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공략자들 97화>
-네놈은 누구냐!
살의에 불타는 눈으로 인한이 블러드리드를 노려보았다.
“블러드리드가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블러드리드.
그것은 몬스터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고도의 지능, 높은 마법과 물리 공격 면역, 높은 마력 친화도까지 겸비한, 까다로운 몬스터 종족의 이름이었다.
자신들을 피의 군주라 칭하는 그들은 보통은 탑의 중층과 상층 구간에 분포했다.
그런데 대체 왜, 겨우 10층인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하긴, 상관없는 일이야.”
위이이이잉!
흐릿한 안개와 같이 퍼지던 안개가 확연히 타오르며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마력의 정화.
오러가 피어올랐다.
-큭!
형세가 안 좋다고 판단한 것일까.
블러드리드가 한순간, 지면을 박찼다.
-힘이 필요하다. 미개한 것들! 네 녀석들의 피를 내놔라!
그러고서 블러드리드가 향한 곳은 인한이 아니라 쓰러져 있는 공략자들 쪽이었다.
그때, 인한이 블러드리드를 향해 손을 뻗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중압.”
콰아아앙!
블러드리드의 몸이 날아가다 말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크아아아악!
블러드리드에게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단순 추락이 아니었다.
블러드리드를 중심으로 지면에서 실금이 쩍쩍 그어졌고, 마치 무거운 무언가에 짓눌리듯 블러드리드의 몸이 일그러졌다.
-크아아악! 이따위 것!
블러드리드가 힘겹게 일어서더니 혈액을 방사했다.
가시 모양으로 사방에 쏘아진 혈액에 블러드리드를 짓누르던 의문의 힘이 사라졌다.
-미개한 인간 주제에!
블러드리드가 노성을 토해 내며 인한에게 달려들었다.
“위험합니다!”
뒤에 있던 하영이 다급하게 외쳤다.
공략자이자 랭커인 하영의 눈에도 잔상만이 보일 정도로 빠른 습격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한은 말없이 주먹을 휘두를 뿐이었다.
콰앙!
오러가 터져 나가고, 블러드리드의 몸에서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미, 믿을 수 없다! 나의 몸을 어떻게?
놀랐기 때문인지, 충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블러드리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역시 갓 태어난 개체답군. 마력에 대한 방비도 없고.”
인한이 성큼성큼 블러드리드에게 걸어갔다.
-큭!
블러드리드도 결심을 한 것인지, 한쪽 팔의 형태를 기다란 날붙이처럼 변형시켰다.
콰앙! 콰앙! 콰앙!
둘이 부딪치며 다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하영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블러드리드는 무려 76레벨의 몬스터였다.
현재 랭킹 1위, 발터 에스키엘이 고작 레벨 50대 후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현재 헌터들 사이에서는 압도적인 존재였다.
그런데 블러드리드는 그보다 20레벨이나 높은 것이다. 여기 있는 헌터들을 절망시키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인한은 그런 존재와 대등하게…… 아니, 우위에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크아아아악!
블러드리드의 몸 일부가 부서져 내렸다. 떨어져 내리는 게 아니라, 모래 먼지처럼 변해 흩어졌다.
콰아앙!
인한의 공격이 작렬할 때마다 새하얀 기운이 나뭇가지와 같은 문양을 그리며 블러드리드의 혈액에 침투했다.
그 기운은 블러드리드의 몸의 근간을 무너뜨렸다.
-내 몸이이이이이! 카아아악! 네 이놈!
블러드리드가 발악하듯 눈을 빛냈다.
불길하게 빛나는 선홍색 빛에 인한의 눈이 꿈틀댔다.
“자폭?”
블러드리드가 까다로운 이유 중 하나였다.
놈들은 위험 상황에 도달했을 때, 자신의 남은 모든 힘을 폭발시켜 자폭을 행한다.
-크흐흐흐! 죽어라! 다 죽어 버려라!
블러드리드의 육신이 터질 듯 팽창했다.
인상을 찡그린 인한이 땅을 박찼다.
우웅!
어느새 블러드리드의 코앞까지 도달한 인한이 왼손을 블러드리드에게 가져다 대며, 오른손으로 활을 시위에 걸 듯 블러드리드의 몸을 길게 잡아당겼다.
-크하하핫! 이미 늦었다. 네놈들은 전멸이다! 그리고 네놈들이 흘린 피 속에서 나는 다시 부활할 것이다.
인한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우웅!
미드 코어에 생성된 마력구(魔力球)가 진동을 계속했다. 언더 코어에서부터 출발한 마력은 미친 듯이 마력로를 질주해 끌어당긴 손에 응집됐다.
“잘 가라.”
인한이 나지막한 말과 함께 꽉 움켜쥔 주먹을 휘둘렀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블러드리드의 몸이 새하얀 빛에 휩싸였다.
무시무시한 힘의 여파에 피어올랐던 모래 먼지는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수십 미터나 떨어져 있는 공략자들이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의 돌풍이 몰아쳤다.
“…….”
그리고 그 돌풍이 사라졌을 때, 짤막한 문장이 떠올랐다.
[제물의 의식이 실패했습니다.]
[@#$가 [email protected]#$.]
[치명적인 오류가 발견됐습니다.]
[오류를 복구합니다.]
[웨이브 3차…….]
[웨이브 4차…….]
[웨이브 5차…….]
[제물의 의식에서 살아남았습니다.]
[보상이 지급됩니다.]
[10층 보스존 ‘피의 공동’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최고 공로자 ‘최인한’에게 보상이 돌아갑니다.]
미친 듯이 떠오르는 천문에 신경 쓰는 공략자들은 없었다.
오직 한 사내.
새하얀 빛을 휘감은, 마치 구원자와 같은 신비한 존재감을 뿌려 대는 사내만이 그들의 눈에 들어와 있을 뿐이었다.
“하영 씨!”
그때, 인한의 귀에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하영이 기어코 정신을 잃고, 거친 숨을 내뱉고 있었다.
인한이 다급히 다가갔다.
“잠시만 비켜 주십시오.”
“다, 당신은?”
하영의 옆에 있던 여성 랭커는 하영을 끌어안으며 인한을 경계했다. 위험 속에서 자신들을 구한 사람임에도 혹시 모를 때를 조심하는 것이다.
기분 나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인한은 오히려 기꺼웠다.
‘좋은 사람들한테 둘러싸여 있구나.’
인한이 조용히 말했다.
“치료하려는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제야 여성이 하영을 끌어안은 손을 살짝 풀었다.
인한은 하영을 자신의 팔에 기대게 만들고 이마에 손을 얹었다.
우웅!
따뜻한 기운이 하영의 몸 안에 흘러들었다.
오러였다.
오래 전, 5층에서의 사건 때 세릴은 자신의 몸에만 치료의 효과를 적용했지만, 한번 오러를 각성해 본 인한은 타인에게도 사용할 줄 알았다.
“으, 으음…….”
오러가 흘러들수록 하영의 호흡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사실 이 방법은 상당한 마력이 소모되는 치료법이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인한이 아니었다.
“아…….”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하영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하영이 당장이라도 감길 것 같은 눈동자로 인한을 올려다보았다.
“인한 씨……? 인한 씨였어요……?”
잠결에 말하는 듯 흔들리는 어조였다.
그녀는 애써 고개를 흔들어 몽롱함을 떨쳐 내고는 인한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인한 씨는 도대체……?”
하영은 말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을 부르던 다급한 목소리를 기억한 탓이다.
-하영아!
그리고 그 뒤로 들려왔던, 다짐이라도 하는 듯한 말도 어렴풋이 기억한다.
“…….”
인한은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은 하지 않았다.
“인한 씨…… 혹시 저를 아세요?”
“아니에요, 저는 하영 씨를 모릅니다. 10층에서 처음 본 거예요.”
“아니, 아니에요. 인한 씨는 분명 저를…….”
그러나 하영은 말을 끝까지 하지 못했다.
인한의 마력이 하영을 잠으로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하영은 풀린 눈을 깜빡이면서도, 잠에 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대체…….”
인한은 천천히 하영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하영은 결국 잠에 빠져들었다.
인한은 하영의 머리를 한 번 쓸어내리고, 한동안 하영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한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인한이 뚜벅뚜벅 만신창이인 공략자들의 틈으로 들어갔다.
“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대체 당신은?”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서 벗어나 인한에게 말을 건네 왔다.
하지만 인한은 그 모든 말을 무시하고 오직 한 곳만을 향해 걸어갔다.
인한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클라우스의 앞이었다.
클라우스는, 어딘가 분노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인한에게 물었다.
“어떻게?”
많은 것들이 함축된 말이었다.
인한은 말없이 클라우스에게 다시 한 발자국 내딛었다.
그때.
“그 이상 가까이 다가가지 마십시오.”
이번에도 어김없이 허공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여성이 인한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인한이 여성에게 눈을 돌렸다.
“꺼져.”
카앙!
인한의 손이 휘둘러지고, 검이 힘없이 튕겨져 나가 지면에 박혔다.
그대로 쭉 뻗어진 인한의 손이 여성의 목을 움켜쥐었다.
“윽! 끄, 윽! 으윽!”
여성이 인한에게 목을 잡힌 채 발버둥 쳤다.
“자, 잠깐! 당신, 뭐 하시는 겁니까!”
옆에 있던 헌터가 깜짝 놀라 달려들었다.
하지만 인한은 여전히 살의에 타오르는 눈으로 클라우스를 노려보며 헌터에게 말했다.
“눈도 없나. 이 일을 벌인 게 누굴 거 같아?”
“예, 예?”
인한을 말리던 헌터가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인한을 보다가, 충격 받은 표정으로 클라우스를 쳐다보았다.
“끄으윽!”
인한은 굳어 버린 헌터에게는 아랑곳 않고 신음을 흘리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
살심이 일었지만, 동시에 하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인한은 혀를 차고는 여자를 땅에 내동댕이쳤다.
“운 좋은 줄 알아.”
“크헉! 크흐흑!”
숨을 몰아쉬는 여성을 뒤로한 채, 인한이 클라우스에게 다가갔다.
“어쩔 생각이지?”
“뭘?”
“이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날 죽이기라도 할 건가?”
클라우스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하지만 인한은 그런 클라우스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너는 그게 문제야.”
“뭐?”
“내가 못할 거라고 생각해?”
“……!”
콰앙!
기습적인 일격에 평소에 클라우스가 펼치고 있는 실드가 모조리 조각났다.
“고, 공간의…….”
파캉!
당황한 클라우스가 서둘러 마법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 마법은 채 펼쳐지기도 전에 무언가의 방해를 받아 깨져 버렸다.
퍼억!
클라우스의 몸이 인한의 공격에 힘없이 쓰러졌다.
인한은 다시 성큼성큼 다가가 클라우스의 멱살을 쥐어, 들어 올렸다.
“이 악 물어. 턱 나간다.”
인한이 싱긋 웃었다.
인한은 그렇게 한동안 무지막지하게 클라우스를 폭행했다.
그 탓에 몇 개의 치아가 허공을 날았고, 선혈이 땅바닥에 흩뿌려졌다.
“으, 크, 어어…….”
일부러 오래 때리려고 마력도 쓰지 않았다.
기절할까 봐 인한은 마력으로 클라우스에게 각성 상태를 유지하게 했다. 혹시 급소를 잘못 때리면 직접 오러로 치료까지 해 줬다.
불행하게도 클라우스는 그렇게 맞도록 정신을 잃을 수도, 죽을 수도 없었다.
아마 이 정도로 맞아 본 건 처음일 터였다.
인한도 이 정도로 때린 건 처음이었지만.
그때였다.
“그만하십시오.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어느새 수많은 헌터들이 인한을 둘러싸고 있었다.
인한은 좌중을 한 번 훑어보았다.
“저는 템플 팀의 팀장 데이빗입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최인한이다.”
인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인한의 이름은 그리 잘 알려진 이름이 아니었다.
“반갑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제 그만 그를 놓아주시겠습니까.”
데이빗은 젠틀하고 차분한 사내였다. 그는 인한을 경계하면서도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물론, 정중하다 한들 인한이 받아 줄 이유는 없었다.
“못 들었나? 이놈이 이 일을 벌인 거다.”
“처음 보는 사내가 갑자기 난입해 헌터를 두들겨 팬다면, 그 말을 믿겠습니까?”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거기까지만 하십시오. 의문이 있다면 저희 쪽에서 조사하겠습니다.”
그때였다.
구석에 있던, 붉은 수염 팀의 팀장이 갑자기 앞으로 뛰어들며 말했다.
“어이! 너! 솔직히 말해! 저런 강한 녀석을 혼자서 쓰러뜨릴 수 있을 리가 없다. 네놈, 혹시 네놈이 이 모든 걸 꾸민 것은 아닌가! 애초에 이미 공략 중인 보스존에 들어갈 수 있는 게 말이 될 것 같냐?!”
그는 인한에게 삿대질하며 외쳤다.
그러자 좌중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 말 그대로였다.
고작 지면에 격돌하는 것만으로 수십의 공략자들이 목숨을 잃고 대다수의 공략자들이 행동 불능에 빠졌다.
거기다 블러드리드의 레벨은 70이 넘었다.
그런 몬스터를 단신으로 압도한 모습은 보고도 믿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야말로 무슨 조작이 있다고밖에는 말할 수가 없었다.
“흥! 변명해 보시지!?”
인한의 차가운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순간 흠칫 몸을 떤 사내였지만, 이내 가슴을 쭉 펴며 인한의 시선을 마주했다.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데이빗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일리 있어. 당신은 어떻게 보스존의 문을 열고 들어온 것입니까? 선행 팀이 있으면 보스존은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데. 당신은 분명 보스존의 문을 열고 난입했습니다.”
“…….”
인한이 혀를 찼다.
이번에는 뭐라 둘러댈 말이 없었다.
그건 왕의 권세의 힘이었다.
인한이 다급하게 문에 다가간 순간, 제약이 해제되고 인한에게 길이 열렸다.
그런 인한의 눈에 하영의 위험이 보였고, 인한은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었을 뿐이었다.
잠시 데이빗을 바라보던 인한이 말했다.
“그냥 열렸다. 나도 몰라.”
“예……?”
데이빗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하여튼 이제 그만하십시오.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렇게 처참하게 두들겨 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충분하지 않습니까.”
인한이 입을 꾹 닫았다.
인한의 분위기가 누그러진 걸 알았는지, 데이빗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클라우스 씨를…….”
인한이 입을 열었다.
“싫어.”