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공략자들 106화>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이창훈은 뒤늦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인한의 시선을 알아차렸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찔리는 기분이었다.
“왜, 왜 보십니까?”
“뭐 하냐?”
인한이 턱짓으로 씨그랜의 시체를 가리켰다.
그제야 이창훈의 눈에 곱린이와 리자가 인한의 명령에 따라 씨그랜을 해체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저것들이…….’
이창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테이머가 아닌 사람이 내린 명령을 듣는 몬스터라니…… 이제 태클 걸기도 귀찮았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 이창훈에게 인한이 정색했다.
“너 혼자 가만히 있네?”
그 말에 이창훈은 생각하기를 멈췄다.
서둘러 곱린이와 리자가 있는 쪽으로 가서 작업에 합류하지 않으면 한 대 맞을 것만 같은 분위기.
“가, 갑니다!”
* * *
어떤 세계, 어떤 곳.
산맥이 움직였다.
아니, 정확히는 산맥이라 착각할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였다.
쿠구구구!
그 존재가 움직일 때마다 세계가 진동했다.
긴 꼬리, 커다란 날개, 강철보다 단단해 보이는 비늘과 우뚝 솟은 수정처럼 투명한 뿔, 거기다 날카롭게 빛나는 뱀의 눈동자까지.
그것에게 이름을 붙인다면, 오직 하나의 이름만이 적합할 것이다.
드래곤.
아인족, 용족, 요정족의 삼대 종족 중, 최강종(最强宗)이라 칭해지는 용족의 정점에 자리한 존재.
그리고 알에서부터 마력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는, 마법의 종주이자 창시자.
그러나 아무리 드래곤이라 한들 지금 움직인 존재의 크기는 한눈에 다 담기 힘들 정도로 거대했다.
하나의 산맥에 가까운 크기를 가진 드래곤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다시 찾았다.”
그 존재의 입에서 차분함이 느껴지는 중저음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와 함께, 드래곤의 정면에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탑이라…….”
다시 한마디의 말소리가 들린 다음에는 드래곤의 모습이 녹아내리듯 사라졌다.
* * *
인한과 이창훈은 탑 밖으로 나왔다.
11층 필드와 메인 던전을 돌며 얻은 부산물은 언제나처럼 김만춘에게 넘겼다.
“이게 다 뭐야!”
김만춘은 기뻐서 그런 건지 화나서 그런 건지 모르겠는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감정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아직 11층은 공략되지 않은 층이다 보니 감정에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었다.
탑에서 나온 인한과 이창훈은 저녁을 같이하고는 해산했다.
인한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고요한 집안은, 사람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가구들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흔한 장식 하나, 개인 물품 하나가 없었다.
유일하게 있는 거라고는 인한이 무너진 옛집에서 가져온 구겨지고 빛바랜 가족사진뿐이었다.
인한은 우두커니 사진을 바라보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따 소파에 몸을 깊게 파묻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새파란 달빛이 파고들었다.
인한은 여전히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보았다.
가죽이나 천, 아니면 실을 엮어 만든 것이라고도 보이지 않는 표면에는 비늘을 연상시키는 특이한 물결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인한이 용왕의 이빨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체 이놈은 뭘까…….”
모든 인피니트 시리즈는 이렇게 특이한 걸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용왕의 이빨은, 트리아스 액셀을 위해 존재하는 아이템이라는 게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아니, 트리아스 액셀의 한 부분?’
그래, 그 표현이 더 어울렸다.
흔히 좋은 무기를 얻으면 손발이 늘어난 기분이 든다고 하는데, 용왕의 이빨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그저 잃어버렸던 자신의 몸을 되찾은 듯한 느낌이다.
단순 능력치 상승에만 도움이 되는 다른 장비들과 다르게, 인한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더 정확히는, ‘트리아스 액셀’을 다루는 사람의 일부라는 느낌이었다.
‘거기다 묘하게 뭔가와 연결된 듯한 기분이란 말이야.’
아득히 먼, 어떤 곳인지 알 수 없는 곳의 무언가와 이어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이질적이라는 감각도 아니었다.
가끔 친한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마음이 통한다는 기분이 드는 듯한, 꼭 그런 감각이었다.
‘나도 감성적이게 됐군.’
인한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때였다.
우우웅! 우우웅!
주머니 속에 울리는 진동에 인한이 스마트폰을 켰다.
“창훈이?”
인한이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야?”
-혀, 형님!
“……?”
이창훈의 목소리가 뭐에 쫓기기라도 하듯 격양되어 있었다.
“왜 그래?”
-제, 제 일이 아니에요. TV! 얼른 TV 켜 보세요!
“뭐?”
-빨리요! 뉴스! 뉴스 켜 보라고요! 형님, 대체 뭘 한 거예요!
인한이 눈가를 찌푸리고 이창훈의 말대로 TV를 켰다.
[…… 헌터 최 모씨는 7층 필드에서 군 소속의 공략대인 백호 길드의 요원들과 접촉 후, 그들을 함정에 빠뜨려 아이템을 갈취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함정에 빠진 백호 공격대의 대원들은 대부분 중상을 입었고, 개중에는 사망한 사람도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럼 백호 공격대의 공격대장의 발표를 들어 보시겠습니다.]
별 미친놈이 다 있었다.
아무리 헌터들이 법에 그리 얽매이지 않는 난폭한 자들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 선은 있는 법이었다.
국가 권력을 함정에 빠뜨려 아이템을 갈취하다니.
곧 화면이 단상 위에 서 있는 군복의 중년인에게로 옮겨 갔다.
[어…… 현재까지 파악한 바는, 백호 공격대원들은 헌터 관리부의 요청에 따라 용의자를 찾아 등록을 하도록 권했으나, 용의자가 이에 응하지 않고 대원들을 유인해 함정에 빠뜨린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용의자는 헌터 관리부에 등록하지 않은 상태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 말에 뭔가 기분이 싸해지는 것을 느꼈다.
상황은 조금 달랐지만, 인한은 얼마 전 그 비슷한 일을 겪었다.
[또한, 대범하게도 공격대 소속 헌터에게 갈취한 아이템인 ‘흑요석 검’을 유명 인터넷 경매 사이트인 M사에 올려 상당한 돈을 얻어 내기까지 하였습니다.]
흑요석 검.
인한이 불가살이 공격대 소속 요원에게 빼앗은 무기였다.
인한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래, 이렇게 나오겠다 이건가?’
수화기 너머로 이창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형님!
“시끄러워.”
-저거 형님이 판 아이템이잖아요! 흑요석 검! 형님, 백호 공격대 애들 건드린 거예요?
“아니야.”
-그런데 저거 분명 형님이잖아요!
“시끄럽고. 미안하지만 이틀 뒤에 탑에 오르기로 한 건 취소다. 할 일이 생겼어.”
-예? 저, 혀, 형님?
인한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제야 인한은 한 통의 메시지가 핸드폰에 도착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선물은 잘 보셨습니까? 최인한 씨.]
인한이 비릿하게 웃었다.
* * *
접선 장소는 홍대에 있는 커피숍이었다.
번잡한 인파를 비집고 커피숍에 도착한 인한은 구석진 자리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는 싱긋 웃으며 인한을 반겼다.
“반갑습니다, 인한 씨. 아시겠지만 저는…….”
“이 악물어.”
“예?”
퍼억!
사내의 입에서 후두둑, 치아가 핏물과 함께 뿜어졌다.
“커, 커억! 무, 무슨 짓을…….”
사내가 입을 틀어막으며 피를 게워 냈다.
인한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내가 경고한 것 같은데.”
인한이 사내의 멱살을 거머쥐었다.
“날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보라고 말이야.”
“자, 잠깐! 얘기부터……!”
퍼억!
인한의 주먹이 또다시 휘둘러졌다.
또 한 번의 일격에 팔이 기형적으로 뒤틀렸다.
“끄어어…….”
사내는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눈이 뒤집혔다.
“꺄아아악!”
“무, 무슨!”
당연히 코앞에서 폭력 행위가 일어나고 있으니, 조용할 리가 없었다.
카페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
인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고, 반대쪽 손을 위에서 아래로 한 번 내려 그었다.
“잠영(潛影).”
나지막한 중얼거림이었지만, 그 중저음의 목소리에 실린 힘이 소란을 뚫고 사방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인한과 사내의 모습이 마술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뭐, 뭐야?”
“그 사람 어디 갔어?”
“겨, 경찰 불러! 야! 알바생! 경찰 부르라고!”
사람들이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딸랑!
그 때문일까.
아무도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았는데 카페 문이 열렸다는 것을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인한은 사내를 골목길에 내던졌다.
“크헉!”
“그 근처에 네놈의 요원들이 있었지?”
인한이 걸레짝처럼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사내가 흠칫 놀라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자, 잠깐! 얘기부터……!”
퍼억!
인한이 발을 휘둘렀다.
가볍게 휘두른 듯한 일격에 사내의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추락했다.
“너희들은 학습 능력이 없는 것 같아.”
“크헉! 크륵!”
사내가 침을 뚝뚝 흘리며 몸을 뒤틀렸다.
인한이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귀찮아서 건들지 않은 건데…… 주제도 모르고 기어올라?”
인한의 발이 사내의 가슴팍을 꾹 짓눌렀다.
“끄, 끄으으으윽!”
뚜둑! 뚜둑!
금이 가고 있는 것인지, 버둥대는 사내의 가슴에서 소름 돋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내가 발악하듯, 다급하게 외쳤다.
“저, 저희 쪽에서! 크윽! 지금 인한 씨의 동생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
인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내 가족들은 전부 죽었다.”
“아, 안 죽었습니다! 동생분! 동생분이 살아 있습니다!”
“죽고 싶어 하는 방법도 참 가지가지야.”
인한이 발에 가하는 힘을 더했다.
사내가 다급히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걸 봐 주십시오!”
스마트폰에는 사진 한 장이 띄워져 있었다.
인한의 몸이 우뚝 멈췄다.
사진 속 남자는 열이면 아홉은 미남이라고 말할 외모의 소유자였다.
선이 굵은 이목구비에 깊은 검은색 눈동자.
인한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인수……?”
그리고 그 남자는, 묘하게 인한의 얼굴과 닮아 있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인한의 표정을 보며, 사내가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흐흐! 어때, 이제 대화할 생각이 들었…… 커흑!”
콰득!
인한의 손이 사내의 목을 그러쥐었다.
건장한 사내의 몸을 한 손으로 치켜든 인한에게서 뭉클, 살기가 피어올랐다.
“……!”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실제로 손을 쓴 것도 아니었고, 모종의 기운을 뿜어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살기.
그도 8층까지 오른 엘리트 중의 엘리트 헌터건만, 고작 인한이 뿜어낸 살기에 전신의 힘이 풀리며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개 같은 수작질하는 거라면…… 번지수 잘못 찾은 거다.”
인한의 동생, 최인수.
몬스터 웨이브 사태가 끝난 이후에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결코 찾을 수 없던 동생이었다.
회귀 전에도, 강원도로 피난 가는 행렬에서 떨어져 두 번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커흑! 수작…… 큭! 수작질이 아니다! 강원도 군부대에서…… 크륵!”
사내가 버둥거리며 인한의 손에서 벗어나려 힘썼다.
그 모습을 보던 인한이 손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쿨럭! 쿨럭!”
사내가 한동안 기침을 내뱉다 인한을 노려보았다.
칼자루는 자신이 쥐고 있다고 느낀 것일까.
인한이 발하는 기세에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그 눈빛만은 고압적이기 그지없었다.
“어때, 이제 얘기할 생각이 들었나?”
인한은 차가운 눈으로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뭐?”
그 순간, 무언가 정체 모를 기운이 사내의 목구멍을 통해 삼켜졌다.
“꿀꺽! 컥! 대체 뭘……!”
“하나만 묻지. 네놈들 본부는 처음부터 종로에 있었냐?”
“……?”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사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됐어.”
인한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사내가 벙찐 표정으로 인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직후였다.
사내의 표정이 기이하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악!”
꾸드드득!
관절이 꺾이고. 근육이 찢기고, 혈관이 조여졌다.
마치 걸레처럼 사내의 몸이 쥐어짜이듯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때, 사내의 앞으로 몇몇 젊은이들이 지나쳤다.
“사, 살려…… 살려……!”
사내가 손을 뻗으며 외쳤지만, 사람들은 마치 사내가 보이지 않기라도 하듯 저들끼리 떠들며 지나갔다.
“끄, 끄으으으!”
전신의 몸이 뒤틀리며, 사내는 골목길에서 홀로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