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공략자들 99화>
인한이 본 건 과거였다.
그저 몇 십 년의 단위가 아니라, 아주 머나먼 과거였다.
길어 봤자 백 년 남짓 사는 인간에게는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기나긴 시간이었다.
그 시간에, 인한은 아발론에 있었다.
아발론에 존재하는 공기의 냄새, 풀의 촉감, 하늘의 색까지 인한은 모든 걸 기억했다.
‘내가 회귀한 건 고작 20년 정도의 시간이 아니었어.’
위험에 처한 인한은 검은 탑을 오르기 직전으로 회귀한 것이 아니었다.
인한이 회귀한 것은 훨씬 더 이전이었다.
그것도 백 년, 이백 년 정도의 시간이 아니다.
까마득한 과거의 아발론을, 분명 인한은 알았다.
-넌 오래전 나와 마주친 적이 있지 않은가?
악마의 왕, 리시피르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때는 무시하고 넘긴 이야기였는데, 그래도 되는 종류의 얘기가 아니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하지만 역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발론에 대한 기억의 편린들도, 마치 원래 있는 것에서 부스러기 몇 개가 떨어져 내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 말은 즉, 아직 인한의 머릿속에는 아발론에 대한 커다란 기억이 숨겨져 있다는 뜻이었다.
‘믿을 수 없군, 이걸 받아들이는 내가.’
가장 의아한 건, 이런 이야기들을 인한이 은연중에 자연스럽게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인한은 이 기억에 대해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게 아니라 의문을 품었다.
어째서 머나먼 과거의 아발론에 자신이 있었는가.
왜 기억을 잃은 것인가.
그리고 왜…… 짙은 향수를 느끼는 것일까.
확실한 것은, 인한의 기억을 누군가가 봉인해 놨다는 사실이었다.
아마, 그 누군가는 인한을 과거로 회귀시키고 왕의 권세라는 스킬을 줬으며, 인한에게 커다란 안배를 해 둔 것이리라.
‘막연하군.’
인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해야 할 일의 스케일이 순식간에 커진 기분이었다.
‘그건 그렇고…….’
인한은 눈을 뜨고 허공에 상태창을 띄웠다.
[트리아스 액셀]
인한이 복잡한 눈으로 스킬창에 떠오른 스킬을 바라보았다.
트리아스 액셀.
마나 스킬…… 이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는, 온갖 기술이란 기술은 죄다 짬뽕시킨 것만 같은 기술이었다.
트리아스 액셀은 강건한 육체를 베이스로 깔고, 그 위에 마력이라는 뼈대를 세운다. 그리고 마력의 뼈대를 연결하는 나사로는 속성력, 즉 정령술이 들어간다.
마법계 스킬도 아니고, 무투계 스킬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령술계 스킬도 아닌, 정체 모를 괴이한 스킬이었다.
‘미드 코어가 생성된 이유는 이거였나?’
트리아스 액셀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마력원을 여러 개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트리아스라는 말은 어떤 언어인지 알 수 없지만, 삼위일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언더, 미드, 탑 코어의 세 가지 마력원을 합일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 기술에 트리아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근원은 언더 코어, 그리고 마력을 통한 응용은 미드 코어가 맡고 있다는 것은 이해했다.
하지만 마지막, 탑 코어는…… 인한도 알 수 없었다.
‘옛날에 들었으면 개소리라고 했을 텐데 말이지.’
인간은 무조건적으로 하나의 마력원만 다룰 수 있다.
이건 정설이었고, 실제로 그래 왔다.
그런데 인한은 얼마 전부터 미드 코어를 다루기 시작했다.
거기다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어 본 적도 없었던 탑 코어까지 등장했다.
아직 인한은 탑 코어를 열지 못했지만, 스킬의 지식이 들어오며 그 존재에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트리아스 액셀은 세 마나 코어를 다루는 것을 기본에 깔고 가는 기술이다.’
트리아스 액셀이 있다고 극체술이나 정령술을 포기할 수 있는 게 아닌 이유가 이래서였다.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지만, 트리아스 액셀은 각기 다른 힘을 합치게 해주는 촉매제와 같았다.
한마디로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는 기술이었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강해지긴 했군. 그것도 비약적으로.’
더 상위 기술에 대한 개념을 깨달았기 때문인지, 시간을 조금 들여 개방하려 했던 마나 스킬 4단계의 문이 활짝 열렸다.
급하게 열렸다고 불안정한 것도 아니었다.
이제 인한은 이기(理氣)라 불렸던 단계, 완연한 마나 스킬 4단계의 경지에 도달했다.
마력 운용에 있어서는, 과거의 인한이 도달한 경지를 아득히 상회할 정도였다.
계속 알아 가던, 새롭게 생긴 마력로의 운용법과 미드 코어의 활용법에 대한 것도 월등히 많이 알게 됐다.
만약 과거의 인한과 맞부딪친다고 가정해 봐도, 인한은 절대 질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야.’
리시피르가 보였던, 이야기로만 들었던 7단계와 8단계.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이제 길이 보인다.
아니, 어쩌면 더 높이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트리아스 액셀이 인한에게 압도적인 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지금이야 모르겠지만.’
적어도, 인한은 자신의 힘이 비약적으로 강해진 건 확실했다.
인한은 숨을 훅 내쉬고, 극체술을 운용했다.
정령술이 그에 호응하며 천천히 바람과 불을 피워 올렸다.
그렇게 인한은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갔다.
* * *
전화를 받은 건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 먹으며 쉬고 있을 때였다.
-야! 최인한!
이주호였다.
대충 전화한 이유를 안 인한이 멋쩍게 웃었다.
“그래.”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냐!?
“한동안 기자들에 시달렸다, 인마. 누구야? 내 번호 가르쳐 준 놈?”
현재 인한은 영웅 취급을 받고 있었다.
아니, 사실 무려 3차 몬스터 웨이브를 막은 진짜 영웅이었다.
그것도 디데이가 며칠 남지도 않았을 때, 많은 사람들이 절망감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에 인한이 위험 요소를 없애 버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인한을 찾아다녔다.
인한이야 굳이 그런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 자신을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잊고서 안 들어간 지 한참 된 인한의 SNS를 통해 인한의 얼굴이 알려졌다.
거기다 인한의 번호는 아는 사람이 채 서른 명이 넘질 않는데, 본 적도 없는 번호에서 연락이 미친 듯이 왔다.
-그보다, 실화냐? 너야?
“그래, 나인 것 같다.”
-와…… 지린다.
이주호가 탄성을 내질렀다.
-야, 근데 너 왜 뉴스는 안 나오냐!
“그런 거 싫다. 귀찮아.”
-와, 이 배부른 새끼!
인한은 미소를 지었다.
이래서 이주호가 좋았다.
명색이 친구가 세계를 구한 영웅이라는데 하는 짓은 똑같다는 점이 그다웠다.
인한과 이주호는 한동안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던 중 이주호가 갑자기 조심스레 물어 왔다.
-아, 그러고 보니까…… 있잖아…… 에이, 궁금해서 그러는데 나한테만 얘기해 주라.
“뭘?”
-현수랑…… 무슨 일 있었냐?
“…….”
인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건드려서, 밟아 줬다. 그뿐이야.”
-크흠, 그렇구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래, 알았다. 언제 한 번 술이나 한잔하자. 꼭이다! 유명해졌다고 튕기면 재미없을 줄 알아!
“그래.”
인한이 피식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이왕 스마트폰을 손에 쥔 김에, 인한은 연락 온 것들을 다 훑어보았다.
대부분이 모르는 번호에게 온 문자 메시지나 부재중 통화였다.
‘응?’
그러던 중에 인한의 눈에 익숙한 번호가 들어왔다.
이소영이었다.
[인한 씨, 뭐 해요?]
이건 인한이 탑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와, 연락 씹는 거예요? 선물도 줬는데…… 너무하네요. 선물 써 보고 고맙다고 인사도 못하나?]
[인한 씨, 바빠요?]
[인한 씨, 무슨 일 있어요? 아, 혹시 탑에 들어가신 건가요?]
그리고 그 연락을 끝으로,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다시 어느 시점에 온 문자.
[인한 씨, 혹시 저 부담스러운 거예요? 연락 안 했으면 하나요?]
[뭐야! 당신 차단했지! 차단한 거 맞지! 날 왜 차단하는 건데! 내가 그렇게 귀찮게 했어?!]
거기서부터 인한은 알 수 없는 오한에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 문자는 이랬다.
[민헌 시 10츠ㅇ 크ㄹㅣ어 한 거 진자앵ㅛ?]
상당히 다급하게 쳤는지 오탈자가 아주 엄청났다.
해석할 것도 없이, 바로 밑에 제대로 된 문자가 와 있었다.
[오타에요! 인한 씨, 10층 클리어한 거 진짜에요? 저거 인한 씨죠! 대답해요!]
인한은 피식 미소를 짓고 번호를 눌렀다.
한동안 수신음이 가고.
-인한 씨!
귀가 찢어질 정도로 커다란 외침을 들었다.
* * *
이소영과 만난 건 오성 그룹 산하의 산업체 중 하나인 고려 호텔의 레스토랑이었다.
처음 와 보는 고급 레스토랑이어서 인한은 조금 어색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인한이 들어서자, 중년의 차분한 인상을 가진 남성이 인한의 앞에 섰다.
“최인한 님, 맞으십니까?”
뭐라고 말도 안 했는데 남성이 인한을 알아봤다.
이런 레스토랑은 예악한 손님 얼굴까지 아는 걸까. 아니면 이소영이 무슨 조치를 취한 것일지도 몰랐다.
“아, 네. 맞습니다.”
“이쪽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바닥은 부드럽고, 분위기는 조용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는 따뜻한 빛을 주위에 흘려 댔다.
‘저거 진짜 크리스탈인가?’
인한은 샹들리에를 보며 그런 부질없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인한의 자리는 레스토랑 안쪽에 있는 룸이었다.
창문 너머로는 멋들어진 서울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인한이 테이블에 앉자 중년 남성이 차를 내 왔다.
‘음.’
아무래도 이런 곳에서 나오는 차는 비싸고 고급스러울 텐데, 솔직히 인한의 입에는 나뭇잎 맛처럼 느껴졌다.
그러기를 한 5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또각! 또각!
유난히 빠른 구두 소리가 들리고, 곧 문이 벌컥 열렸다.
“소영 씨, 오랜만이에요.”
이소영이 인한의 인사에 싱긋 웃으며 말했다.
“네! 아.주. 오.랜.만.이.네,요. 인.한. 씨?”
조금 노출이 있는 붉은색 드레스 차림에 화려한 화장을 한 이소영의 모습은 충분하다 못해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힘을 줘 가며 말하는 이소영을 보며, 인한은 오한을 느꼈다.
“하, 하하…….”
인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소영 씨. 오늘 정말 예쁘게 꾸미고 오셨네요, 하하.”
“……솔직히 기분은 좋지만, 쫄아 있는 거 굉장히 티 나거든요.”
“크흠.”
이소영이 의자를 끌어당겨 털썩 앉았다.
“하아…… 뭐, 그래도 인정. 덕분에 몬스터 웨이브가 안 일어난 거니까요.”
그때, 인한을 안내했던 중년의 웨이터가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는군요, 아가씨.”
“안녕하세요?”
“그렇게 계속 직원들이 쓰는 뒷문으로 다니시면 안 좋은 소문이 돌 수도 있습니다.”
“흠흠! 혹시나 알아보는 사람 있으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그랬어요. 안 그래도 도망 나온 건데 아빠 귀에 들어가면 귀찮아져서.”
뒷문? 도망? 아빠?
대체 이소영은 뭘 하다 온 걸까.
“그래도 고마워요. 난리 법석 안 떨어 줘서. 난 그냥 조용히 있다 갈 거니까……. 아, 주문은 전화로 얘기했던 대로 부탁해요. 저, 파티에서 많이 먹고 와서.”
“알겠습니다.”
중년의 웨이터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자 이소영이 마치 실 끊긴 인형처럼 한숨을 푹 내쉬며 테이블에 축 늘어졌다.
“하아, 오늘 정말 피곤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냥 아버지한테 붙잡혔어요. 연례행사로 이쯤에 하는 게 있는데…… 너무 많은 건 비밀이고요. 하여튼 거기서 도망 나오느라…… 꼴도 이러네요.”
이소영이 자신의 드레스를 보라는 듯 팔을 양옆으로 벌렸다.
인한도 남자인지라 저도 모르게 노출된 부위로 시선이 갔지만, 애써 대꾸했다.
“왜요, 예쁘신데요.”
“흠흠, 알아요. 나 예쁜 건.”
이소영이 식탁보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곧 음식이 나왔다.
인한은 태어나서 먹는 첫 코스 요리였다.
그런데 먹는 데 무슨 도구가 그렇게 많은지, 이소영이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 손으로 먹을 뻔했다.
“그런데 웬일로 이런 데서 보자고 한 겁니까?”
이소영이 만나자고 한 두 번은 전부 국밥집에 곱창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최고급 호텔 레스토랑이라니.
의아한 인한의 표정에, 이소영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 차림으로 곱창집 갈까요?”
“나중에 만나도 괜찮았습니다.”
“그, 그냥 오늘 만나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피곤하셨다면서요.”
“아, 정말 엄청 뭐라고 하시네!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요?”
이소영이 맹렬한 기세로 스테이크를 썰었다.
그러다.
쨍!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그릇이 깨져 버렸다.
이소영이 멍하니 깨진 그릇과 스테이크를 내려다보았다.
그럴 만했다.
힘 스테이터스가 100은 월등히 넘을 텐데 그걸로 고기를 썰어 댔으니.
“괜찮으세요?”
“아, 아, 그…….”
곧 아까 전의 중년 웨이터가 와서 그릇과 음식을 치워 가고, 새로운 음식을 가져왔다.
“죄송해요…….”
이소영이 풀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야말로 너무 놀려서 죄송해요. 그보다 오늘은 어쩐 일로 부르신 겁니까?”
“저번부터 말한 건데. 제가 뭐, 무슨 일이 있어야만 만나자고 해야 하나요?”
옹알이하듯이 자그마한 이소영의 말을 인한이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예?”
“아니에요!”
이소영이 다시 나이프에 힘을 넣었다.
끼긱!
그릇이 다시 비명을 질렀지만 다행히 이번엔 깨지지는 않았다.
“뭐, 사실…… 용건이 있긴 했어요. 아이 씨, 아빠는 뭘 이런 걸…….”
“네?”
“인한 씨…… 혹시 저희 아버지 한번 만나 보지 않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