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공략자들 114화>
거래라.
인한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애초에 인한을 부른 이유도 거래를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 분명하다.
‘재밌는 사람이군.’
인한은 김명준을 한 번 훑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나 보죠.”
김명준은 입을 꾹 닫은 채, 앞에 놓인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짧게라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탓에 시간을 끌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한여름인데도 뜨거운 차를 가져다 놓았다.
‘지금이 분수령이다. 말을 잘 골라야겠구나.’
사실 요구하려고 했던 것은 꽤 많았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대화 속에서 은근하게 밑 작업을 하려고 한 것이었다.
굳이 장관급들 대부분을 모아 둔 것도, 모종의 압박감을 주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일체 통하지를 않았다.
국가 공격대의 대장직 임명, 국가 소속 헌터의 교육, 위험 지역 소탕, 검은 탑 정보 제공, 부산물 제휴, 해외 파견…….
요구할 것들은 많았지만, 사실상 모두 물거품이 됐다.
인한이 김명준의 전화를 받아 초청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주도권은 인한에게 있었다.
‘결국 힘을 가진 자가 최고구나.’
통제되지 않는 힘은 이리도 무서웠다.
그야말로 무뢰배나 다름없는 행태지만, 그 무뢰배의 손에 끝을 알 수 없는 힘이 있으니 대화의 주도권을 뺏어 올 수가 없다.
고작 개인의 힘이 일국을 움직일 정도라니.
칼자루는 인한이 쥐고 있었다.
아무리 그의 마음에 들 만한 요구를 해 봤자, 그가 변덕을 부려 거절해 버리면 끝이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보수층의 희망, 서울 시장, 당 대표…… 거기다 대통령까지 됐건만, 고작 일개 시민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자존심이 꿈틀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애써 잠재웠다. 지금은 실익을 따질 때였다.
인한은 시시각각 변하는 김명준의 눈빛을 보며, 엷게 웃었다.
이런 사람은 마음에 든다.
속에 음흉함을 품고 있더라도, 자신을 죽이고 실익을 취할 수 있는 자다.
동료로서는 최악이지만, 일국의 대통령으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격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김명준이 천천히 입을 뗐다.
“해외의 헌터가 대한민국을 침범하거나, 해외 교포들에게 위해를 입히거나, 혹은 시민들이 위험에 빠졌을 때…… 힘을 빌려 주겠나. 그걸로 충분하네.”
“흐음.”
인한이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정말 김명준이 국민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런 생각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후일을 염두에 두고 여지를 남기려는 것이 눈에 훤하게 보였다.
마치 핵탄두처럼,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는 무기가 되게끔 하려는 것이다.
인한이 그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저들은 위기 상황에 즉시 사용 가능한 조커를 손에 얻게 된다.
“현명하시군요.”
인한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하지만, 멍청하기도 합니다. 거래라는 게 동등해야지, 이게 거랩니까?”
“그게 무슨 소린가?”
“헌터 관리법 바꾸라는 게 뭐 제가 좋아서 바꾸라는 겁니까? 결과적으로 보면 다 당신들을 위한 겁니다.”
“나를 위한 거라고?”
“지금 헌터 관리법이 실효성 있다고 보십니까? 현실적인 법을 만들어야지, 전부 정부에만 좋고 보기만 좋은 허울뿐인 법안을 만들어 봤자 일반 국민들만 목 조르는 겁니다. 해외에서 헌터들 빼 가려고 그렇게 수작을 거는데…… 그딴 법안이나 만들고 말이야.”
인한이 장관들을 쓸어 보았다.
장관들이 인한의 눈빛에 불편한 듯 기침을 하면서도 차마 반박할 수는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라면 랭커들을 포함해서 대한민국의 헌터들을 모조리 잃을 겁니다. 막으려고 해 봤자 소용없어요. 헌터들을 뭐로 막으실 겁니까?”
“…….”
“하긴, 우리나라는 언제나 그래 왔죠. 인재들이 그렇게 많은데 윗대가리들이 지랄해서 다 외국으로 빠져나가고.”
“마, 말이 조금 심하군.”
“틀렸습니까?”
“크흠…….”
김명준이 침음성을 흘렸다.
“원하는 것이 있는가? 무엇이든 말만 하게. 돈이든, 자리든…… 무엇이든 제공하겠네.”
“필요 없습니다.”
돈도, 권력도, 명예도.
인한이 얻고자 하면 저들이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이 얻어 낼 수 있다.
인한은 그 말을 끝으로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명준이 다소 다급한 자세로 일어섰다.
“벌써 가는가?”
인한이 피식 웃었다.
“뭐 편하다고 앉아 있습니까? 개돼지들만 앉아 있는데.”
“…….”
인한이 싸늘해진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집무실을 벗어났다.
바로 뒤까지 따라온 김명준을 보며, 인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들과 다릅니다. 몬스터 웨이브든, 헌터들이 범죄를 저지르든, 해외의 헌터들이 국민을 처리하든…… 내 귀에 들리면 가만히 있을 생각 없으니 걱정 마시죠.”
“아……! 고맙네, 내 부탁함세!”
“오해하지 마십쇼. 혹시라도 내 이름을 파는 게 보이면 대통령님은 제 방문을 받게 될 테니까.”
사색이 되는 김명준을 뒤로한 채, 인한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인한이 떠난 자리.
집무실에서 장관들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때, 비서실장이 천천히 김명준에게 다가와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아아, 괜찮네.”
김명준은 머리를 의자 턱에 걸친 채, 숨을 길게 내쉬었다.
“술 한 잔이 땡기는군.”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잘하셨습니다. 설마 이렇게 흘러갈 줄은…… 누구도 몰랐으니까요.”
“아니! 그 싸가지 없는 놈은 대체 뭡니까? 지금 대통령께 감히!”
“그러니까 말입니다!”
“에잉!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저런 잡것의 요구를…….”
인한이 사라진 후의 집무실에서는 인한을 까 내리기 바빴다. 그들이 먼저 인한을 건드린 것은, 결코 생각하지 않는 행태였다.
그들이 한 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잘못된 일’로 여겨지지 않았다.
큰일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의 희생은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인한이 갑자기 힘을 드러내며 문제를 일으킨 것도 그저 하나의 변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일개 시민이라 생각했던 놈이 힘으로 그들을 압박했으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한이 이런 생각들을 알고 있었다면 이 자리에서 대화는 없었을 것이다.
모조리 죽여 버렸을 테니까.
그들은 잊고 살았다. 아니, 그들뿐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사는 것이 있었다.
일개 국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도, 장관도, 결국 국민이 세운 것이다.
그들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대리권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여 있는 이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도, 인정하려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요구를 받아들일 셈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아직도 기자들이 최인한 헌터를 건드리는 모양인데, 어서 공문 내리세요.”
“예? 그들이…… 말을 듣겠습니까? 야당이 뒤를 봐주고 있는 곳도 많지 않습니까. 오히려 저희 쪽에서 말을 내리면 더욱 들쑤실 텐데요.”
“그럼 맘대로 하라고 전하십쇼. 대신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도와줄 생각은 없다고 전하세요.”
그들도 귀가 있고 눈이 있다.
인한의 방문을 받으면 어떻게 될지는 그들도 충분히 알 터다.
“아, 네. 알겠습니다.”
김명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눈을 지그시 감은 그는 고작 몇 분 전까지 자신의 앞에서 눈을 빛내던 청년을 떠올렸다.
‘과연 그게 20대 청년이 맞는 것인지.’
인한의 눈빛, 그 힘, 살기와 상황을 꿰뚫어 보는 혜안까지.
김명준도 다른 이들과 다를 바 없지만, 그래도 그는 눈앞에 있는 이들보다는 조금 더 앞을 바라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어쩌면…… 내 일생일대의 잘한 일일지도 모르겠군.’
욕심을 부리려고도 했고, 찍어 누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 정도의 애매모호한 약속을 한 것이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피곤하군.’
김명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 * *
인한은 청와대에서 바로 집에 돌아왔다.
사실 진정한 의미의 집처럼 느껴지지도 않지만, 그래도 자신만의 공간이라서 그런지 들어온 순간 급격히 피곤이 몰려왔다.
인한은 씻지도 못하고, 기어가듯이 침대로 파고들었다.
‘참…… 많은 일이 있었군.’
그리고 몽롱한 상태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너무 많은 감정을 소비한 며칠간이었다.
많은 것을 얻었고, 많은 것을 잃었다.
인한은 이를 악물었다.
또다시 감정에 침몰될 것만 같았다.
인한은 언제나 이 외로움과 고독감과 자괴감이 들 때면 생각을 돌리거나 수련을 하거나 잠에 들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그건 도망치는 것이었다.
몬스터만이, 킬러만이 마주해야 할 적이 아니었다.
내면의 어둠 또한, 마주해야 했다.
인한의 나약함도, 잘못도, 실패도, 성공도…… 모든 것이 인한의 한 부분이었다.
인한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눈을 돌리지 않고, 아주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인한이 몸을 잔뜩 웅크렸다.
그리고.
“끄윽…….”
작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숨죽여 한숨을 내뱉는 인한의 등이 애처롭게 떨렸다.
아무리 분노를 토해 내도, 아무리 강한 척을 해내도.
죽어 버린 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 한 마디도 나누지 못했다.
인한과 비슷할 정도로 키가 큰 놈이, 불에 타선 한주먹 정도에 불과한 하얀 재 가루가 된 것이 떠오르자 더 이상 인한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수십 년 만에 볼 수 있었던 가족이었다.
살아 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정말 보고 싶었다.
이제 동생도 성인이 됐을 테니, 술 한 잔 같이 해 보고 싶었다.
목욕탕에 가서 등도 밀어 주고 싶었다.
라면 하나 끓여서 같이 먹어 보고 싶었다.
안이 텅 비어 있긴 하지만, 부모님의 묘도 찾아가 절도 하고 싶었다.
인한의 감정의 요동과 함께, 만신창이인 두 마력원과 마력로가 삐걱대는 게 느껴졌다.
엷은 고통이 온몸을 쿡쿡 쑤셨다.
하지만 그런 고통을, 인한은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인기척 없는, 삭막하고도 어두운 방 안.
강해지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고, 세상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희생했던, 강직해 보이지만 사실은 연약한 한 명의 사람에 불과한…… 그런 평범한 청년이 아주 천천히, 흐느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 * *
일주일에 걸쳐 몸을 회복한 인한은, 강원도로 향했다.
강원도.
몬스터들이 똬리를 튼 복마전.
이제 강원도는 옛날의 강워도가 아니었다.
몬스터와 몬스터 웨이브의 영향을 받아 밀림에 가까울 정도로 숲이 울창해졌다.
그 넓은 지역을 크고 두꺼운 벽이 막고 있으며, 군대가 상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예비군이었군.’
인한은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벽과 그 벽 위에 서 있는 또래의 청년들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형님!”
그때, 뒤편에서 이창훈의 외침이 들려왔다.
인한은 천천히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이정환의 서커스 팀.
임태호의 강철 팀.
이소영의 클레아 팀.
오성의 오성 공격대까지.
엄청난 수의 헌터들이 나열해 있었다.
“용케 백호 공격대까지 움직이셨군요.”
대한민국의 최상위 랭커이자 오성 공격대의 대장, 강성이 인한에게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들은 동해안을 타고 올라올 예정이라고 하니, 우리는 여기서 시작하도록 하죠.”
인한이 그렇게 말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갑시다.”
인한의 전신에서 마력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동시에 철벽 밑에 있는 문이 천천히 열리며 울창한 안쪽의 풍경을 드러냈다.
“위험 지역은 이번에 지도에서 사라질 겁니다.”
탑만 신경 쓸 게 아니었다.
인한은 위험 지역을 소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조금 난처해하는 김명준에게 억지로 허락을 받아 내고, 이렇게 사람을 모은 것이었다.
-키에에에!
-크르르르!
입구에 들어선 순간, 사방에서 몬스터들의 거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임태호는 인한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10층을 클리어한 최초의 인물이자, 구원자이며, 영웅이며, 수많은 방식으로 칭송받는 인한이 약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었다.
이건 해도 너무했다.
콰아아아아아아!
빛의 기둥이 직선으로 뿜어졌다.
그리고 그 빛의 기둥이 사라진 자리에는,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Lv.98 분노한 그렘린을 처리하셨습니다.]
[Lv.85 겁에 질린 그렘린을 처리하셨습니다.]
[Lv.73 병에 걸린 그렘린을 처리하셨습니다.]
……
일당백이라는 말이 있다.
일기당천이란 말도 있다.
솔직히 임태호는 개소리라고 생각했다.
오랜 암흑가 생활을 해 온 그는 주먹 잘 쓰는 놈보다 연장 든 놈이 강하고, 아무리 강한 놈이더라도 다구리에는 장사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그의 상식을 깨 버렸다.
‘아니, 지가 무슨 손X공이야……?’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몬스터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몬스터 웨이브 때 튀어나온 몬스터들이라, 몇 층에서 나오는 놈인지도 모르는 고레벨의 몬스터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런 괴물들을 가벼운 주먹질 한 방에 몰살시킨다.
이쯤 되니 왜 이 인원을 불러 모았는지가 궁금할 정도로, 인한은 강했다.
힐끗 옆을 보니 오성 공격대의 대장인 강성도 어처구니없어하는 모습이었다.
아니, 그뿐 아니라 인한과 친분이 깊어 보이는 이정환과 이소영의 팀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에효, 저 괴물 같은 양반 또 강해졌네. 지가 무슨 손X공이야? 에너지파 쏘게. 저쯤 되면 이제 사람 영역이 아닌데.”
이창훈만은 느긋하게 인한의 뒤를 쫓아다니며 부산물 처리를 하고, 아이템을 주웠다.
그렇게 순조롭게(?) 위험 지역 소탕이 진행됐다.
혼자서 날아다니는 인한을 보며, 임태호는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인한의 부탁에 여기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 길이 멀군.’
그도 인한에게 가려졌다 뿐이지, 사실은 떠오르는 신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한과 1층에서 만난 후로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 엄청난 속도로 8층까지 뚫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는 팀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실력은 공략자 팀에서도 탐을 낼 정도로 뛰어났다.
그런데 새로운 산을 본 기분이다.
임태호는 히죽 웃으며 대검을 꽉 움켜쥐었다.
‘뭐, 금방 쫓아가겠지만.’
임태호는 몰랐다.
과거의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랭커였으며, 인한이 존경하는 형님이었고, 전 세계적으로도 근거리 딜러를 뽑으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사내였다는 사실을.
“하아아아압!”
임태호도 대검을 휘둘러 몬스터를 베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