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
<공략자들 125화>
아발론은 모든 차원의 원본이었다.
수많은 위계의 수많은 세계가 아발론에서 시작되었고, 아발론에서 파생되었다.
비록 그 탓에 불안정한 차원이 되었다지만, 아발론은 그토록 셀 수 없이 많은 세계를 탄생시킨 거대한 힘을 품고 있는 차원이기도 했다.
힘이 있다면, 관리자 또한 있는 법.
왕이란 그런 존재였다.
아발론을 지키며 번성시키는, 그야말로 왕과 같은 역할을 하는 일곱 명의 초월자들.
그들은 어떠한 시련을 돌파하는 것으로 왕좌에 앉게 된다.
그리고 왕의 증거로써, 저마다의 권능을 얻는다.
그것은 왕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왕이라는 존재의 절대적인 힘의 증거가 된다.
왕들은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고, 불안정한 세계인 아발론을 안정화시키는 것에 권능을 다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방인이 찾아왔다.
왕권을 찬탈하고자 하며, 세계를 멸망으로 이끄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 그들의 행태는 그야말로 전설 속 마왕의 그것과 똑 닮아 있었다.
이후로 이방인들의 끊임없는 침략이 있었고, 긴 싸움 끝에 결과적으로 왕들은 패배했다.
그들의 자리는 마왕들이 차지했다.
여기까지는 인한이 아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왕권을 찬탈한 마왕들이지만, 그들은 옛 왕들을 죽일 수 없었다.
힘의 차이나, 어떤 다른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당연히 옛 왕들을 죽이려 시도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되어 있었다.
정해진 수순을 밟지 않고 왕권을 얻게 된 그들은 왕의 목숨까지는 빼앗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기에, 그들은 왕들의 모든 힘을 빼앗고 아발론의 곳곳에 ‘마왕’이라는 이름을 붙여 감금시켰다.
마왕이 왕이었을 시기의 기록과 업적은 모조리 불살랐다.
그것이 인한의 머릿속에 떠오른, 잊었던 기억의 일부였다.
* * *
인한이 위험 지역을 벗어나 서울로 들어왔을 무렵, 세간은 또 한 번 떠들썩해졌다.
3차 몬스터 웨이브를 불식시킨 것으로도 모자라, 위험 지역에 파고들어 수없이 많은 생존자들을 구해 온 인물, 인한 때문이었다.
그 가공할 무력도 무력이건만, 힘이 있음에도 약자를 위하는 모습에 매스컴들이 신나게 떠들어 댔다.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인한은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단 하나의 미디어도 인한을 영웅으로 찬양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인한은 대한민국 헌터의 아이콘이자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정의를 실현하는 현실의 히어로가 되었다.
여론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것은 언론, 더 정확히는 그 언론을 구축하는 신문사와 방송사들이다.
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비슷한 맥락으로 자신을 찬양하는 것을 보며, 인한은 뒤에 모종의 힘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인물이긴 인물이군.’
그리고 그 힘의 정체는 아마도 이 나라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푸른 기와집이리라.
그들도 나름 여러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정치, 외교적 전략도 있었을 테고, 사회 분위기 조성을 위한 이유도 있을 터다.
뭐가 어떻게 됐든, 인한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에게 이득이 될 것이었다.
우우웅!
막 집에 들어오자마자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임태호였다.
“형님?”
-어, 나다. 새끼야, 문자 좀 봐라, 문자 좀. 넌 그리고 응톡도 안 하냐?
“예? 문자요? 아, 생각 못했습니다. 그보다 응톡이 뭡니까?”
-하아, 이 탑오타쿠 새끼를 어찌해야 할꼬…… 나 같은 아저씨도 쓰는 걸…….
임태호가 한숨을 푹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탑오타쿠라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도 아니다!
“지금 막 도착하느라 문자 확인을 안 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회식하려는데 네가 언제 전화가 되는지 모르니까 계속 연락 보냈잖냐! 대체 나흘 동안 뭘 한 거야?!
인한이 씁쓸하게 웃었다.
이틀을 위그라노아의 부활에 사용했고, 나머지 이틀은 기절해 있었다.
“그런데 회식이라뇨?”
-이번 일 같이한 사람들끼리 술 한잔 걸치자는 거야.
“좋죠. 괜찮습니다.”
-그래? 그럼 오늘 바로 콜? 다들 괜찮은 거 같다던데 말이야. 오성 공격대까지 끼면 인원이 너무 많아지니까. 우리끼리만 모일 생각이거든!
“네, 그러시죠.”
-오케이. 그럼 문자로 위치 보내마. 저녁에 보자!
임태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 * *
회식 장소는 치킨집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치킨 집에서 봅니까…….”
장소 선정은 다른 누구도 아닌 이소영.
구시렁대는 이창훈의 표정을 보니, 명색에 오성의 금지옥엽 딸이라기에 고급 레스토랑 정도를 기대한 모양이었다.
“조용히 있어, 짜샤. 먹고 나서 구시렁대.”
“치킨이 맛있으면 얼마나 맛있다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니, 특유의 친화력으로 벌써 이소영과 친해진 모양이었다.
누가 보면 정말 친누나 친동생 사이로 오해할 정도였다.
“저는 기대되는데요. 한국의 치킨은 맛있나요?”
아나스타샤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한국에 온 후로 그녀는 한국 음식에 푹 빠져서 지내고 있었다.
“기대해도 좋아요. 여기는 한국에서도 최고로 맛있으니까.”
회식의 인원은 총 여섯 명으로, 인한, 이소영, 아나스타샤, 임태호, 이창훈, 이정환이었다.
이내 치킨과 생맥주가 차려졌다.
상 위에 먹음직스럽게 놓인 치킨을 본 사람들이 재빠르게 하나씩 집어 먹기 시작했다.
“오?”
이창훈도 눈을 휘둥그레 뜨고 노릇노릇하게 튀겨진 치킨을 베어 물었다.
“이거 대박이잖아?”
그 뒤로는 아무 말 없이 치킨 먹기 바빴다.
고소한 후라이드 치킨 한 입과 시원한 생맥주 한 모금에 회식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한국은 치킨이랑 맥주를 같이 마시나요?”
“치맥이라 그러죠. 이거 솔직히 수출해야 돼요.”
이정환도 우스갯소리를 하며 날개를 뜯었다.
대화가 무르익고, 치킨의 수도 점점 줄어 갔다.
임태호는 벌써 닭 한 마리를 해치우고 두 마리째에 도전 중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웃고 마시고 할 때, 인한이 소영을 불렀다.
“아, 소영 씨.”
“……왜요.”
아직 뾰로통한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인한이 부르니 대답은 하는 이소영이었다.
“오성을 통해서 기부 좀 할 수 있을까요.”
“기부요?”
이소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생존자들, 지금 임시로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생활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을 위해서요.”
인한의 말에 각자 대화를 하던 사람들이 절로 인한과 소영에게 집중했다.
“으음, 확실히 재단이 있기는 한데…… 얼마 정도 하시게요?”
“한…… 28억 정도 할 것 같습니다.”
“……네?”
인한이 피식 웃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통장에 있는 돈 전부인 28억. 그것을 모두 기부할 생각이었다.
‘보답이지.’
동생을 보살펴 준, 이름조차 모르는 한 아주머니를 향한 감사의 뜻이었다.
“혀, 형님, 돈 그렇게 많았어요……?”
“너도 좀 하지 그러냐?”
이창훈이 덜덜 떨며 인한을 바라보았다.
그때, 구석에 있던 이정환도 살짝 손을 들며 말했다.
“으음, 나도 할게. 나는 그 정도로 많이는 없지만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 적어도 이번 위험 지역 안에서 번 돈은 전부 할게.”
임태호와 아나스타샤도 손을 휙 들었다.
“흐흐! 거, 나도 한번 돈 좀 쓰지 뭐!”
“저도요!”
이소영이 피식 웃었다.
“알았어요, 곧 알아 올게요. 하루만 기다려요.”
그런 대화를 다시 마시려고 상을 보았는데 맥주가 떨어졌다.
임태호 혼자 피처로 마셔 대니 남아날 수가 없었다.
“이모! 여기 생맥 오백으로 하나 더!”
“예! 알겠습니다!”
맥주가 다시 놓이고, 잔을 한 번 더 나눴을 무렵이었다.
임태호가 갑자기 사람들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자 좌중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뭡니까?”
영문을 몰라 눈을 껌뻑이는 인한에게 임태호가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회식하자는 이유가 있었다.”
“……?”
“인한아, 우리 같이 오르자. 검은 탑.”
인한이 살짝 입을 벌렸다가, 천천히 닫았다.
임태호가 말을 이었다.
“위험 지역에서도 한 번 의견을 나눴고, 네가 위험 지역에서 남았을 때 우리끼리 얘기해서 결정했다. 11층에는 지금 여러 팀들이 연합체를 만들었다지? 그게 길드라고 불린다고…… 우리도 해 보자. 우리가 네 성에 찰지는 모르겠지만, 너만 같이 해 준다면 우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임태호가 강렬한 눈빛을 보내 왔다.
언제 이렇게 의기투합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인한은 묘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시선을 보내 오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비슷하네.’
이제는 빛바랜 기억 속 장면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먼저 말을 꺼내려고 했는데 말이지.’
인한이 길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인한의 입에 집중됐다.
인한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요.”
“……!”
“오오! 형님!”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하지만 정해야 할 게 있습니다.”
“뭐냐?”
“저는 같이 탑을 오르지는 못할 거예요.”
“왜 그러는 건데?”
임태호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인한의 옆에 있던 이정환은 어째서인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원래라면 저도 길드를 만들려고 했습니다. 천천히 같이 올라가 이 탑을 하루라도 빨리 끝내고 싶었죠.”
“그런데 왜?”
“할 일이 생겼습니다. 여러분이 싫은 건 아니에요. 본인들은 인식 못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러분은 충분히 강해요. 넘쳐 날 정도로 강하죠. 또 그 이상으로 강해질 가능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천부적인 리더십과 지휘력을 가진 이정환.
분위기를 주도하는 이소영.
압도적인 탱킹 능력과 범접 못할 한 방을 가진 임태호.
과거, 최상위 랭커였던 아나스타샤.
활용도가 높은 이창훈까지.
이 다섯은 충분히 뛰어나다.
거기다 다섯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 있는 팀원들도 마찬가지로 뛰어나다.
여기에 인한의 지식과 관리가 들어간다면 그 길드는 순식간에 수직 상승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전 탑을 같이 오르지는 못합니다. 해야 할 일이 있어요. 그건 저만의 일이라 누구를 끌어들일 수가 없습니다.”
최근 들어, 인한은 자신이 너무 미적댔다는 것을 느꼈다.
35층, 왕의 권세 퀘스트…… 그곳에 답이 있다.
머릿속에 걸린 봉인.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억.
거기다 탑의 진실까지.
머나먼 과거에 놓고 온 기억을 되찾아야 했다.
기억의 편린을 마주할 때마다 인한은 짙은 의문과 갈망을 느꼈다.
알고 있는데도 기억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하물며 그게 굉장히 중요한 일임에도 떠오르지 않는 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분명 그렇게 한다고…….”
“길드는 만들겠습니다. 제가 들어가기도 할 겁니다. 사실 제가 먼저 말을 꺼내려고 했을 정도예요. 하지만…… 지금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지금만큼은 혼자서 탑을 올라야만 해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다들 당황해할 때, 이정환이 입을 열었다.
“알았어. 하지만 우리는 너를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이야. 알아서 잘 해라.”
이정환이 씨익 웃었다.
인한도 마주 웃었다.
분위기가 한결 편해졌다.
그러자 임태호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잔을 들었다.
“자! 그럼 길드도 만들어졌겠다, 건배 한번…… 어, 잠깐만. 그럼 우리 길드명은 뭐로 하지? 하나가 됐으니 조직명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어이쿠, 형님. 조직명이라뇨.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크흠.”
“해태 길드.”
인한이 툭 내뱉었다.
인한이 만드는, 인한이 있는 길드라면, 이름은 그것 하나뿐이다.
“해태 길드로 하죠.”
정의롭고, 충성스러우며, 옳음을 추구하는, 화재와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의 이름.
그 이름을 딴, 해태 길드.
그렇게 다시 한 번 해태 길드가 세상에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