게 분명했다.

뭉클 피어오르는 뿌듯함을 뒤로하고, 인한은 다시 물었다.

“스테이터스는 어느 정도입니까?”

“100포인트 정도입니다.”

“대단하군요. 천재군요, 당신.”

인한이 진심을 담아 말했다.

동시에, 짙은 질투심도 느꼈다.

‘이래서 천재들은…….’

역시 자신은 기술적인 부분에서는 천재들을 이길 수 없는 것일까?

그래도 많이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마력이나 정령술을 빼면 인한은 그리 강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기술로 밀리니까 고작 마력 스테이터스 100포인트 가지고 있는 놈한테 200에 가까운 마력을 끌어 올려 찍어 누른 것이다.

거기다 오러까지 익혔으니 운용 면에서 인한이 훨씬 뛰어날 게 분명했다.

그 차이는 단순히 수치상 차이보다 훨씬 많은 차이를 가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인한의 패배였다.

인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겐지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이리저리 배배 꼬았다.

“헤헤…… 천재라뇨, 제 주제에 무슨……. 패배했는데요…….”

이제는 아주 대놓고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이고, 봐주기까지 했는데 천재라고 해 주니까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혹시 지금 몇 층을 오르고 있습니까?”

“아, 지금은 막 10층에 도달했습니다.”

“……?”

인한의 표정이 다시 한 번 일그러졌다.

전투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임태호도 인한과 같이 출발해서 지금 8층인데, 벌써 10층이라니?

“인한 님이 행한 일을 듣고,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습니다. 잠도 탑에서 자고, 밥도 탑에서 먹었죠. 무사 수행을 하듯 오르다 보니, 어느새 10층에 도달해 있더군요. 하하하!”

“솔로입니까?”

“예.”

인한이 눈을 빛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