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공략자들 117화>
도망치기에는 늦었다.
인한이 외쳤다.
“이쪽으로 모이세요!”
클레아 팀 전원과 이창훈이 서둘러 인한에게 모여들었다.
인한은 인벤토리에서 각석 하나를 꺼냈다.
‘이거 이렇게 계속 쓰다간 남아나질 않겠는데!’
마력을 주입한 최상급 각석이 순식간에 부서지며 가루로 변했다.
우웅!
오러를 운용, 가루의 사이사이로 오러를 이어 붙여 모양을 만든 인한이 지면에 주술을 펼쳤다.
[방호의 진]
[지속시간 : 30분]
지속시간을 대폭 낮추는 대신에 효과의 힘을 높인 주술이 펼쳐졌다.
주술진을 중심으로 반경 10미터 내의 공간을 푸른빛의 반구형 막이 감쌌다.
각석은 최상급의 주술 재료니, 어느 정도는 버텨 줄 것이 분명했다.
인한은 주술을 펼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한 씨?”
“저는 저걸 한 번 만나 봐야겠습니다.”
“예?! 형님, 미쳤습니까?”
이창훈은 이제 마나 유저에 가까스로 도달한 상태였다.
인한의 지도와 이창훈의 재능, 거기다 인피니트 시리즈까지 합쳐져 빠르게 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창훈이기에 어느 정도 느끼는 점이 있었다.
“아무리 형님이 사기라고 할 만큼 강하지만, 저거 진짜 장난 아니라구요!”
이번 마력의 파동에 이창훈은 전율했다.
인한의 옆에서, 인한이 펼쳐 온 힘을 느꼈음에도,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마력의 주인이 인한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괜찮아. 아니,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야.”
인한은 미드 코어의 감각을 믿었다.
이번 만남은 아무런 일도 없을 거란 느낌.
놈이 어떤 몬스터인지는 모르지만, 만나도 크게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예에? 그게 무슨…….”
인한이 주술진을 벗어나려고 할 때, 이소영이 인한의 팔을 잡았다.
“괘, 괜찮겠어요?”
아직 이소영은 이창훈 정도의 성장은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도 마력을 쌓고 있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감각을 막연히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인한은 싱긋 웃으며 이소영의 손을 밀어냈다.
“괜찮습니다. 걱정 마세요.”
“아니, 대체 무슨 일인데요. 설명 좀 해 주시면 안 돼요?”
“뭐야? 뭐가 땅이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는데…….”
이철중, 최민수, 신설아는 갑자기 심각해진 분위기에 따라가지 못하고 덜덜 떨고 있었다.
“설명 부탁한다, 창훈아.”
“예? 아, 그, 그게…….”
이창훈이 어설프게 설명을 시작하는 것을 뒤로하고, 인한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무언가가 느껴지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사방에서 전부 느껴지는군.’
인한은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이 공간 전체가 마력을 발산하는 것처럼, 사방에서 위험한 기척을 느꼈다.
우우우우웅!
대기가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그저 움직였을 뿐인데 이 정도의 힘이라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 울리는 것을 보면 족히 7, 80층 구간은 넘어서야 만날 수 있는 몬스터였다.
‘위험 지역에, 이 정도의 몬스터라고?’
믿을 수 없었다.
정확하지 않지만 몬스터 웨이브는 언제나 공략되지 않은 층을 기점으로 위아래 20층 정도의 몬스터가 소환된다.
무언가 잘못됐다.
그도 아니면…… 어떤 준비된 것이거나.
그때였다.
-그대인가.
울림이 들려왔다.
인한은 몸을 날리려다 말고 흠칫 놀랐다.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는 목소리였다. 아니, 목소리도 아니다. 의미 자체가 머릿속에 파고들었다.
그 순간, 지면에 울창하게 자란 수풀이 꿈틀대더니 지상으로 솟구치기 시작했다.
키는 대략 3미터 정도, 덩치는 인한의 대여섯 배는 컸다.
털복숭이처럼 생긴 모습이었지만, 전신이 털 대신 나무나 풀 등으로 뒤덮여 있었다.
인한은 놈의 천문을 확인했다.
[Lv. 670 위그라노아]
예상대로였다.
레벨 670이면, 족히 80층 후반 구간에서나 나올 법한 몬스터였다.
-나는 누구인가.
소년의 묘사와 똑같았다.
수풀로 휩싸인 몸의 전면에 눈동자라도 되는 것인지 동그랗게 빛나는 두 개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몬스터나 살아 있는 생명체라기보다는, 게임이나 만화책의 캐릭터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대는 내게 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위그라노아의 목소리가 크게 떨렸다.
존재하고 있음에도 자아를 찾지 못한 자의 고뇌와 고통이었다.
인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아를 가진 몬스터도, 인간의 말을 하는 몬스터도 몇 번이고 만나 본 그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지능과 자아를 가지고 있음에도 인간을 향한 살의나 분노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대화의 상대로 여기는 몬스터는 처음이었다.
‘이놈은 뭐지? 분명 뿔이 있는데.’
인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수의 뿔이 솟아 있었다.
하지만 그 뿔은 흐릿하고, 작았다.
거기다 마치 오래된 아날로그 TV의 노이즈처럼 맹렬하게 흔들렸다.
위그라노아가 다시 한 번 의지를 전했다.
-시작과 끝의 왕…… 너는 알고 있다…….
“왕?”
인한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왕이라고?”
-그렇다. 너는……?
위그라노아의 눈동자가 갑자기 깜빡였다.
-왕이 대체 뭐지……? 나는 무슨…….
당황해하며 흔들리는 위그라노아의 머리 위에, 우뚝 솟은 뿔이 흔들리는 모양을 회복하고 있었다.
콰앙!
위그라노아가 몸을 이리저리 뒤틀었다.
위그라노아의 몸에 부딪힌 미끄럼틀이 우그러지며 땅바닥에 굴렀다.
살짝 접촉했을 뿐인 그네가 폭탄이라도 맞은 듯 어딘가로 튕겨 나갔다.
순식간에 소년의 외로움을 달래 주던 놀이터가 폐허가 되어 버렸다.
‘갑자기 왜 저러는 거지?’
인한의 눈이 갸름해졌다.
‘설마……?’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인한이 손을 축 늘어뜨리고 조심스럽게 위그라노아에게 다가갔다.
“정신 차려. 잠시만, 그대로 있어 보라고.”
-아, 아아…… 아…….
위이이이이잉!
벌 떼가 지나가는 듯한 소리.
인한이 ‘그 힘’을 이끌어 냈을 때 울려 퍼지는 소음이다.
위그라노아의 눈동자 색이 어느 순간, 붉게 물드는 게 보였다.
인한이 다급히 땅을 박찼다.
위그라노아의 머리에 솟은 뿔에 인한의 손이 향한 순간.
-크아아악! 하등한 놈이 감히!
위그라노아가 노성을 터뜨리며 인한에게 뿌리를 휘둘렀다.
“크윽!”
마치 채찍처럼 쭉 늘어진 뿌리에는 가공할 마력이 둘러져 있었다.
인한이 다급히 뿌리를 향해 손을 뻗어 뿌리를 쳐 냈지만.
그그그극!
기이한 소음과 함께, 인한이 착지한 지면이 푹 꺼졌다.
-지옥에 보내 주겠다!
위그라노아의 외침과 함께 지반이 무너졌다.
마치 유사(油砂)에 빠지듯, 인한의 몸이 순식간에 나무의 뿌리와 풀에 휘감기며 무너진 지반에 빨려 들어갔다.
“크으윽!”
다급히 마력을 터뜨리며 저항했지만, 인한을 휘감은 위그라노아의 뿌리의 마력이 인한의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인한은 저항하지 못하고, 그렇게 지하로 빨려 들어갔다.
위그라노아의 뿌리는 인한을 옭아맸다.
‘이게 무슨……!’
그리고, 그 뿌리가 꿈틀대며 인한의 마력을 빼앗아 가기 시작했다.
그에 인한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존재의 마력을 갈취할 수 있는 존재라니!
‘거기다 계속 추락하고 있다.’
분명 지면이 붕괴됐을 뿐일 텐데, 인한의 몸이 무저갱에 빠지기라도 하듯이 점점 더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지하에 어떤 공간이라도 있는 듯이 말이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인한은 최대한 몸을 비틀어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샐러!’
나무는 불에 약한 법.
흡수당하는 상태에서 마력을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크릉?
인한이 외쳤다.
“이거 전부! 태워 버려!”
-크르아아아!
콰아아앙!
샐러의 몸이 순식간에 팽창을 시작했다.
거친 폭음과 함께, 인한의 몸이 사방으로 흔들리고 감싸고 있던 나무뿌리가 타들어 갔다.
-버러지 같은……!
위그라노아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령의 불꽃은 모든 불의 위계 중에서 최상위에 위치한다.
그 힘은, 마력과 영혼까지 태울 수 있을 정도.
아무리 마력을 전신에 둘렀다지만, 샐러의 불꽃과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풀렸다!’
인한은 전신을 옭아매던 뿌리의 힘이 약해진 것을 느꼈다.
그 상태 그대로, 마력을 증폭시켰다.
“절삭.”
미드 코어의 마력이 현실을 뒤튼다.
인한이 마치 칼로 베어 내듯, 곧게 손날을 펴서 한 바퀴 빙 돌리자, 인한을 중심으로 거대한 균열이 일어나 뿌리들이 잘려 버렸다.
화악!
뿌리들의 공격이 뜸해진 순간, 일시적으로 운신이 가능한 공간이 생겨났다.
실리암을 소환해 발판을 만들고, 샐러의 불꽃을 손끝에 담았다.
자연스레 피어오른 오러에 불의 속성력이 휘감겼다.
위이이이잉!
자세도 불안하고, 마력의 운용도 불안하지만, 순간적인 집중력으로 모든 걸 극복했다.
손끝에 머무는 소멸의 힘.
“풍제(風制).”
트리아스 액셀의 공격 기술이 아니다.
유일하게 이름을 붙인, 인한이 만들어 낸 인한의 기술이다.
레오와의 일전 이후, 각고의 노력을 통해 탄생시킨 인한만의 기술이었다.
-이건…… 대체……!
콰아아아아아아!
마치 폭풍이 몰아치는 듯, 응집된 힘이 터져 나갔다.
그 힘은 회전에 회전을 거듭한다.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힘이 아니라, 좁은 범위에 폭발적으로 몰아치는 힘이다.
위그라노아의 뿌리 파편이 맹렬하게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한순간.
콰앙!
힘의 폭발력을 이기지 못한 인한과, 인한이 있는 공간이 터져 나가며 인한의 몸과 위그라노우의 몸이 어딘가로 튀어 올랐다.
터엉!
간신히 떨어지기 직전에 착지한 인한이 둔중한 고통에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크으으…….
위그라노아도 지면에 처박힌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감히…… 이 몸에 손을 대다니…….
위그라노아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인한에게 다가왔다.
인한이 와락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걸 맞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사실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여기저기 풀뿌리가 잘려 나가고, 커다랬던 덩치가 반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인한이 스태미나가 덜어진 데 비해 놈은 그 상태 그대로였다.
-네놈을 먹고 힘을 회복하겠다. 얌전히 마력을 내놔라!
“내가 달라고 줄 것 같냐?”
인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극체술의 장점은, 지속성에 있다.
지금 이 순간도 육체의 치료가 이루어지고 있었고, 애초에 인한의 몸은 이제 어지간한 피해로는 상처 입을 정도가 아니었다.
-크흐흐! 불쌍한 것. 이곳이 어디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
붉게 변한 위그라노아의 두 눈동자가 더욱 요사스럽게 빛났다.
주위를 둘러보던 인한의 두 눈동자가 이내 커다랗게 변했다.
“시발, 설마?”
인한이 획 고개를 돌려 다시 지면을 바라보았다.
마치 핏줄처럼 두꺼운 나무뿌리가 지면에 가득했다.
-크하하하하!
위그라노아의 몸이 갑자기 흩어지듯 녹아내리며, 몸을 구성하던 뿌리와 풀들이 지면을 파고들었다.
직후, 거대한 울림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이곳이야말로 나.
지면이 꿈틀대며 흔들렸다.
-네놈들이 이 지역에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나의 뿌리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