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
<공략자들 120화>
사막 정도가 아니었다.
세계는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메말라 있었다.
-정수를 탈취당한 세계는 병들어 간다. 아니, 죽어 가지.
시야가 변했다.
우주의 끝, 세계라 부를 수 있는 공간의 끝자락.
별들로 가득해야 할 광활한 공간의 끄트머리가 아주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무너져 내린 곳, 그 너머에 있는 것은 그저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공허뿐이었다.
-그리고…… 우리 세계의 정수는 검은 탑에 뿌리를 내렸다.
“……!”
이 이야기를 기다렸다.
인한의 가설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
-탑은 몇 안 되는 위그드라실의 생존자, 그리고 세계수가 자랐던 세계의 일부를 도려내 그들의 탑에 이식했다.
인한의 정신은 검은 탑의 내부로 향했다.
‘여기는 분명…….’
몇 층인지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나무형 몬스터 앤트가 수없이 많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저들이, 바로 세계의 정수에서 복사된 거짓된 존재들이다. 저들의 원본이 되었던 나의 동족들은…… 과연 얼마나 남아 있을까.
인한과 위그라노아는 잠시 동안 앤트…… 아니, 위그드라실의 복제품을 바라보았다.
인한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당신도 그 ‘원본’ 중 하나였나?”
-나는 달랐다. 내가 뿔이 돋아나게 된 이유는, 내가 겁쟁이이자, 비겁한 도망자이기 때문이지.
“……?”
장면이 전환됐다.
몬스터 웨이브가 일어나는 세계.
위그라노아는 몬스터 웨이브를 피해 탑으로 숨어들었다.
위그라노아의 자조적인 말 그대로였다.
그는 겁쟁이이자 도망자였다.
하지만 인한은 고개를 저었다.
위그라노아와 연결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인한은 위그라노아에게 어떠한 사정이 있음을 깨달았다.
-비록 나는 어떠한 변명조차 못할 죄인이지만, 그렇군…… 사정이라…….
인한의 생각을 읽었음일까.
위그라노아가 입을 열었다.
-나는 세계수의 신관이지만, 동시에 세계수의 묘목이기도 했다.
“……!”
-다시 한 번 세계수를…… 피우고자 했다.
힘겹게 씹어 내듯 뱉은 그 한 단어 한 단어에 담긴 의미는 실로 처절하기 그지없었다.
멸망한 세계를 부흥시키기 위해, 동족들을 버리고 도망친 지도자.
비록 그 행위는 비겁하기 그지없었지만, 과연 그 누가 그를 질책할 수 있을까.
-하지만 설마, 검은 탑이 세계의 정수까지 손을 댈 줄은 몰랐다. 세계의 정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세계수의 묘목이었던 나는 비정상적인 수순에 의해 뿔이 돋아났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나는 정신을 완전히 잃기 전에 내가 가진 힘의 대부분을 봉인했다.
그렇기에 위그라노아는 그토록 높은 레벨임에도 몬스터 웨이브에 의해 세상에 나온 것인 모양이었다.
-그 뒤로는 기억에 없다. 다만, 중간에 한 번 틈을 발견했다. 나는 그때 나의 세계가 멸망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틈의 밖에 위그드라실이 있을 줄 알았다. 설마…… 이미 나의 세계는 멸망했고, 다른 세계의 몬스터 웨이브를 통해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이로써 모든 의문이 풀렸다.
검은 탑에 있는 모든 몬스터들.
그들은…… 다른 세계의 주민이었던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민이었던 원본의 레플리카라고 해야 할까.
-탑의 밖이었기에 뿔의 제어가 느슨해졌고, 내가 운 좋게 힘을 숨기고 있었기에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으며, 비정상적인 수순에 의해 뿔이 솟아났기에 조금씩 정신을 차리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세계조차 멸망시킨 탑에 그 정도의 틈이 있었다고?”
-그것은, 내가 그분의 씨앗을 부여받은 존재이기 때문이지.
씨앗.
그 말에 인한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나는 발아하지 못한 씨앗에 불과했지만, 그대는 다르군. 그대는 그분의 힘을 확실하게 개화시켰어. 그대가 가진 극멸기(極滅器)는 그분의 것이 분명하다
“계속 그분, 그분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지? 그러고 보니 날 불렀을 때도 왕의 사도라는 말을 했던 거 같은데? 거기다…… 극멸기가 뭐지?”
-그분은 시작의 왕이자 끝의 왕이며, 스스로 자리에 앉지 않은 무관의 왕이자, 저 위대한 시초의 세계, 아발론의 정당한 제왕(帝王)이신 분.
“뭐?”
무슨 말이 지나간 건지 알 수 없었다.
시작의 왕, 끝의 왕, 무관의 왕, 제왕.
이 모든 게 한 가지를 가르치는 호칭이란 말인가?
-무릇 왕에게는 왕좌와 왕관이 있어, 왕으로서의 지위를 드러내기 마련. 하나, 그분은 의자에 앉지 않으시며, 관도 쓰지 않는, 존재는 하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왕이시다. 그분을 증명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이 바로 극멸기다.
“대체 그게…… 우욱!”
욱신!
순간.
인한은 머릿속을 인두로 헤집는 듯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머릿속에 흐릿한 정체 모를 사람의 실루엣이 스쳤다. 새하얀 빛에 휩싸여 있는 그것은 분명……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지직!
직후, 위그라노아의 몸이 한순간 크게 흔들렸다.
인한이 관자놀이를 짚으며 일어나려 할 때, 위그라노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안타깝지만, 여기까지인 것 같군.
“잠깐만, 아직 더 물어보고 싶은 게 남아 있어.”
-미안하지만…… 더 이상…….
위그라노아의 몸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많은 부분이 손상되었지만, 내가 가진 지식을 그대에게 넘기겠다. 어차피 그대가 위그드라실의 존재가 아닌 이상 쓸모가 없을 테지만…….
위그라노아의 목소리 점점 흐릿해져 갔다.
위그라노아에게서 작은 덩굴 하나가 뻗어 나와 인한의 머리에 닿았다.
우우우웅!
그러자 인한의 머릿속에 방대한 양의 지식이 전이됐다.
세계수의 신관.
유구한 시간을 살아온 그의 과거였다.
마지막 배려였을까.
막대한 양의 정보는 인한에게 필요가 있을 법한 것들로만 정리되어 어떤 부작용도 없이, 인한의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작별이다. 많은 폐를 끼쳤구나, 왕의 사도여.
위그라노아의 정신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 * *
“헉!”
인한이 번뜩 정신을 차리고 일어섰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위그드라실의 세계도, 위그라노아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돌아왔다.’
욱신!
그 사실을 알아차림과 동시에 위그라노아와의 전투에 의한 상처가 욱신거렸다.
‘샐러, 주위를 조금 밝혀 줘.’
마력원은 빈 깡통처럼 텅텅 비었고, 그나마 어두컴컴한 지하를 비추던 위그라노아의 마력도 사라졌기에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샐러가 필요했다.
-크허어엉!
샐러가 나타나자마자 주위가 환하게 변했다.
트리아스 액셀을 얻은 이후, 정령술의 기하급수적인 성장과 함께 샐러와 실리암의 크기가 점점 자라났다.
그리고 이제는 몸집이 컨테이너 박스 정도로 커져 버렸다.
인한은 비틀거리며 이동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그라노아의 뿌리의 잔해가 워낙 많아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곧, 인한은 목표하던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세계수의 묘목.’
위그라노아의 근원에 둘러싸여 보관되어 있던 묘목이다.
그것은, 빛의 덩어리였다.
형체가 없는, 은은한 빛을 발하는 빛의 응집체.
동시에, 이것은 하나의 세계 그 자체, 이제는 멸망한 세계의 씨앗이었다.
인한조차 위그라노아의 지식이 없었다면 그것이 세계수의 묘목인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응?’
묘목을 지그시 응시하던 인한은, 곧 기이한 감각에 휩싸였다.
“왜…… 여기서 위그라노아의 마력이 느껴지는 거지?”
수풀에 휩싸여 있는 묘목을 바라보는 인한의 눈이 커다래졌다.
* * *
위험 지역으로 들어온 병력은 순식간에 진행을 멈췄다.
누가 뭐래도 이 집단의 우두머리는 인한이었고, 그 인한이 실종되고 생사를 알 수 없는 이상,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지진이 몬스터 때문이었다고?”
“……네, 그랬어요.”
사색이 된 표정의 이소영이 강성에게 말했다.
“대체 그게 말이 되는 건가? 일개 몬스터 때문에 그 정도의 지진이 일어났다고……?”
위그라노아에 의한 지반 붕괴 직후, 근처 지대에 엄청난 진동이 휩쓸었다.
헌터인 그들조차 몸을 가누기 힘들었을 정도였다.
거기다 그 지진은 간헐적으로 터져 나와 주위를 휩쓸었다.
‘어떻게 된 건……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이소영은 진정하지 못하고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던 강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얘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건 또 처음 보는군.’
그래도 조카 같은 아이인데,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니 안쓰러웠다.
‘형님이 이걸 봤으면 대체 뭐라고 할지.’
강성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 딸바보 형님은 분명 자신의 딸이 다른 남자를 생각하며 덜덜 떠는 걸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얌마.”
강성은 이소영의 머리에 거칠게 손을 얹고 이소영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만 초조해하고, 기다려 봐. 일단 땅을 파고 있으니까.”
그때였다.
타이밍 좋게, 아니, 타이밍 나쁘게 땅을 파고 있던 임태호의 외침이 들려왔다.
“제길! 안 돼! 거, 강 씨! 이거 못하겠수!”
임태호가 거칠게 삽을 내던졌다.
“지반이 물러서 땅을 파는 건 문제가 안 되는데, 그걸 감싸고 있는 나무뿌리 같은 게 문제야. 상처도 안 나는 걸 무슨 수로 파내나!”
“아…… 그게…….”
강성이 당황해 옆을 힐끗 바라보았다.
상황을 파악한 이소영의 표정이 더더욱 일그러졌다.
“아, 어, 그, 말실수한…… 건가?”
임태호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강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아무리 그라지만…… 이 정도였다면 무리다.’
강성은 땅이 파이기 직전 보았던 전투의 흔적을 떠올렸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몬스터의 힘은 실로 가공할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폭격이라도 떨어진 듯한 놀이터에는, 수도 없이 많은 크레이터와 깊은 고랑이 생성되어 있었다.
지반이 뒤집히고, 주변에 있던 아름드리나무가 모조리 꺾여 버렸다.
인한의 강함이야 위험 지역에 진입한 후부터 질리도록 봐 왔다.
하지만 그 인한보다 더욱 강력한 힘의 파동을 일으킨 몬스터가 있다는 사실은 강성을 긴장하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이미 그 청년은…….’
강성의 표정이 굳어질 때쯤, 다른 쪽에서 땅을 파고 있던 무리에게서 소란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그럴 리가 없어! 인한 씨가 고작 풀 쪼가리 때문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의 언어였다.
백금발의 미녀, 아나스타샤였다.
“잠깐, 진정해요. 아나 씨, 아, 릴, 릴렉스, 릴렉스…….”
이정환이 애써 아나스타샤를 말리고 있었지만, 눈에 불을 켠 그녀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스르릉!
어느새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 든 아나스타샤가 송유관 파이프처럼 두꺼운 위그라노아의 뿌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아나 씨!”
“하압!”
카앙!
히든 스킬 북에서 결국 S급 스킬인 소드 댄스를 익힌 아나스타샤의 검격은 과연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래 봤자 위그라노아의 힘에 비하면 미약한 마력밖에 서려 있지 않은 일격은 그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익!”
아나스타샤가 검에 마력을 더욱 주입하며 소드 댄스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하지만.
챙!
고작 뿌리에 불과하지만, 인한조차 처리하기 힘들어했던 위그라노아의 일부였다.
아나스타샤의 검 끝이 부러지며 땅에 박혔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
지면에 엷은 진동이 일어났다.
아나스타샤의 부러진 검 끝이 박힌 부분.
그 부분에서부터 마치 두더지가 올라오듯 지면이 꿈틀대며 솟아올랐다.
“……!”
돌발 상황에 모두가 긴장하고 벌떡 일어섰다.
위그라노아의 힘을 직접 눈에 담았던 클레아 팀과 이창훈은 공포감까지 느껴지는 눈으로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콰아앙!
이내 지면이 폭발하며, 모래가 후드득 튕겨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