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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략자들-102화 (102/266)

# 102

<공략자들 102화>

“거절하겠습니다.”

“흐음…….”

이현철이 긴 침음성을 흘렸다.

“이유를 물어볼 수 있겠나?”

“간단합니다. 속박되기 때문이죠.”

인한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현철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밝게 웃었다.

“하하! 내가 아무렴 우리 딸의 친구한테까지 거짓말을 치겠나? 걱정 말게.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정말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지?”

“회장님이 말씀하시는 자유가 정말 제대로 된 것이라면, 회장님은 제게 오성의 이름만 빌려 가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것도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면서까지 말입니다.”

“…….”

인한의 말에 이현철의 눈매가 살짝 꿈틀댔다.

“당장 코앞까지 칼이 휘둘러졌는데 과연 자유를 보장해 주겠다고 저를 쓰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건…….”

만약 인한이 오성에 들어가는 순간, 이현철은 위기 상황마다 인한이라는 패를 떠올릴 것이다.

그가 아무리 약속을 지키고 싶어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건 분명 오기 마련이다.

‘그건 나한테도 마찬가지다.’

혼자서 극복하기 힘든 일이 있을 때, 인한은 과연 오성의 힘을 빌리지 않을까.

오성의 이름이 뒤에 있는 순간부터,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머릿속 한편에는 오성의 힘을 빌린다는 선택지가 자꾸 유혹을 해 올 것이다.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도움을 구한다면 오성의 밑에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하리라.

당장 길드 설립에 대한 생각도 그랬다.

오성의 밑이라면 많은 일들이 편할 테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저에게도, 오성에게도 좋은 일이 아닙니다.”

“자네는…….”

이현철은 복잡한 심경이 느껴지는 눈으로 인한을 바라보았다.

‘이게 고작 서른도 안 된 청년이 할 생각인가?’

동년배, 혹은 윗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현철은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눈을 빛냈다.

‘오히려 더 탐나는군.’

사실 그가 인한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육룡급, 혹은 그 이상의 무력을 소유하기 위함이었다.

거기다 영웅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만큼 마케팅으로써의 가치도 천문학적이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안목과 식견.

인한은 태생적인 리더의 재목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한이 입을 열었다.

“회장님의 말마따나, 친구의 아버지입니다. 설마 제가 친구네 집이 위험에 처했는데 도와주지 않겠습니까?”

“……!”

쐐기를 박는 한마디였다.

동시에 여지를 남기는 말이기도 했다.

“흐, 흐흐! 흐하하하!”

이현철이 오랜만에 큰 소리로 웃었다.

한껏 웃음을 흘린 이현철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근 몇 년 이래 이렇게 말려 본 적은 처음이군. 그래, 이 나라에 자네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군.”

이현철이 인한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잡았던 손이지만, 이번에는 그 의미가 달랐다.

인한은 이현철의 손을 꽉 잡았다,

* * *

인한과 이창훈이 다시 탑에 들어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형님?”

이창훈은 능글맞게 웃으며 인한의 옆에 섰다.

그런 이창훈을 훑어보던 인한이 헛웃음을 지었다.

‘장비를 또 바꿨어?’

이창훈의 차림새가 또 바뀌어 있었다.

이창훈은 전에 입던 갑옷은 어디다 버렸는지, 어느새 인한조차 알고 있는 이탈리아 브랜드의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다.

거기다 마법사 클래스인 주제에 허리춤에는 번쩍이는 검은색 너클이 두 개나 걸려 있었다.

자신을 살펴보는 인한의 시선에 눈치챈 것인지, 이창훈이 가슴을 쭉 펴며 자랑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이게 무려 휴그 사의 명품 갑옷입니다! 프리미엄 붙은 거라 억대입니다, 억대. 보스 몬스터 킹 보어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라더니, 캬! 편하고, 효과도 좋고…….”

그렇게 이창훈이 자랑을 이어 갈 때, 인한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예전에 쓰던 갑옷이 킹 보어한테서 얻은 거였지.”

“예?”

“찢어져서 버렸지만.”

“혀, 형님, 설마 그거 드롭템……?”

“응.”

이창훈이 경악했다.

‘이 인간은…… 운까지 좋은 건가……! 거기다 버렸다니?’

인한이 운이 좋기보다는, 시작하는 자의 효과가 좋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 리가 없는 이창훈은 그저 불공평한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인한은 그런 이창훈을 보며 피식 웃었다.

“빨리 가기나 하자.”

“예…… 아,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 11층 마을이 만들어지긴 했다던데, 그리로 가십니까?”

인한은 고개를 저었다.

“10층으로 간다.”

“10층이요?”

“나도 장비 하나 뽑아야지. 가는 김에 너도 얻을 수 있다면 좋을 테고.”

“예?”

인한은 말없이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인데요? 장비를 뽑다뇨?”

이창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인한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인한이 이창훈과 함께 10층 땅의 돌에 모습을 드러냈다.

“1층에서 10층까지 한 번에 올라오긴 처음인데…… 이거 한참 걸리네요.”

땅의 돌은 이동하려는 층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동을 위한 문을 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거기다 먼저 이동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기다려 주는 게 불문율이기 때문에, 둘이 1층에서 10층의 땅의 돌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 데는 총 2시간이 걸렸다.

‘확실히 지겹긴 하군. 아직 마을이 늘어나려면 한참 멀었으니.’

인한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땅의 돌은 필드에도 여러 개 존재했다.

미래에 땅의 돌의 숫자가 늘어나면 적어도 기다리는 시간은 덜 수 있을 것이었다.

“엇! 당신은!”

그때, 뒤쪽에서 인한을 향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한과 이창훈이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십니까?”

“최인한! 최인한 맞으시죠! 10층을 클리어한 공략자!”

인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설마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벌써부터 생길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뭐? 최인한? 그 10층 클리어한 공략자?”

“자이언트 아니야?”

“클라우스 두들겨 팼다며?”

“어디? 누구?”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이창훈이 눈을 껌뻑이며 인한을 바라보았다.

“형님?”

“넌 어서 곱린이랑 리자 챙겨 가라. 마력 흘리고 있으면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적당히 빠져 있어.”

“예엡.”

이창훈이 허겁지겁 마을 밖을 향해 뛰어갔다.

“저기요, 아저씨…… 그 영웅 맞죠?”

인한은 대꾸하지 않고 땅을 박찼다.

“저, 잠시만 기다려…… 어, 어어?”

“최인한이다!”

“최인한? 영웅? 그가 여기에 있다고?”

“어디! 어디야!”

사람들이 순식간에 인한을 따라오기 시작했다.

인간의 능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신체 능력을 가진 헌터들, 그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10층의 공략자들이 인한을 맹렬히 추격했다.

‘데자뷰가 느껴지는데…….’

그런데 이 상황이 익숙한 이유는 왜일까.

“잠깐! 사인해 주세요!”

“멈춰 주세요!”

“팬입니다! 존경합니다!”

“영웅! 영웅이다!”

인한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면전에다 대고 저런 낯 뜨거운 말들을 내뱉다니!

그런데 그 환호들 가운데 짜증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쳇! 거기 서라! 최인한!”

“멈춰라!”

이쯤 되면 팬이라기보다는 스토커였다.

인한은 재빨리 손끝에 오러를 모아 얼굴을 훑어 내렸다.

우웅!

마력이 얼굴의 표면을 감쌌다.

그와 함께 인한은 옆으로 몸을 획 꺾어 뒤쫓던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 다음, 입고 있던 겉옷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허억, 허억! 으응? 어디있지? 분명 이쪽으로 달아났는데?”

“어이! 너! 이쪽으로 최인한이 지나가는 거 봤어?”

인한을 쫓아오던 헌터들이 숨을 헐떡이며 인한에게 물었다.

인한은 상큼하게 웃으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쳇! 그것도 못 보고 뭐 한 거야?”

헌터들이 획 몸을 돌려 뛰어가기 시작했다.

인한은 조소를 흘렸다.

‘오러를 이런 데 쓰게 되다니.’

오러를 이용한 잡기(雜技) 중 하나였다.

변장이나 얼굴 골격을 변화시키는 기술은 아니고, 오러로 상대의 인식을 틀어 버리는 기술이었다.

도망치려면 칠 수 있었지만, 굳이 힘 빼기 싫어 저들을 따돌리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어디야! 어디 있냐고!”

“최인한! 순순히 나와라!”

마을 여기저기서 그런 뒤숭숭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허 참.’

인한은 허탈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팔자에도 없는 인기인이 되어 버렸다. 그것도 전 세계적으로.

하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어색할 뿐이지, 오히려 기분은 좋았다.

인한은 엷은 미소를 지은 채, 천천히 마을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10층 보스존.

천천히 이동한 인한과 이창훈은 보스존까지 오는 데 나흘의 시간이 걸렸다.

“으, 여길 왜 또 오는 건지.”

이창훈은 몸을 부르르 떨며 거대한 철문을 바라보았다.

-키엑!

-쉬익!

보스존 안에 들어간 적 없는 곱린이와 리자는 당장이라도 전투를 벌일 수 있겠다는 듯이 각자의 무기를 하늘 높이 치켜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또 공략하시게요?”

“어, 그럴 필요가 있어.”

“아, 옙. 고생하십시오. 제가 마음 같아선 도와 드리고 싶…….”

“잘 하고 와.”

“……예?”

이창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인한의 말의 의미를 깨달은 탓이다.

“수고하고.”

“……예?”

끼이이익!

인한이 문을 열었다.

벙쪄 있는 이창훈의 등을 뻥 걷어차, 보스존으로 밀어 넣은 인한이 싱긋 웃었다.

“수고해. 아, 참고로 공략법은 가르쳐 준 대로만 하면 된다. 클리어 못하고 나오면…… 뭐, 알아서 하고.”

-킥! 키익!

-쉬이익!

곱린이와 리자는 당당한 걸음걸이로 보스존으로 들어섰다.

천천히 문이 닫히고, 이창훈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크르르르르!

핏빛의 늑대가 인한을 보며 이를 드러냈다.

이창훈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예?”

결국 공략은 성공했다.

만신창이가 된 이창훈은 비틀거리며 문밖으로 걸어 나왔다.

“허억, 허억.”

땅바닥에 쓰러진 이창훈의 뒤로 곱린이와 리자가 마찬가지로 만신창이가 된 채 기어 왔다.

인한은 쓰러져 있는 이창훈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말했다.

“두 시간 걸렸군. 생각보다 오래 걸렸잖아. 조금 더 노력했어야지.”

“으으…….”

이창훈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 악마 같은 새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아무리 공략법이 있고, 공략을 위한 물품도 받았다고 하지만, 블러드 울프에게 접근하려면 녀석의 분열체와 본체의 공격을 피해야 했다.

‘그렇게 빌었는데 다시 집어넣어?!’

거기다 도망쳐 나올 수도 없었다.

몇 번 도망쳐 나왔는데, 인한이 문 앞에서 싱긋 웃으며 버티고 서 있었다.

울면서 빌어 보았지만, 인한은 다시 이창훈을 걷어차 보스존으로 밀어 넣었다.

덕분에, 결국 성공은 했다.

레벨도 오르고, 스테이터스도 올랐으며, 스킬 숙련도도 높아졌다.

하지만.

‘기쁘지 않아!’

이창훈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인한을 바라보았다.

속으로, 저 뚝배기를 닮은 뒤통수를 꼭 깨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뭐냐? 그 눈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창훈은 그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잠재울 뿐이었다.

“끄, 끄으으…….”

레벨 업 덕에 체력과 마력이 회복된 걸 느끼며 이창훈은 비척비척 일어났다.

“……그런데 여긴 왜 클리어하라고 하신 겁니까?”

“일단 들어가자.”

인한이 아직 보스 몬스터가 부활하지 않은 보스존으로 들어갔다.

우우우!

아무것도 없는 넓은 공동엔 싸늘한 공기가 맴돌며 귀신 울음소리를 닮은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곳에서, 인한은 인벤토리에서 무한의 열쇠를 꺼냈다.

그리고 열쇠에 천천히 마력을 주입했다.

화아악!

밝은 빛이 터져 나가며, 인한과 이창훈의 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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