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략자들-123화 (123/266)

# 123

<공략자들 123화>

위그라노아는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자아를 지닌 단일 개체이지만, 동시에 위그드라실의 세계 그 자체인 세계수의 묘목이기도 했다.

만약 묘목이 세계수로 성장한다면, 위그라노아도 세계수의 일부로서 부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본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량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이 세계수의 묘목이다.

그렇기에 사실상 마력을 공급하던 위그라노아가 죽었을 때 묘목도 말라비틀어지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뿐 아니라 세계수로 각성시키는 것에도 엄청난 양의 마력이 요구된다.

거기다 마력의 질도 상당히 까다로워서, 세계수로 크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마력의 근원이 위그드라실의 마력이어야 하며, 또한 한없이 정순해야만 했다.

그러나.

검은 탑을 오르는 헌터이자 위그라노아의 지식을 물려받은 최인한이라는 변수가 개입함으로써 그 모든 조건이 충족됐다.

‘필요로 하는 에너지는, 그냥 인벤토리에 박아 두면 돼. 인벤토리 안에서는 그 무엇도 녹슬지도, 썩지도 않으니까. 그리고 마력의 양과 질에 대한 문제도 마력 중계소에 남아 있는 마력을 사용했지.’

우연과 우연이 맞물려 일어난 기적이었다.

인한이 근처에 넓은 공터를 찾았다.

쿠구구!

인한이 마력으로 지면을 후려쳐서 커다란 크레이터를 만들어 냈다.

그런 다음, 인벤토리에서 세계수의 묘목을 꺼냈다.

각지의 중계소에서 흡수한 마력을 모조리 머금은 묘목은 과거와 달리, 선연한 빛의 층을 몇 겹이나 두르고 있었다.

인한은 인벤토리에서 1리터짜리 물통을 꺼내, 묘목의 위에 그대로 부었다.

마치 전부 먹어 버리기라도 하듯, 묘목에 떨어진 물은 땅에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전부 사라졌다.

인한은 그 뒤로 족히 10리터에 가까운 물을 쏟아부었다.

우웅!

그리고 한순간, 묘목이 생명체의 심장처럼 크게 맥동하며 사방으로 눈부신 빛을 토해 냈다.

‘됐다.’

인한은 묘목을 그대로 미리 만들어 둔 크레이터를 향해 던져 넣었다.

“실리암.”

-끼이이익!

그리고 실리암을 사용해 주변 흙을 밀어 넣어 묘목을 덮었다.

이걸로 모든 조치가 끝났다.

남은 것은 이제 세계수가 싹을 틔우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5분, 10분 30분…….

하염없이 기다렸지만, 묘목은 아무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위그라노아의 지식 속에도 세계수가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것은 없었다.

그의 세계에서 세계수는 오직 하나였고, 한 번도 잘린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설마 내가 뭘 잘못한 건가?’

2시간이 지났을 무렵에는 그런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래도 여전히 묘목으로부터 방출되는 마력의 파동은 인한의 감각에 잡히고 있는 상태였다.

어쩌면 시간이 조금 걸리는 작업일지도 몰랐다.

조금 더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2시간이 더 흘렀다.

아무리 인한이 인내심이 많다 하더라도, 그저 멍하니 기다리는 것은 시간낭비였다.

하는 수 없이 인한은 근처에서 자신의 전투 스타일에 대한 고민과 기술에 대한 수련을 하며 기다리기로 했다.

‘응?’

그러던 중이었다.

마치 갑작스러운 바람에 촛불이 꺼지듯, 땅 밑에서 느껴지던 마력의 파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어쩌면 마력이 부족했던 걸지도 몰랐다.

인한이 다급히 땅을 들어내려고 한 순간.

콰아아아아아아!

거친 폭음과 함께, 선연한 갈색빛의 거목이 지면으로부터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이, 이거 잠깐…….’

맹렬한 속도로 크기를 키워 가는 세계수 때문에 인한은 다급히 뒤쪽으로 몸을 날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위그드라실과는 전혀 상관없었던 지구라는 이름의 이세계에서, 두 번째 세계수가 탄생했다.

워낙 까마득하게 자라 버린 세계수의 높이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적어도 100미터는 넘어 보였다.

지구에도 길이가 100미터가 넘는 나무는 있지만, 그것도 특종 품종과 지역, 거기다 수천 년이 넘는 수령이 합쳐져야 나오는 높이였다.

인한은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하게 자란 세계수를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다.

“무슨 잭과 콩나무도 아니고, 이렇게 갑자기 자라는 거였나?”

아무리 그래도 작은 크기에서 시작해 점점 거대해질 줄 알았더니, 갑자기 이런 급성장을 이룰 줄은 몰랐다.

“하긴, 위그드라실의 세계수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였으니…….”

위그드라실의 세계는 둥글지 않고 평평했으며, 세계수가 세계 그 자체였다.

하나의 세계였던 나무이니, 이 정도 성장 정도야 귀여운 것일지 몰랐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그때, 의념이 전해져 왔다.

말로써 대화한다기보다, 텔레파시류의 마법 같은 느낌으로 뇌리에 직접 의미가 전달되어 왔다.

인한이 씨익 웃었다.

“푹 잤나?”

-대체 내가 어떻게 세계수가 된 거지?

위그라노아의 말에 당황함이 머물렀다.

그도 이해는 하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 자신이 부활했고, 어째서 묘목이 싹을 틔울 수 있는지까지의 지식을 전달한 것이 그였으니 모를 수가 없다.

-나는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다. 네가 굳이 이런 배려를 베풀 필요가 없어.

“변덕이라고 해 두지. 딱히 이유는 없어. 할 수 있는데 안 할 이유가 없었을 뿐이고, 동질감을 느꼈을 뿐이지.”

자신의 세계를 잃고, 다시 한 번 부흥을 꿈꿨으나 그마저도 실패한 존재.

위그라노아는 다른 세계의 또 다른 인한과 같았다.

한동안 조용히 있던 위그라노아가 짙은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대의 배려에…… 감사를 표한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은혜다. 그대는 한 멸망한 세계의 구원자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할 것인지…….

인한은 그저 시원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애초에 감사를 바라고 한 일도 아니었고, 그저 마음 가는 대로 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시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직 세계수로서는 갓난아기에 가까운 위그라노아이기에, 적응에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해가 저물어 지평선에 걸쳤을 때쯤, 위그라노아가 느리게 의념을 보내 왔다.

-세계수가 되는 기분은…… 바로 이런 것인가.

위그라노아는 세계를 굽어보았다.

물리적으로 지구라는 행성에 뿌리를 내렸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지구에 깊게 뿌리박혔다.

수많은 생명의 사념이 뿌리를 통해 들어와 잎을 통해 나갔으며, 지구의 자연의 흐름이 손에 잡힐 듯 훤히 보였다.

‘지구, 이 얼마나 거대한 행성이란 말인가.’

위그라노아는 감탄했다.

지구는 위그드라실의 족히 열 배에 달하는 크기를 가지고 있었다.

오직 녹음으로 가득하던 위그드라실과는 다르게 수없이 많은 자연을 가지고 있었고, 그만큼 다양한 식물들이 존재했다.

그렇게 한동안 세계수의 감각에 심취하고 있던 위그라노아가 근처에서 일어나는 인한의 사념을 감지했다.

-흐음, 그대는 지금 무언가 고민하고 있군.

“으음, 별것 아니야. 일단 급한 김에 여기다 심기는 했는데, 대한민국은 꽤 가뭄으로 허덕이고 있거든. 괜찮을까 싶어서.”

-가뭄?

“가뭄이 뭔지 모르나? 너희 세계에는 그런 게…… 그래, 없었군.”

인한이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아는 범위에 한해서 지구의 물 순환 구조에 대해 설명했다.

-호오, 신기하군. 이 세계는 물이 그런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그야말로 신의 걸작이로군. 어떻게 그런 구조를 만들어 냈단 말인가.

모든 생명체가 식물인 세계인 위그드라실에서 물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물을 풍족하게 누리지 못했고, 부족해하지도 않았다.

위그드라실에서 물은 세계수 외의 그 어떤 존재도 닿을 수 없는 깊디깊은 지하에 존재했다.

그 물이 지면에 스며들어 지상까지 촉촉하게 적시는데, 위그드라실의 존재들은 그 수분을 흡수하는 방법으로밖에 물을 흡수할 수가 없었다.

-이 세계는 물이 굉장히 풍족하다. 엄청난 수원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이 걱정인가.

“뭐? 물이 풍족하다고?”

대부분의 나라가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는 이 시대에서 물이 풍족하다니.

인한이 이해 못해 고개를 갸웃할 때, 위그라노아가 설명을 덧붙였다.

-행성의 대부분을 감싸고 있는 물을 말하는 것이다.

“뭐? 설마 바다?”

-저것을 바다라고 하는 건가.

인한이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쓸 수 없는 물이야. 소금물이라고.”

-성분을 파악해 본 결과,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아직 힘이 회복되지 않아 마력적인 부분을 파악하지 못했는데, 설마 마력이나 영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 것인가?

인한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설마 소금물도 흡수할 수 있는 건가?”

-바다라 부르는 것은 굉장히 많은 영양소를 가지고 있다. 이 세계의 순환 구조와 생태계에 영향을 끼치지 않더라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다. 덤으로…… 이 세계의 정수는 굉장히 망가져 있군. 미약하지만 내가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인한의 눈이 점점 더 커다래졌다.

-이것은 이 세계의 지적 생명체인 그대들의 과업이다. 대지도, 하늘도, 생명도…… 모든 것이 뒤틀려 있다. 마력을 한 톨도 다루지 못하는 생명체들이 이토록 세계의 정수를 망가뜨릴 수 있는 것도 대단하군.

“그건…….”

인한은 위그라노아의 의념에서 엷은 분노를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다. 뒤틀린 것을 바로잡고, 부족한 것을 더하고, 과한 것을 줄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인간에게 이로운 일일지, 해로운 일일지는 모르겠군. 허나 내가 무슨 일을 하든, 결국 이 세계를 유지하고 가꾸는 것은 이 세계의 원주민인 그대들, 인간이 될 것이다.

묘한 위엄조차 느껴지는 말이었다.

세계수로 성장하며, 그 성품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그때, 위그라노아가 미약한 빛을 흘렸다.

그와 동시에 인한은 위그라노아의 의식이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인한이 다급히 물었다.

“무슨 일이지?”

-별 일 아니다. 그저, 아직 나의 의식과 세계수와 이 세계가 동기화를 마치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 그대들의 언어로 말하자면, 수면에 가깝겠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인한에게, 위그라노아가 다시금 말을 건넸다.

-잠에 들기 전에,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염치없는 것을 알지만, 부디 하나의 부탁을 더 들어줄 수 있겠는가.

“뭐지?”

-비록 내가 세계수가 됨으로써 조건은 갖추어졌지만, 내가 온전한 세계수의 힘에 익숙해지기까지, 끝내는 동족들을 탄생시키기까지는…… 그야말로 별의 역사라 할 정도로 아득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하다. 또한, 그 머나먼 미래에 나의 동족들이 이 세계에서 터전을 펼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도 그대들에게도 좋은 일이 아닐 터다.

“그렇겠지.”

과연 인간이 그렇게도 오랜 시간동안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제쳐 두더라도, 원래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닌 세계수는 언제까지나 이방인에 불과했다.

-그러니…… 부탁하겠다. 나는 그대야말로 저 가증스러운 탑을 무너뜨릴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인한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위그라노아에게서 느껴지는 의념에, 인한의 심령이 흔들릴 정도의 확신이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날이 온다면, 저 검은 탑에서 위그드라실의 정수를 내게 돌려줄 수 있겠나. 그 정수를 통해, 나는 나의 원래 세계로 돌아가 또다시 뿌리를 내리겠다.

“그게 가능한 건가?”

-알 수 없다. 하지만…… 되게 만들 것이다. 반드시.

과도하게 낙관적일 수도, 그저 허무맹랑한 꿈일 지도 몰랐다.

하지만…… 인간이란, 그리고 생명이란, 어쩌면 그런 잡히지 않는 머나먼 꿈과 이상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존재일지도 몰랐다.

“그래 좋다. 할 수 있다면, 그 정도 봉사쯤 해 주지.”

-고맙다. 그럼, 이것은 나의 사소한 보답이다.

“……?”

한순간, 위그라노아에게서 작은 가지가 뻗어 나와 인한의 코앞에 멈췄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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