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공략자들 100화>
“야, 이 새끼들아!”
국정원 소속 검은 탑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팀이자, 불가살이 공격대의 본거지이기도 한 사무실에서, 팀장이 외쳤다.
“그 새끼, 이제 건들지도 못하게 됐잖아!”
“…….”
일렬로 도열한 직원들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최인한? 그냥 별것도 아닌 놈이라고 그렇게 자신 있어 했으면서! 10층을 클리어하도록 내버려 뒀단 말이야? 그놈 넘어뜨리려고 그 많은 기획서에 내가 사인까지 다 박아 놨구만! 내가 국장님한테 호언장담하고 왔는데! 이 새끼들아!”
“크윽!”
빠각!
또다시 시작된 조인트에 요원들이 정강이를 끌어안고 팔짝팔짝 뛰었다.
“어쩔 거냐고!”
팀장의 외침에 요원들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하얀 마스크…… 아니, 자이언트 그 개새끼.’
이제는 하얀 마스크보다 자이언트로 불리게 된 사내, 최인한.
그는 7층에서 국정원 요원들을 모조리 뿌리친 후에 잠적했다가, 돌연 2개월 남짓한 시간에 몇 년 동안 공략되지 않았던 10층을 클리어해 버렸다.
덕분에 귀찮아진 건 국정원 요원들이었다.
무력으로 실패했다고 그들이 손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력이 아닌 부분이 그들의 본격적인 무대다.
아무리 인한이 강하다지만, 그래 봤자 한국인이고, 백 하나 없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한국에 있는 한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았다.
‘그런데 그놈의 이름이 확 올라가면서 그것도 못하게 됐다는 거지.’
몇 가지 작전을 실행하려는 순간, 일이 터져 버렸다.
언론에 몇 가지 정보도 흘리고, 몇몇 인기 있는 의원들도 끌어들여서 물타기를 해 볼까 했는데, 그것마저 인한의 명성이 높아지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어차피 그놈, 무소속인 게 확실하다. 빨리 회유할 방법을 찾아봐. 굳이 우호적으로 대할 필요 없어. 방법은 많잖아!”
팀장이 버럭 소리치며 조인트를 까려고 다시 발을 뒤로 확 당겼을 때였다.
벌컥!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아직 20대의 풋풋함이 보이는 청년이 허겁지겁 들어왔다.
“팀장님!”
“너도 인마, 여기 딱 서!”
“허억! 허억! 자, 잠깐만 기다려 주십쇼.”
청년이 손을 휘휘 저으며 숨을 골랐다.
이제 막 연수 끝나고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놈이었다.
1세대 헌터인 데다 8층까지 도달한 신입이라 불가사리 내에서도 기대를 많이 받고 있는 그가 저렇게까지 할 정도로 급한 일이라니.
‘그러고 보니, 저놈 최인한 건으로 외근 나갔던 것 같은데……?’
팀장이 묘한 표정으로 신입에게 물었다.
“너, 설마…….”
“예! 팀장님! 찾았습니다!”
“진짜?”
“예! 녀석의 가족이 아직 살아 있습니다! 좀 위중한 상태이긴 하지만, 놈의 동생을 찾았습니다!”
“……!”
팀장의 눈이 빛났다.
* * *
“아버지라면…… 오성 그룹 회장님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메뉴와 함께 나온 레드 와인을 소주 마시듯 원샷한 이소영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저희 쪽이랑 몇 번 거래하셨죠?”
“예, 부산물 처리는 아무래도 오성이 좋을 것 같아서요.”
“인한 씨 정보가 저희 쪽에 있었는데…… 저랑 만나고 있는 게 아버지 귀에 들어간 모양이에요. 그래서 꼭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하셔서…….”
“무슨 일로 부르시는 겁니까?”
“그냥 저한테 말씀해 주신 내용은 계약이나 뭐 이런 것들인데…… 다른 생각이 있으신 것 같기도 하고…….”
인한은 먹는 것도 잊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성 그룹 회장이라.’
인한의 기억 속 오성 그룹 회장은 몇 번 구설수에 오르긴 했지만, 나름 평이 좋았던 편이었다.
검은 탑 관련한 사업의 선구자인 부분이야 말할 것도 없고, 위험 지역의 범위를 줄이기 위해 많은 기부금을 내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몬스터 웨이브 피해자와 국가 유공자를 위해 재단을 설립하기도 했었다.
아쉽게도 손자들이 몇 번 사고를 쳐서 브랜드 이미지가 자주 깎였었지만.
“으음. 저기요, 인한 씨.”
이소영이 인한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별로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하셔도 돼요. 제가 아버지한테 잘…….”
“아뇨, 괜찮습니다.”
“네?”
“만나 뵙겠습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이소영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떴다.
“의외네요. 인한 씨는 거절할 줄 알았는데.”
“그냥…… 궁금해서요.”
궁금한 이유만은 아니다.
거래를 할지도 몰랐다.
인한이 가진 지식과, 그가 가진 재력.
‘길드를 만드는 초석이 될지도 몰라.’
언젠간 길드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사람이 모이면 돈은 필요한 법이다.
오성 그룹에 얽매이지만 않을 수 있다면, 좋은 거래 상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뭐, 나도 이제 이름값 좀 높아졌으니.’
누가 뭐래도 인한은 지금 ‘세계를 구한 영웅님’이다.
인한이 피식 웃었다.
이소영은 눈을 껌뻑이며 인한을 바라보았다.
* * *
오성 그룹의 회장과의 약속은 이틀 뒤 저녁으로 정해졌다.
그동안 인한은 집에서 트리아스 액셀의 연마를 계속했다.
트리아스 액셀을 수련하면 수련할수록, 이 기술의 위대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만큼 의문도 들었다.
트리아스 액셀은 왜 자신에게 나타났는가.
‘묘한 기분이군.’
인한은 수련을 거듭하면서 정체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익숙함’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 이미 이걸 익힌 적이 있다.’
마치 어른이 되고 나서 중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내용을 복습하는 것처럼, 잊고 있었던 것을 되짚으며 금세 감을 되찾아갔다.
거기다 이 생각은 막연한 짐작이 아니라 실질적인 증거도 있었다.
[트리아스 액셀]
[등급 : EX]
[숙련도 : Lv.3]
트리아스 액셀은 과거에는 소문으로만 존재했던 스페셜 원, EX등급이었다.
그것도 왕의 권세처럼 정체도 알 수 없는 스킬이 아니라, 인한이 실질적으로 다룰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는 액티브 스킬이었다.
그런데, EX등급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숙련도가 3레벨에 도달했다.
‘극체술도 1레벨 올리는 데 몇 개월이 걸리는데…….’
인한은 스킬창을 바라보며, 트리아스 액셀이 출현했을 때를 떠올렸다.
-멍청한 자식, 그게 아니란 말이다. 이쪽, 이걸 사용하란 말이야.
아공간 결계 속, 아발론에 대한 기억과 함께 떠오른 기억들 중 하나.
마력과 속성력을 엮는 노하우와 미드 코어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준 이의 말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몸이 자연스레 움직였고, 인한의 눈앞에 트리아스 액셀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한은 한동안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릿속에 있는 기억들을 떠올리기 위해 집중했다.
하지만 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인한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지금은 수련이나 하자.”
인한은 언더 코어의 마력을 미드 코어로 끌어 올렸다.
미드 코어에 회전 중인 마력구가 맹렬한 속도로 힘을 발생시켰다.
그리고 인한은 손을 쭉 뻗어, 위에서 아래로 그어 내렸다.
“중압.”
쿠웅!
일전에 블러드리드를 제압한 기술 중 하나가 펼쳐졌다.
까각!
떨어지는 무거운 압력에, 소나무 옆에 있던 조경석 하나의 표면에 기다란 금이 그어졌다.
인한이 이어서 말했다.
“역전.”
그러자 위에서 가해지던 압력이 반대로 바뀌었다.
조경석이 마치 밑에서 폭약이라도 터진 것처럼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분쇄.”
그리고 조경석이 허공을 향해 20미터 정도 떠올랐을 때쯤, 인한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우우웅! 파삭!
한동안 부들부들 떨리던 조경석에 한순간 수많은 금이 그어지더니, 이내 바스러져 정원에 후두둑 떨어졌다.
인한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후우, 처음 해 보는 짓이라 그런지 엄청 힘드네.”
인한은 체내의 마력이 텅텅 빈 것을 느끼며 씁쓸하게 웃었다.
인한이 펼친 것은 다름 아닌 트리아스 액셀에 속한 미드 코어의 운용법이다.
언더 코어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킨다면, 미드 코어는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변화시켰다.
그 덕분에 누가 보면 마법으로 오해할 만한 것들을 인한은 해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마법은 아니야.’
마법은 자신의 마력을 사용해 마나를 변화시켜 사용하는 힘이다.
때문에 더운 곳에서도 얼음을 쓸 수 있고, 무풍지대에서 바람이 불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트리아스 액셀로 사용되는 힘은 세상의 이치를 자신의 목적에 따라 다루는 힘이었다.
즉, 이미 사방에 존재하는 힘을 다루는 것이다.
중력, 풍압, 관성, 그리고 마력까지.
이미 이 세상에 작용하고 있는 수많은 힘을 통제하에 둔다.
설명만 들으면 그야말로 신과 같은 능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마력 소모가 극심해.’
사기적인 능력엔 그만큼의 페널티가 붙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얼마 전에 1천 포인트를 넘어선 인한의 마력 스테이터스가 고작 서너 번 힘을 사용하면 텅 비어 버렸다.
하지만 충분히 개선의 여지는 있었다.
인한은 마력을 다시 흡수하고, 끊임없이 연마해 갔다.
시간은 확실하게 인한에게 보답해 줬다.
인한이 수련을 하는 만큼 스킬의 숙련도는 빠른 속도로 상승했다.
그렇게 강해지면서도, 인한은 한편으로 불길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라도 일어날 것만 같아.’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좋은 일이 겹치니 오히려 불안했다.
거기다 인한이 전생을 통해 알게 된 삶의 지혜 중 하나는, 언제나 이 세상은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성장은 좋지만, 그 뒤에 따라올 것의 무게가 인한을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고작 10층에서 블러드리드가 등장한 것은, 어쩌면 어떤 방아쇠였던 것은 아닐까?
‘그럴 리가 없지.’
인한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강해진 건 좋은 일이다.
기연이 찾아와 빠르게 성장하게 되어 불길한 마음이 드는 모양이었다.
* * *
검은 탑 11층.
조악한 마을이 생성된 이곳엔, 아직 안정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10층 공략을 위해 뭉쳤었던 연합은 11층에 올라선 직후도 해체하지 않고, 11층의 마을이 생성되기 전까지 힘을 합치기로 했다.
일단 11층의 땅의 돌은 활성화가 되긴 했지만, 마을이 제구실을 하려면 어느 정도 넓어야 했다.
그리고 크기를 넓히려면 주변 지역의 몬스터를 토벌한 후, 다시 땅의 갱신시키면 됐다.
하지만 역시 아무런 정보가 알려지지 않은 필드를 거닐며 몬스터를 토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연합의 헌터들은 천천히 탐색하듯 11층을 공략해 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11층 땅의 돌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
그곳에서 달의 검 팀이 나아가고 있었다.
“흐음, 생각보다 약하네.”
유찬웅이 어깨에 검을 걸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의 밑에는 드레드 래빗이라는 대형견 크기의 검은색 토끼 몬스터의 시체가 있었다.
“그러게요. 저희가 10층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었나 봐요.”
“그런가?”
10층에서 오랜 시간 정체되었던 탓일까.
많은 헌터들이 10층의 보스존을 뚫고자, 막연히 레벨을 올리기 위해 던전을 돌면서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해졌다.
그 때문인지 11층의 필드는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휴식! 15분 뒤에 다음 장소로 이동하자!”
“예에!”
경계를 설 팀원들만 따로 자리에서 일어서고, 나머지 헌터들은 땅바닥에 털썩 앉아 물이나 간식 등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유찬웅은 잠시 팀원들을 살펴보다, 한쪽에 말없이 서 있는 하영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뭐야. 왜 궁상 떨고 있어.”
“아, 오빠.”
하영이 유찬웅을 힐끗 바라 보았다.
“아냐, 그냥 좀.”
“그 사람 생각이냐?”
“……응.”
하영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오빠, 만약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날 보면서 복잡한 눈빛을 보내면, 그게 뭘까?”
“어? 뭐야, 너 그거 모르냐? 그거잖아, 그거.”
“그게 뭔데?”
“첫눈에 반한 거, 이 계집애야. 아니, 얘가 뭐가 좋다고! 하, 참. 눈도 낮지.”
유찬웅이 평소처럼 농담을 던졌지만, 하영은 그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런 종류가 아니었어.”
“크흠, 야, 사람 무안하게……. 으음…… 아는 사람 중에 너랑 비슷한 사람이 있는 거 아니야?”
“응?”
하영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야기였다.
‘그럼 그건 뭐였지?’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목소리.
인한은 두 번뿐이 만나지 못한 사이인데 정확히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구하러 와 줬다.
“모르겠어.”
하영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신을 구하고, 치료까지 해 줬으면서, 왜 인한은 자신이 깨어나기 전에 떠난 걸까.
아무리 당시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지만, 남아서 상황을 바꿀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안 그래도 철환이가 갑자기 나가서 머리 아픈데 너까지 그러지 마라.”
유찬웅이 손을 휘휘 저으며 떠나갔다.
이틀 전, 11층에 도착한 박철환은 돌연 팀을 탈퇴했다.
막을 구실이 없어서 일단 내버려 두기는 했는데, 가족같이 지냈던 팀원 하나가 떠난 건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기는 했다.
“자, 자! 이제 출발하자!”
유찬웅이 큰 소리로 외쳤다.
하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11층의 하늘은 우중충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