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공략자들 103화>
이창훈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전신을 감싸던 밝은 빛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는 어두컴컴한 공간에 서 있었다.
“곱린아? 리자야?”
습관적으로 종속시킨 몬스터들을 찾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마력으로 의념을 보내 봐도 마찬가지였다.
“형님?”
몬스터뿐만이 아니라, 방금 전까지 바로 옆에 있었던 인한조차 보이지 않았다.
[스페셜 던전 ‘무한의 금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만들어 낸 던전입니다. 입구에 던전 제작자의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필멸(必滅)의 운명을 타고나, 무한에 닿은 자.’]
[난이도 : S]
[클리어 적정레벨 : 없음]
“어?”
이창훈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전 처음 보는 던전이었다.
스페셜 던전이라면 실제로 보스가 있는 던전들과 다르게, 정해진 조건을 수행해야만 클리어할 수 있는 던전이란 셈이었다.
‘형님이 말한 게 이거였나?’
이창훈은 인한이 말했던 ‘장비를 뽑는다.’는 말의 의미를 그제야 깨달았다.
‘헉, 잠깐! 보상을 장비로 주는 S급 스페셜 던전이라면……!’
더 생각해 무얼 할까.
대박이었다.
“으하하하! 개이득!”
이창훈은 무작정 땅을 박찼다.
그 생각 없는 행동을 후회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 *
무한의 금고.
어디서 얻는지, 어떻게 얻는지도 알려지지 않은 ‘무한의 열쇠’라는 아이템으로만 열 수 있는 스페셜 던전의 이름이었다.
‘무한의 금고’는 매 10층마다 존재하며, 공략이 끝난 던전에서 마력을 열쇠에 주입하면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무한의 금고의 보상이 바로 무한히 성장하는 아이템, 인피니트 시리즈였다.
‘박철환의 구원의 검, 발터 에스키엘의 천룡의(天龍衣), 신검 리셴의 천검(天劍)까지…… 죄다 굵직한 아이템들이지.’
무기의 주인만큼이나 무기들 자체도 갖은 이야기를 몰고 다녔다.
마치 신화나 전설 속 영웅들의 이야기엔 꼭 그들만의 무기가 따르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얻을 수 있을까.’
사실, 무한의 금고에 출입한 자는 꽤 있다.
아마 아슬아슬하게 백 명은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 인피니트 시리즈를 얻은 자는 다섯 명이 채 안 됐다.
그 사기적인 능력만큼이나 주인을 가리는 무기이기도 한 것이다.
인한은 차분하게 던전을 나아갔다.
수많은 스페셜 던전과 메인 던전, 소수이기는 하지만 개방되어 있던 히든 던전까지 도전해 봤던 경험이 있는 인한이지만, 무한의 금고는 그도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놈들이 열쇠의 사용법을 몰라서 다행이군.’
인한은 손에 쥐여 있는 무한의 열쇠를 인벤토리에 넣었다.
그들이 무한의 열쇠의 사용법을 알았다면, 아마 이렇게 인한의 손에 열쇠가 쥐어져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피니트 시리즈를 가지고 있는 레오에게서 인한이 도망칠 수도 없었을 것이다.
터벅터벅, 어두컴컴한 길을 걸은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공간이 진동했다.
-필멸자여.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후한 남성의 음성이었다.
-절망을 극복하라.
인한은 그 목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처음 회귀한 후, 10년의 시간이 지났다.
인한은 결국 실패했다.
충분한 준비를 하고,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인한은 결국 또다시 100층의 보스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수많은 동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그리고 과거와 같이 인한만이 살아남았다.
“하하하! 우매한 것들!”
인한은 100층 보스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들으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쓰러져 있는 여성에게 다가갔다.
콸콸 피를 쏟아 내는 여성의 몸을 뒤집었다.
이소영이었다.
초점 잃은 눈동자가 허공을 향해 있었다.
“욱!”
인한은 구역질을 애써 참았다.
임태호도, 이정환도, 이창훈도…….
모두가 죽어 있었다.
어느새 인한은 울고 있었다.
어디선가 수선화의 향이 났다. 인한은 그곳으로 다가갔다.
“크흐흐! 이 년이 네 연인이더냐?”
100층의 보스가 하영의 가녀린 목을 움켜쥐었다.
버둥버둥 몸부림치는 하영의 시선이 인한에게 향했다.
“인, 한…….”
힘없는 하영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인한은 저도 모르게 땅을 박찼다.
하지만.
뚜둑!
하영의 목뼈는 인한이 도착하기 직전, 힘없이 꺾이고 말았다.
하영의 몸에 힘이 축 늘어지고, 수선화 향기가 저 멀리로 사라졌다.
“하, 하하…….”
인한은 허탈하게 웃으며 주저앉았다.
100층의 보스가 천천히 다가왔다.
인한에게 그의 손이 천천히 떨어졌다.
“헉!”
인한이 눈을 부릅뜨며 정신을 차렸다.
숨을 몰아쉬는 인한의 전신은 땀에 절어 있었다.
‘지금 뭐였지?’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인한은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들을 되짚었다.
100층의 보스.
죽은 동료들.
“으, 으으…….”
인한은 저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흘렸다.
시작의 신전이나 악몽으로 꾸던 광경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정말 경험한 것처럼, 인한은 분명 그 광경 속에 있었다.
환영 속의 자신은 그것이 환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때의 전신을 감싸던 절망감과 자괴감…… 인한은 그걸 버틸 수가 없었다.
-절망을 극복하라.
인한이 채 정신을 다 차리기도 전에 또다시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40층, 보스 몬스터 몽마왕 큐베리아.
이창훈이 인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형님…… 대체 왜…….”
이창훈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표정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서렸다.
“당신 때문에 다 죽었어! 다 죽었다고!”
인한이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살아 있는 자는 10퍼센트에 불과했다.
길드의 동료들 대부분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꿈일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이런 참극이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날 리가 없다.
이 광경을 만들지 않기 위해, 인한은 죽을 기세로 수련해 왔고, 미친 듯이 탑을 클리어해 왔다.
“대답하라고, 새끼야!”
이창훈이 인한의 안면에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의 주먹 정도로는 인한의 몸에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이창훈은 씩씩대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인한은 여전히 멍한 상태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이 잘못됐단 말인가.
40층의 공략을 너무 서둘렀던 탓일까?
아니면 스트리밍을 통해 정보를 뿌린 게 잘못됐던 것인가?
3차 몬스터 웨이브를 막은 게 잘못됐던 건가?
아니면…… 회귀 후의 삶이 전부 잘못됐던 걸까?
시야가 뿌옇게 번졌다. 눈물이 차올라 하늘이 보이지가 않았다.
‘정신…… 정신 차리자. 아직 난 죽은 게 아니야.’
과거의 실패를 반복했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동료들이 있다.
인한은 길드장이었다. 어서 살아 있는 자들을 수습해서…….
‘어?’
그러다 인한은 위화감을 눈치챘다.
오른손을 들어 눈물을 닦으려는데, 오른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인한이 천천히 고갤 돌려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아, 아아아악!”
인한은 자신의 오른손을 또다시 잃었다.
“허억! 허억!”
인한은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제, 제길…….”
대충 던전의 진행 방식을 깨달았다.
인한과 이 던전의 방식은 극도로 상성이 안 좋다.
인한처럼 과거의 후회에 붙잡혀 있는 사람에겐, 이 던전은 그야말로 극악이었다.
아마 절망에 이겨 내야 이 시련이 끝날 것이다.
-절망을 극복하라.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수십, 수백 번의 절망이 인한을 덮쳤다.
벗어날 수도, 포기할 수도 없었다.
현실에서는 고작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건만, 인한은 수백 번의 환영 속에서 철저하게 망가져 갔다.
던전을 포기하기 위해 입을 열려 해도, 순식간에 다시 목소리가 들려와 인한을 절망 속으로 밀어 넣었다.
“아…….”
인한은 딱딱한 바닥에 드러누운 채, 갈라진 목소리를 흘렸다.
극심한 피로감에 눈을 감고 싶었지만, 감기만 하면 떠오르는 수많은 절망의 감각들이 무서워 눈을 감지도 못하고 있었다.
‘극복, 극복을…….’
인한은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없다.
인한은 그것들을 이겨 낼 자신이 없다.
‘시발…… 어떻게 하라는 거냐…….’
눈앞에서 자신의 잘못 때문에 가족이, 친구가 죽었다.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차라리 자신이 죽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란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째서 언제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자신인 것일까.
-일어나…….
환청이 들려왔다.
40층 보스존에서 하영이 죽기 직전, 자신에게 해 줬던 말.
-웃어야 해.
이 이야기도, 대체 얼마나 들었는지 셀 수도 없었다.
매 환영마다 인한은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세웠고, 그때마다 인한은 이 말을 들었다.
어차피 이제 곧 다시 목소리가 들려올 테다.
또다시 인한은 하영을 죽음으로 몰아세워야 했다.
-절망을 극복해라.
다시 들려온 목소리.
인한은 포기한 듯 피식 웃으며 환영으로 빠져들었다.
이번의 환상은 그동안의 것과 달랐다.
인한은 이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하긴, 뭐가 달라질까.’
그렇게 생각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때, 그의 눈에 한 여성이 들어왔다.
‘누구지?’
인한은 모르는 사람이었다.
창백하다 싶을 정도로 새하얀 피부도, 열대 지방의 바다 같은 투명한 파란 눈동자도, 길게 늘어뜨린 은색과 금색이 섞여 있는 머리카락도.
도저히 현실에 존재하는 외모의 여성이 아니었다.
예술가가 여신을 캔버스 위로 옮기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왜 그러고 있어?”
장난기 섞인 말투였다.
인한은 이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리고 이 말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기억이…….’
이것도 결국 인한의 기억 속 정보를 재구성한 환영일 텐데, 인한은 이런 비현실적인 외모를 가진 여성을 알지 못했다.
킥킥 웃은 여성이 인한에게 다가왔다.
여성은 상냥한 표정으로 까치발을 서더니 인한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여성의 손이 아주 부드럽게 인한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넌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솔직히 전부 포기하고 싶다.
인한도 검은 탑이 있기 전에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PC방에서 시간을 허비하며 지내던 와중에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됐다.
서둘러 돌아간 집은 이미 반파되어 있었고, 부모님은 눈앞에서 돌아가셨다.
하나뿐인 동생은 도망가는 중에 떨어졌다.
대체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탑을 오르는 걸 그만두고 싶었다.
“정말?”
정말이다.
“표정은 아닌데?”
인한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자신의 손으로 눈을 만졌다.
오른손은 이전처럼 움직일 수 없었기에, 왼손으로 얼굴을 만졌다.
인한은 저도 모르게 울상을 짓고 있었다.
여성이 싱긋 웃었다.
“본심은 뭔데? 나한테까지 거짓말하게?”
인한은 천천히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본심.
‘탑을 오르고 싶다.’
동료들을 만나고 싶다.
죽은 동료들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이 세상에 검은 탑으로 인해 초래되었던 수많은 불행을 없애고 싶다.
“솔직하네. 얼마나 좋아! 맨날 강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면서, 말로는 지나간 일이라면서 궁상은 왜 떠는 거야? 그런 사람이 멋있는 거 같아? 그냥 찌질해 보이던데…….”
조금 말이 심한 건 아닌가 싶다.
하긴, 그녀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이런 식?’
인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기 자신을 좀 믿어 보는 건 어때?”
이 말을…… 언젠가 들은 기억이 났다.
그 말은 인한에게 많은 힘이 되어 주었었다.
뭉글뭉글 인한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정말 손이 많이 가는 계약자시네. 얼른 가 봐.”
여성이 인한의 가슴팍을 툭 밀었다.
인한은 몸이 기울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직후, 인한이 번쩍 눈을 떴다.
“어?”
환상이 끝나 있었다.
‘정말 환상이었나?’
인한은 가슴팍을 문질렀다.
여성의 작은 손이 닿았던 곳이었다.
착각인지, 아니면 환상을 통한 현실과의 괴리인 건지, 무언가가 자신을 만졌던 느낌이 드는 기분이었다.
-절망을 극복해라.
또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인한은 여성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았다.
맨날 강한 척은 다 하면서, 인한은 언제나 혼자 궁상을 떨었다.
어차피 다 환상인 걸 안다.
그걸 극복하는 방법도 안다.
환상 밖에 있는 자신이 마음을 굳게 먹으면 된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환상 속의 인한도 바뀔 수밖에 없을 터였다.
인한은 숨을 길게 내쉬며 심호흡했다.
‘그것들은 오지 않아. 나 자신을 믿자.’
잘못된 것은 없다.
던전 속의 이야기들은 전부 인한의 망상이었다.
인한의 연약한 면이자, 숨기고 싶은 치부였다.
그리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를 생각하며 망가져 가는 건 패배자들이나 할 짓이었다.
‘내가 딱 그 꼴이었지만.’
인한이 피식 웃었다.
인한도 패배자였다.
과거의 후회와 트라우마 속에서 허우적댔다.
곪아 터지기 직전의 상처처럼, 만약 이대로 탑을 올랐어도 언젠간 터졌을 상처였다.
차라리 지금 이 던전에서 터진 게 다행이었다.
거의 다 올라갔는데 이 트라우마가 불쑥 튀어나왔다면, 인한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깊은 수렁 속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 그녀가 아니었다면 다짐할 수 없었어.’
인한은 환상이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분명한 것은, 이번 환상도 힘들 것이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인한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